24.
“야, 저녁에 뭐 먹고 싶어?”
하람이 아침 댓바람부터 건오의 서재를 찾아왔다.
밤새 재판 준비를 한 건오는 대뜸 제 공간을 침범한 친구를 곱게 보지 않았다.
“연다봄이 저녁에 온다는데.”
문에 기댄 하람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건오의 날카롭던 눈매가 금세 허물어지는 꼴이 하람의 눈에 띄었다.
“누나 먹고 싶은 거 먹어.”
건오는 다봄의 의도가 훤히 읽혔다.
둘만 있지는 않겠다는 뜻에 서운하면서도, 정말 피하지 않고 찾아오는 다봄이 고맙기도 했다.
“아, 연다봄은 너 먹고 싶은 거 먹자고 하니까 그렇지.”
하람이 부스스한 머리를 넘기며 짜증스레 대꾸했다.
건오의 고민이 시작됐다. 다봄이 좋아하는 음식 중 뭘 골라야 그럴 듯할까.
문에 기대 그 꼴사나운 모습을 지켜보던 하람은 곧 버럭 짜증을 냈다.
“아니, 연다봄은 너 먹고 싶은 거 먹을 거면 너한테 직접 연락하지 왜 나한테 전화하는 거야? 귀찮으니까 그냥 네가 연다봄한테 연락해. ”
“좋은 생각이야.”
“커피 내릴 거야. 네 것도 내린다.”
하람은 대답도 듣지 않고 건오의 서재를 나가 버렸다.
건오가 바로 핸드폰을 찾았다.
-어어.
통화 연결음이 끊길 때쯤 다봄이 말을 길게 늘이며 전화를 받았다.
“누나.”
-응.
핸드폰 너머로 다봄의 어색함이 전해졌다. 이 정도면 오늘 또 만나자는 그의 요구를 무시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어제 나 때문에 해장국 먹었잖아.
“그럼 닭 어때요?”
-너희 집 근처 찜닭 말이지? 괜찮겠다.
큰 범위를 정해 주니 그녀는 맛있게 먹었던 메뉴를 떠올렸다.
저녁 식사가 싱겁게 정해졌다. 하람이 보면 기막혀할 장면이었다.
“언제 올 거예요?”
-6시?
“데리러 갈까요?”
-나 좀 더 자야겠다. 이따 봐.
그대로 통화가 뚝 끊겼다. 때맞춰 하람이 커피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어이없이 웃었다.
“좋냐?”
“뭐가.”
“연다봄 하나에 입꼬리가 아주 멋대로 움직이지?”
하람이 커피 잔을 건오의 책상에 올렸다. 건오는 모르는 척 괜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뭐 먹기로 했어?”
“찜닭.”
“연다봄 취향이네.”
뭘 먹어도 상관없는 하람이 건오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건오가 하람이 내린 커피를 마셨다.
“고맙다.”
“최도영 사건 말인데.”
하람이 커피를 마시며 다짜고짜 일 얘기를 꺼냈다. 건오는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6시에 다봄을 보려면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 * *
씻지도 않은 하람과 달리 건오는 샤워를 하고 간단히 머리도 정리했다.
저녁까지 눈곱만 뗀 하람은 말끔해진 친구의 턱을 보고 제 턱을 문질러 봤다. 까슬까슬했다.
“내가 널 보며 느낀 게 있어.”
막 공동 현관문을 열어 준 하람이 식탁을 정리 중인 건오에게 말했다.
“누굴 좋아하는 건 너무 귀찮은 일인 것 같아.”
“그럴지도.”
건성건성 대답하는 건오의 신경은 곧 이 공간에 들어설 다봄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기다리던 초인종이 울렸다.
하람은 찜닭을 반기기 위해 친히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벌써 주문이 밀려서 어쩔 수 없었어.”
엄살을 부리는 동생에게 음식 봉지를 내민 다봄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중문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니 그 끝에 건오가 서 있었다.
“왔어요?”
“응.”
갑자기 인사를 하기도 뭣해 다봄은 화장실을 가리켰다.
“나 손 씻고 올게.”
일단 자리를 피해서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물을 틀었다.
‘자연스러웠나?’
행동은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은 너무 굳은 듯해 볼에 바람을 넣고 얼굴 근육을 풀어 주며 손을 씻었다.
그 와중에 하람의 외침이 들렸다.
“엄마한테 전화 온다.”
“네가 받아.”
대충 대답하며 욕실을 나선 다봄은 이미 세팅된 식탁에 자리를 잡으려다 멈칫했다.
그녀의 자리가 건오 옆이었다.
“네. 엄마도 챙겨 드세요. 아, 연다봄 바꿔 드릴까요? 네. 그럼 나중에 전화할게요.”
선하가 괜찮다고 했는지, 하람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멀뚱히 선 다봄을 올려다봤다.
“뭐 해? 안 앉고?”
하람이 그녀의 자리에 핸드폰을 밀어 주자 다봄도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식사가 시작됐다.
정말 배가 고팠던 하람은 먹느라 바빴고, 나란히 앉은 건오와 다봄은 말이 없었다.
그나마 거실에서 들리는 TV 소리가 조용한 집 안을 메워 주었다.
-오늘 수현 씨와 함께한 이야기, 정말 유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창 주말 토크 쇼가 방영되고 있었다. 다봄도 종종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마지막 손님이죠. 은퇴하고 더 바쁜 것 같은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 대한의 아들, 금메달리스트 서지한 씨 모시겠습니다.
우렁찬 MC의 소개와 함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세 사람의 젓가락질이 동시에 멈췄다.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한번 해 주세요.
-네, 안녕하세요. 올해 은퇴한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 서지한입니다.
TV에서 지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접시를 내려다보는 다봄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굴렀다.
그 와중에도 지한의 인터뷰는 계속 진행되었다.
-근데 지한 씨, 목소리가 너무 좋으신데요? 제가 수많은 분을 인터뷰했지만, 지금껏 만나 뵌 남자분들 중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목소리예요.
남자 MC의 호들갑에 지한이 웃었다.
다봄은 웃음소리만 듣고도 지한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 그림이 그려지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다봄은 저를 부른 동생이 아니라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친 건오를 보았다.
“뉴스 보려고.”
“리모컨 소파에 있어.”
하람이 기다렸단 듯 소파를 가리켰다.
거실로 향한 다봄이 망설임 없이 뉴스 채널로 화면을 돌렸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건오와 하람의 눈길이 식탁 위 핸드폰 액정에 닿았다.
“누구야?”
다시 식탁으로 돌아온 다봄에게 건오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서지한이요.”
“아.”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기도 전이었다. 다봄은 얼떨결에 제 손으로 통화를 연결해 버렸다.
당황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다봄은 당황하고 말았다.
-봄아.
“응.”
-밥 먹었어?
“먹고 있었어.”
-아…… 그렇구나.
“오빠는 밥 먹었어?”
다봄은 도로 소파로 돌아가며 혼란스러움을 잠재웠다.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끊으면 된다.
-나는 아직.
“그럼 오빠도 저녁 먹어. 나도 다시 식사하러 가 볼게.”
-다봄아, 내일 오후에 카페 갈게. 1층에서 잠깐 커피 마시자.
“회사 1층?”
다봄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 순간 든 생각에 스스로 기가 막혔지만, 이미 그녀는 뉴스 채널에서 예능 채널로 다시 화면을 돌렸다.
-응. 바빠?
“바쁘긴 바쁜데, 오빠, 그러면 카페 온 김에 이벤트 좀 할래?”
주말 TV 토크 쇼에서 마지막 게스트로 초대된 지한의 영향력을 보고 나니, 지난주 금요일 신제품 음료 실적을 보고받던 부대표 연다봄이 튀어나왔다.
이미 해수가 아이디어를 내놨었지만 고개를 내저은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괜찮은 이벤트라 아쉬웠던 참이다.
-지금 너 보러 가는 사람한테 일해 달라는 거야?
지한이 그녀의 제안을 되물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화면 속 지한도 웃었다.
“우리 모델들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유명한 것 같아서.”
-승훈 형도 하는 거야?
“물어볼게. 오빠는 내일 오후 시간 괜찮은 거지?”
-와,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진행해도 돼?
신제품은 몇 주 지나면 곧 판매 종료될 상품이라 시간이 중요했다.
론칭한 지 얼마 안 된 지금이 적기다.
“오빠 에이전시엔 내가 아침에 연락해 볼게. 오빠가 미리 긍정적으로 말 좀 넣어 주라.”
-봄아, 나 아직 한다고 말 안 했는데?
토크 쇼가 끝나가고 있었다. 거실을 서성거리던 다봄은 TV 앞에 멈춰 화면 속 지한을 응시했다.
마치 정말 그를 앞에 둔 듯 그녀가 대답했다.
“해 줄 거잖아.”
-너…….
“광고 모델로서.”
그녀는 확신했고, 지한은 잠시간 침묵했다.
그들은 서로가 어떤 모습으로 통화를 하는지 알았다.
일하는 다봄은 식사도 잊고 눈을 빛냈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한은 황당한 얼굴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봄이 넌 나한테 뭐 해 줄 건데?
지한은 늘봄의 광고 모델이지만, 하루 전에 이런 식의 제안에 응하는 건 확실히 모델의 재량이었다.
“원하는 거 있어?”
-네 시간.
지한은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부터 쉼 없이 말하던 다봄의 입술이 다물렸다.
화면에선 지한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바쁘다니까, 24시간? 나눠 쓸 수 있게.
“내가 싫다고 하면?”
토크 쇼가 끝났다.
그럼에도 아직 다봄의 귓가엔 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네가 싫다고 안 할 거 알아.
그 확언에 다봄도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렇게 구두 계약이 성사됐다.
-얼른 밥 먹어. 내일 보자.
“알겠어. 부탁해.”
용건만 간단히 하려던 통화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만, 다봄은 조금 들떴다.
그녀는 밥을 먹으라던 지한의 인사말을 흘려보내고, 바로 승훈에게 이어 전화를 걸었다.
승훈은 오늘도 쉽게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승훈이 핸드폰을 멀리 두고 사는 걸 알면서도 다봄은 두 번이나 더 걸어 봤다.
거실을 오가며 승훈을 찾던 그녀가 무심코 식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잠깐 잊고 있던 녀석들과 눈이 마주쳤다.
다봄이 멈춰 섰다.
“연다봄, 제발 편하게 밥 좀 먹자.”
팔짱을 낀 하람이 많은 감정을 담아 부탁했다.
아차 싶은 다봄이 머뭇머뭇 자리로 돌아갔다. 놀란 마음으로 그의 옆에 앉으니 버릇처럼 눈썹이 내려갔다.
그녀는 그때부터 건오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집 안에 떠다니는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람은 평소와 다른 다봄을 보며 미간을 모았다.
제가 한숨을 쉰 것 가지고 불편해할 다봄이 아닌데, 그녀는 마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불안정해 보였다.
하람의 시선이 건오에게 돌아갔다.
당연히 친구의 눈은 다봄에게 고정돼 있었다.
둘 사이의 묘한 긴장감, 그리고 제가 느끼는 묘한 위화감.
하람은 까슬까슬한 턱을 문지르다 부러 둘이 불편해하는 주제를 입에 올렸다.
“그래서, 내일 늘봄 본사 카페에 가면 그 유명한 서지한을 볼 수 있는 거야?”
“일이 잘되면?”
다봄은 저를 보는 건오를 알고 있으면서 동생만 쳐다봤다. 서지한을 말할 땐 의도적으로 건오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하람의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백건오, 미쳤구나.
속으로 경악한 하람은 돌연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런데 연다봄이 백건오 마음을 알면서도 여길 찾아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