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22/72)

22.

양치만 끝낸 다봄이 슬금슬금 욕실을 나왔다. 그 모양새가 마치 남의 집을 빌려 쓰는 듯했다.

“안 씻어요?”

건오가 막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안으로 라면을 넣고는 뒤돌아섰다.

다봄은 집에 있는 줄도 몰랐던 라면을 찾아낸 그는 아무렇지 않게 조리를 시작한 터였다.

이 광경에 위화감을 느끼는 건 다봄 혼자다.

“뻔뻔해.”

다봄은 다 들리게 꿍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건오가 멈칫했지만 그녀는 김치를 꺼내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까지 저녁도 안 먹은 거야?”

그녀는 말을 돌리며 식탁 의자를 빼 앉았다. 건오가 집에 왔는데 차마 혼자 둘 수는 없었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다봄의 눈썹이 모였다.

“그럼 어제 저녁밥은 먹었어?”

“글쎄요.”

심드렁하게 대꾸한 그는 다봄의 맞은편에 냄비를 가지고 왔다.

“혼내지 마요. 지금 먹으니까.”

다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보같이, 그 소리에 아무 말도 못 했다.

“알잖아요.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밥이 안 넘어가요.”

“그게 날 말하는 거면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다봄의 말이 끝나자마자 건오가 픽 웃었다.

그녀가 의아해하며 보는데,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다봄을 응시했다.

신경 쓰이는 게 절 말하는 게 아닌가 싶어 머쓱해진 다봄이 뺨을 긁적인 순간이었다.

“모든 신경이 누나한테 쏠려 있는데, 어떻게 그게 되겠어요.”

태연하게 말한 그는 먹지도 않은 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러운 와중, 화르르 붉어지는 얼굴은 또 무슨 일인가.

다봄은 술기운이 뒤늦게 올라오기라도 하는 척 찬물을 찾아 일어섰다.

“그런 말 하지 마.”

“듣기 싫어요?”

그녀를 따라 일어선 건오가 정수기 앞에 선 다봄에게 물잔을 건넸다. 그가 끓인 라면은 서서히 붇고 있었다.

“고마워. 얼른 먹어.”

이 와중에도 그녀는 참 다정했다.

건오가 그런 다봄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누나 얼굴이 빨개요.”

“술 마셔서 그래.”

“많이 마셨어요?”

“그런 것 같아.”

“취했어요?”

“다 깼어.”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요?”

그의 눈동자에 그녀가 담겼다.

다봄은 그제야 건오와 자신의 거리가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많을 텐데.”

건오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응. 많아.”

다봄은 티 나지 않게 다시 거리를 벌리려 조심스레 뒷걸음질 쳤다. 역시 어지러웠다.

“물어봐요. 다 대답해 줄게요.”

그녀가 벌려 놓은 거리만큼 건오가 성큼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행동을 모른 척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

다봄은 건오를 멀거니 올려보다 무심코 또 뒷걸음질 쳤지만, 그는 표정 없이 또 거리를 좁혔다.

“……언제 만났어?”

그녀는 굳이 목적어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건오가 바로 답했다.

“3년 좀 안 됐어요.”

“왜, 말 안 했어?”

덤덤한 그의 음성에 반해, 그녀의 음성은 조금씩 떨렸다.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게 어떻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달라질 게 없었으니까.”

이번엔 건오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다봄은 그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이 목소릴 높였다는 걸 깨달았다.

“누나한텐 여전히 백건오였으면 했어요.”

건오는 다봄에게서 눈 한 번 떼지 않고 말했다.

“혹시나 누나가 날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면 못 견딜 것 같았거든.”

거기까지 말한 건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 말에 다봄이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이유에서든, 지금 그녀는 전과 다르게 그를 대하고 있었다.

“근데 이대로 있다간 정말 가여운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더라고요.”

건오 스스로는 인정하긴 싫지만 그 변화의 기점엔 다봄의 첫사랑, 서지한이 있었다.

자신은 평생 동생인데, 처음부터 남자였던 그놈.

그가 다시 나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선 파티 초대장까지 보게 되었다.

누가 봐도 아쉬울 게 없는 놈들 배경에 일순 제가 초라해졌다.

남들은 바라 마지않는 학력도, 악착같이 모으는 자산도. 모든 게 부질없어 보였다.

그래서 불안해졌다.

“어때요. 이젠 내가 좀 남 같아요?”

“남이라고……?”

“네. 남이요.”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항상 다봄과 남이고 싶었다.

누구보다 다봄 곁에 어울리는 배경을 갖추고픈 열망으로 삶을 쌓아 왔지만, 동시에 다봄이 그를 외면할까 봐 다가갈 수 없었다.

“누나.”

그러나 다봄을 둘러싼 상황들이 마침내 그의 인내심을 바닥냈다.

“나 그만 동정해요.”

다봄이 다른 남자 옆에서 웃는다는 건, 그에겐 삶이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건오야.”

건오가 내려간 다봄의 눈꼬리를 엄지로 쓸었다.

살짝 스치는 서로의 살갗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중매 자리도 나가지 마요.”

“제발.”

다봄은 뭘 부탁하는 줄도 모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기 어린 그녀의 눈망울 속에 미간을 모은 채 간절하게 토로하는 남자가 비쳤다.

“부탁은 제가 할게요. 도망치지 마요. 처음부터 이 마음이었어요. 그걸 불쌍하게 생각해서라도 제발 달아나지 마요.”

다봄은 이제 뒷걸음질 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소리 내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그녀의 말을 들은 것처럼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괴로운 눈을 하고 입술을 끌어올린 그가 조용히 말했다.

“같이 산 정이 있는데, 나한테 기회 정도는 줄 수 있잖아요.”

그의 목소리가 젖고, 그의 눈이 깊게 잠겼다.

다봄의 눈앞에서, 건오가 애원했다.

그녀의 세상에 벼락이 떨어졌다. 다봄은 울지 않기 위해 눈썹을 찌푸렸다.

그 모양새를 거절로 받아들인 건지 그의 음성에 억울함이 묻어났다.

“서지한도 보면서 왜 난 피하는 건데.”

다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그 전에 제가 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 해야 할 말만큼은 알 것 같았다.

“안 그럴게. 안 피할게.”

어느새 다봄은 조급하고 여유가 없어졌다.

눈앞의 건오를 보니 당장 어떤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지한과 달리 기회를 준다는 말까진 하지 못했다.

그건 그녀의 마지노선이었다.

“정말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다봄에게 손을 뻗었다.

언뜻 녀석의 눈이 위험하게 번득였지만, 다봄은 다가오는 그의 손에 시선을 두었다.

“그럴게.”

그녀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간 커다란 손이 결 좋은 다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는 머리를 정리해 주는 행위를 반복하며 몰아붙였다.

“기회도 준다는 말로 이해해도 돼요?”

아닌 걸 알면서, 건오는 그 말이 대단하기라도 한 것처럼 듣고자 했다.

그도 그 단어가 그녀의 마지막 선임을 알아챈 것이다.

다봄이 대답하지 못하자 건오는 천천히 손을 거두고 허리를 폈다. 가까웠던 거리만큼 멀어진 간격이 못마땅했지만, 그는 한 발 더 물러섰다.

건오는 자신이 상처받은 모습일수록 다봄이 흔들릴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응. 그래.”

다봄은 매달리다시피 구는 건오를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그런 걸로 하자.”

그녀가 눈을 꽉 감고 말했다.

건오의 입꼬리가 정말 미소를 지은 것처럼 보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시는 버리듯이 두고 가지 마요.”

그가 애달프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봄은 번잡스러운 머릿속을 밀어내고 무작정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그래. 안 그럴게.”

건오는 온 마음을 다해 다봄에게서 원하는 말을 얻어냈다. 그 과정에서 머리를 굴리긴 했지만, 그런 것 따위에 죄책감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다봄은 겨우 곁을 내준 것뿐이다. 건오는 그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갈게요.”

“라면은 어쩌고?”

“라면까지 먹으면 자고 가고 싶을 것 같아서요.”

건오가 아직 김이 오르는 라면을 개수대에 부었다.

다봄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자고 가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지.”

“집에서 먹을게요.”

집에서 먹겠다는 말이 믿기지는 않았지만, 다봄은 당장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공연히 눈만 샐쭉 뜨고 있으니 건오가 차 키를 챙겼다.

“정말요. 누나가 피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건오는 안절부절못하는 다봄을 보며 살짝 웃었다.

그 미소를 발견한 그녀는 어색하게 시선을 내렸다.

역시 이런 건오를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재우긴 힘들 것 같았다.

“갈게요.”

“응. 밥 챙겨 먹어.”

“쉬어요.”

건오가 다봄을 지나쳤다.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의 향수 냄새가 다봄에게 머무른 듯 느껴졌다.

최근 들어 그녀는 매일 밤 건오 꿈을 꿨다.

그 꿈속에서 그는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녀와 인사하고, 웃고, 대화를 나눴다.

익숙하다고 생각하던 그의 눈길이 꿈에서 깬 후에도 잔상처럼 남았다.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은 분명 마음을 드러내기 전과 같은데, 이제 와 그 눈이 더 깊은 애정을 담은 것처럼 느껴졌다.

상황이 만들어 낸 착각일까.

“다 틀렸네.”

다봄은 혼잣말을 하며 다시 욕실로 들어섰다.

취한 상태로 잠들어 꿈도 꾸지 않고 자려 했던 계획이 전부 틀어졌다.

그녀는 오늘 꿈에도 녀석이 나오리라고 확신하며 샤워기 아래 섰다.

그리고 여지없이 건오가 찾아왔다.

* * *

다봄은 조금, 아니, 많이 뻔뻔해지기로 했다. 피하지 않겠다 했으니 그 말을 핑계 삼아 핸드폰을 들었다.

이게 다 그놈이 라면을 버리고 간 탓이다.

“연하람, 밥 먹었어?”

-어.

“건오도?”

-걔? 백건오는 따로 물어봐.

“같이 안 먹었어?”

-사무실 갔어. 요즘 상태로 봐선 안 먹었을 것 같긴 한데, 왜? 네가 챙겨 주게?

물어보는 하람의 목소리가 뾰족했으나 다봄은 밥 잘 먹는 동생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응. 끊어.”

원하는 대답을 듣자마자 통화를 종료한 다봄은 차 키를 챙겼다.

쓰린 속을 붙잡고 운전하려니 고역이 따로 없었지만 기어코 주차까지 마쳤다.

그녀는 핸들에 거의 기대다시피 엎드려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오랜만에 건오의 번호를 찾아 눌렀는데, 신호음이 길게도 이어졌다.

“바쁜가?”

건오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봄이 재차 통화를 연결하려 했지만, 두 번째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갸웃한 그녀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건오야.”

25층에 다다른 다봄은 문을 열며 그를 불렀다. 토요일이니 당연히 사무소에 건오만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 왔어.”

다봄은 역시나 텅 빈 공용공간을 지나쳐서 건오의 사무실 앞에 섰다.

이윽고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은 창문을 두고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예상과 달리 건오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나?”

“어…….”

그녀는 당황했다.

그가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봄은 저 옆모습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러냐?”

건오의 눈길을 따라 함께 있던 남자도 고개를 돌렸다.

“연 대표?”

부대표는 너무 길다며 대표로 부르겠다던 제양의 윤호섭 사장, 그러니까 건오의 친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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