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회색 후드티에 검은색 패딩을 껴입고 청바지에 캔버스화를 신은 그녀가 머쓱하게 이마를 긁적였다.
“사장님을 여기서 뵙네요.”
다봄을 확신한 호섭이 반가워하며 일어섰다.
“이런 차림새로 뵙게 되어 너무 민망하네요.”
“저는 대학생인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호섭이 직접 건오의 사무실 문을 열어 주고, 다봄은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게 되었다.
다봄은 건오와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하고 호섭에게 붙잡혔다.
“건오와 밥 먹으러 온 겁니까?”
“네. 아, 약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혼자 찾아온 거라, 건오와 둘이 편하게 드세요.”
“아뇨. 이렇게 봐서 반갑기만 한걸요. 연 대표가 괜찮다면 함께 점심 들죠.”
호섭은 시원시원하게 제안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다봄을 반겼다. 그 사이 건오의 얘기를 편하게 할 수 있게 된 게 영향이 컸다.
다봄은 그제야 건오와 시선을 맞췄다. 어떠냐는 무언의 신호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호섭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다봄이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자 호섭이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말을 돌렸다.
“연 대표는 뭐 먹고 싶습니까? 내가 다 사 주고 싶은데.”
다봄은 지난번 호섭이 주문했던 식탁 위 음식들을 떠올렸다.
그 양을 떠올리니 무작정 아무거나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저는…….”
해장국이란 단어가 목구멍에서 턱 걸렸다.
다봄이 고민하고 있으니 호섭이 의견을 내놓았다.
“낮술은 어떱니까?”
“읍.”
다봄이 양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회식의 여파로 고생하던 중인 탓에 술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즉시 반응하고 말았다.
“누나, 괜찮아요?”
“괜찮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뭘 먹어야 하지? 죽을 먹어야 하나?”
호섭은 유난히 당황하며 건오와 다봄을 번갈아 응시했다.
다봄이 당분간 술은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을 때, 건오가 세상 바쁜 사람처럼 외투를 걸쳤다.
“나가시죠, 사장님. 해장국집 괜찮죠?”
건오는 질문을 했지만,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문을 잡은 채 기다리니 다봄과 호섭은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이 와중에 다봄은 호섭을 사장님이라 부르는 건오의 호칭에 놀란 상태였다.
“해장국을 좋아합니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호섭이 놀란 다봄에게 물었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혹시 해장국이 별로인가 싶어 다봄은 재차 확인했다.
“네. 근데 사장님께선 해장국 정말 괜찮으세요?”
“그럼요.”
“다행이에요. 사실 오늘 해장국이 먹고 싶었거든요. 그걸 건오가 알아봤네요.”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 두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는 건오였다.
다봄은 그의 다정함을 자연스럽게 알렸다. 호섭이 부드럽게 웃었다.
“보기 좋네요. 전엔 이런 얘길 못 할 상황이라 아쉬웠습니다.”
“전 진짜 상상도 못 했어요. 알았다면 제가 모셨을 텐데.”
“무슨 소립니까. 제가 고마워해야죠.”
엘리베이터 가장 안쪽에서 호섭과 다봄을 응시하던 건오는 1층에 도착하자 다시 앞장섰다.
건오를 따라 바로 옆 건물 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이 모두 같은 해장국을 주문했다.
빠르게 나온 해장국 국물을 먹는 순간, 다봄은 무심코 살겠다고 말할 뻔했다.
“오늘 여기서 연 대표와 해장국을 먹을 줄은 몰랐는데, 재밌고 좋군요.”
“다음에 만나 뵈면 오늘 차림은 잊어 주세요.”
“하하. 왜요. 잘 어울리고 예쁜데. 그나저나 입점 준비는 잘 되어 가나요?”
두 사람은 당연하게 일 얘기로 넘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건오와 관련된 이야기는 더는 섞지 않았다.
누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당연하게 그렇게 되었다.
“내가 따로 연락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건오가 계산하는 동안 식당을 먼저 나선 호섭이 뒤따라 나오는 다봄에게 물었다.
다봄은 그 말을 기다린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럼요.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호섭은 안도했다. 그녀의 긍정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건오가 다봄의 곁에서 자랐다는 게 이렇게나 다행일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요, 연 대표.”
“네, 또 뵐게요, 사장님.”
“그래요. 건오는 쉬엄쉬엄 일하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무뚝뚝한 건오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호섭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다봄은 시야에서 호섭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건오도 안쓰럽고, 호섭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누나.”
다봄이 건오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빛을 본 그는 버릇처럼 눈썹을 모았다.
“그거 하지 말라니까.”
“응?”
“동정.”
대뜸 들려온 단어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건오는 그녀의 시선이 익숙한 듯 먼저 등을 보였다.
다봄은 그를 뒤따라가며 천천히 호흡했다.
다시 사무소로 돌아와서야 다봄은 어수선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
“동정 아니야.”
커피를 내리던 건오가 다봄을 돌아봤다. 그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살짝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던 것처럼 보여 다봄은 억울했다.
“가엽고 안타깝고, 그렇죠?”
“그게 동정이야?”
“마셔요.”
그는 아직 앉지 않은 그녀 자리에 커피 잔을 두었다.
다봄이 커피 잔 앞에 앉자 건오가 제 몫의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널 처음 봤을 땐 모르는 사이였으니까 확실히 그랬을 거야.”
이번에 건오는 뒤돌지 않았다. 그의 너른 어깨가 유독 외로워 보였다.
“내가 널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네가 소중해서 그래.”
동정이라면 동정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것과, 건오에게 느끼는 감정은 확실히 달랐다.
“너에게 느끼는 모든 감정은 내 애정에 기반해 있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다봄은 꾸역꾸역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절로 미간이 모였다.
“건오야.”
하지만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다봄은 미처 언어로 꺼내지 못한 속마음을 그가 알아주었으면 하듯 그를 불렀다.
그제야 건오가 진작 채워진 커피 잔을 들고 다봄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무하네.”
그는 자리를 잡자마자 가볍게 다봄의 탓을 하고는 커피를 마셨다.
“그 말이 나한테 어떻게 들리는 줄 알아요?”
순간 굳어 버린 다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가 그 모습을 주시하며 비딱하게 말했다.
“누난 확실히 내가 상처받는 게 무서운가 봐요.”
“알아. 내가 방금 한 말이 희망 고문일 수도 있다는 거.”
다봄은 건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며 조심스럽게 말하던 조금 전과 달랐다.
“근데 네가 기회를 달라고 했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부터 이미 희망 고문은 시작됐어.”
그녀는 명확한 음성과 어울리는 눈빛을 하곤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 진심을 희망 고문으로 여기지 마. 네가 날 생각하는 마음과 상관없이 내 마음이 그런 거니까.”
침묵이 이어졌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커피가 식어 갔다.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던 그는 이내 목덜미를 문지르며 실웃음을 흘렸다.
다봄은 차가운 얼굴로, 차가운 어조로, 하염없이 따뜻한 말을 전했다.
“왜 웃어?”
제 뜻이 왜곡되어 들린 걸까, 다봄의 표정이 꽤 심각했다.
건오는 대답을 미루고 커피 잔을 들었다. 손도 대지 않은 다봄의 커피 잔을 본 그가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다봄과 함께하니 식어 빠진 커피도 마실 만했다.
“누나가 그렇게 절 아끼는데, 제가 어떻게 포기를 할까 싶어서요.”
심드렁하게 대답한 그는 마저 커피를 마셨다.
굳었던 다봄의 얼굴이 어찌할 새도 없이 녹았다.
그녀가 뒤늦게 인상을 써 보았지만, 긴장한 티만 날 뿐이었다.
“책임 떠넘기지 마.”
“책임지라는 말은 안 했는데.”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반박하자, 다봄은 황급히 커피 잔을 찾았다.
자고로 커피는 천천히 마셔야 한다는 지론을 무시하고 무작정 들이켜던 와중이었다.
“책임져 달라면 져 줄 거예요?”
커피가 잘못 넘어갔다.
다봄이 기침을 쉼 없이 토하자 건오가 서둘러 물을 가져다줬다.
당황한 그가 등도 두드려 주려는데, 다봄이 그의 손을 쳐 냈다.
“너 진짜.”
그녀는 기침하느라 생리적으로 붉어진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건오의 낯빛이 대번 곤란해졌다.
다봄은 기침이 좀 멎은 후에야 물을 마셨다.
“미안해요. 그렇게 놀랄 줄 몰라서.”
“안 놀라게 생겼어?”
“얼른 적응해요.”
다봄은 나무라던 것도 잊고 입을 벌렸다. 그의 반응이 기가 막혔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건오가 구슬리듯 말했다.
“기회를 줬으면 이 정도 구애는 봐 줘야죠.”
어이없게도 그 말에 다봄은 설득당했다.
“나 가야겠어. 이제 일 해.”
결국 다봄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통보했다.
건오가 그녀를 붙잡으려 하는데, 다봄이 서둘러 일어서며 반이나 남은 커피 잔을 그에게로 밀어냈다.
“너 바빠서 주말까지 사무실 나온 거잖아.”
“그럼 내일 또 만나요.”
바쁜 걸 부정할 수는 없으니 그는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밥 같이 먹어요.”
“……약았어.”
다봄을 따라 일어선 건오는 쉽게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도 좋네요.”
“뭐가?”
“누나랑 밥 한번 같이 먹겠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돼서.”
그간 건오의 말과 행동을 의심조차 하지 못했던 다봄은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모르겠단 얼굴을 한 다봄에게 친절히 부연했다.
“보고 싶을 때마다 핑계 지어내느라 힘들었어요.”
그게 은근히 골치 아프다고요.
뻔뻔하게 그를 찾아왔던 다봄은 저보다 훨씬 뻔뻔한 건오를 보며 맥을 못 췄다.
“가요. 데려다줄게요.”
“뭘 데려다줘? 시끄러워. 넌 여기 있어.”
다봄은 붉어진 얼굴로 공연히 날을 세웠다.
그런데도 건오가 기어이 먼저 문을 열고 나서자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자꾸 이러면 나 너 안 찾아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오의 발이 멈췄다.
자리에 우뚝 선 그는 상당히 불편한 눈으로 다봄을 봤다.
정말 안 되냐는 무언의 물음에 다봄의 답은 확고했다.
“……배웅은 괜찮죠?”
뺨이 발그레한 상태로 하는 하찮은 협박이었지만 결국 건오는 고집을 꺾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