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21/72)

21.

회식 자리엔 약 서른 명의 인원이 모였다. 대표까지 참석한 만큼 각자 자리에서 책임이 막중한 이들이었다.

“부대표님, 오늘은 언제쯤 가실 거예요?”

해수가 다봄에게 속삭였다. 회식 때면 스리슬쩍 잘도 빠져나가는 다봄을 뒤따라갈 생각이었다.

“오늘은 기약 없어요.”

“에이.”

“진짜예요.”

믿고 있던 동아줄이 한순간에 끊긴 해수는 믿기 싫은 얼굴로 제 앞에 놓인 와인을 마셨다.

회식 자리에 와인이라니,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여기선 익숙한 풍경이었다.

대표와 부대표가 와인 애호가인 덕분이었다.

“그럼 마음껏 먹고 들어가세요.”

“벌써 가세요?”

“내가 빠져야 편하게 놀지.”

하지만 와인 애호가인 대표가 먼저 회식 자리에서 빠졌다.

다봄은 으레 그랬듯 다른 이들에게 앉아 있으란 신호를 보내고는 주혁을 따라나섰다.

“술은 안 드셨어요?”

“운전해야 하니까. 딸은?”

“전 뭐, 택시 타면 되죠.”

“언제 들어갈 거야?”

“2차, 3차까지 달리려고요.”

“네가 잘도 그러겠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주혁은 눈썹을 한 번 찡그리고는 운전석에 올라타 가장 먼저 집으로 출발했다.

다봄이 회식을 싫어하는 걸 아는 주혁은 2차, 3차까지 간다는 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요즘 다봄의 상태가 내심 마음에 걸렸다.

“최 실장.”

주혁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그럼 부대표님,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고 다음 주에 봬요.”

1차가 끝나고 2차 민속주점으로 옮겨 양은 잔에 막걸리를 부었을 땐, 주혁과 해수를 포함해 10여 명이 귀가한 뒤였다.

“부대표님, 괜찮으세요?”

“물론이죠.”

다봄은 이중 가장 어렸지만 제 곁에 앉은 사람들과 화기애애하게 막걸리를 주고받았다.

“딸기 막걸리는 처음이에요. 다들 드셔 보셨어요?”

시간이 지나며 다봄의 말이 슬슬 느려졌다.

“제가 사실 중국어 과외를 받은 지 3년이 넘었거든요. 근데 늘지를 않아요. 숙제를 안 해서 그런가?”

어느 순간부터 사적인 부분도 섞이기 시작했다.

“부장님께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더 시간이 흐르자 평소에 절대 하지도 않던 말까지 했다.

다들 약속한 것처럼 최 실장을 쳐다봤다. 그렇지 않아도 그 역시 막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있었다.

“네. 늘봄 최동우 실장입니다. 지금 통화 괜찮습니까, 하람 씨?”

최 실장은 바람 쐬러 나가는 척, 자리를 벗어나며 통화를 이어갔다.

“대표님께 연락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부대표님께서 만취 상태여서 연락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소 좀 부탁드립니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전화가 올 줄이야.

미리 주혁에게 언질을 받았던 하람은 야근하면서도 핸드폰을 곁에 두어야 했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게 된 탓에 아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연다봄, 이 원숫덩어리.”

하람이 욕을 구시렁거리며 외투를 걸쳤다. 파일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챙기는 몸짓이 급했다.

그가 후다닥 자리를 정리하고 막 사무실 불을 끄려는데, 의뢰인에게 전화가 왔다.

“연하람입니다.”

전등 스위치에서 손을 내린 하람은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했다.

“잠시만요, 제가 바로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그는 급한 대로 반대편 사무실로 건너갔다.

하람과 함께 야근하고 있던 건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친구의 얼굴에 피로와 짜증이 섞여 있었지만 하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 백건오의 상태는 매일 저러했다.

“너 당장 처리할 거 있어?”

“뭔데 유난이야?”

“내가 지금 주소 보낼 테니까 여긴 네가 가.”

웬만하면 부탁하지 않으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부정의 정점을 찍고 있는 건오의 상태가 다봄과 관련된 일일 거라는 짐작과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말 이건 피치 못 할 일이다.

“여기가 어딘데?”

“연다봄 회식 자리에서 취했나 봐. 아버지께 연락 올 수도 있다고 듣긴 했는데, 정말 인사불성 됐단다.”

인사불성이란 말은 없었지만, 하람에겐 만취나 인사불성이나 마찬가지였다.

건오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취했다고? 아버진?”

“진작 집에 가셨지. 나 지금 의뢰인한테 다시 전화 줘야 해. 네가 좀 가 주라.”

그렇게 다봄을 떠넘긴 하람은 잽싸게 사무실로 돌아갔고, 건오는 핸드폰에 도착한 주소를 재차 확인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후는 하람이 최 실장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와 같았다.

건오는 빠르게 뒷정리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주차장으로 와 주소를 찍었는데, 고작 15분 거리가 왜 이렇게 까마득하게 느껴지는지.

다봄을 볼 핑계가 이토록 마음에 안 들긴 처음이었다.

그러나 사실 다봄은 최 실장의 말처럼 그렇게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바람을 쐬면서 더 멀쩡해졌다.

술을 마셨다지만 이곳엔 부장, 팀장을 포함해 그녀보다 어른들뿐이었다. 정신을 놓기가 쉽지 않았다.

“하아.”

잠시 찬바람을 맞으러 나온 다봄은 손을 녹이려 한숨 섞인 입바람을 불었다. 하얀 입김이 그녀의 손 주위로 퍼져 나갔다.

한동안 시간을 때운 다봄이 이만 자리에 돌아가려는 때였다.

“응?”

주점 입구로 익숙한 인영이 걸어 들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봄은 제 착각일 거라 생각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고, 제게 망설임 없이 걸어오는 모양새는 도저히 착각이라 부를 수 없었다.

“누나.”

자신을 저렇게 부르는 이는 세상에 단 한 명이었다.

“많이 취했어요?”

“……너 여기 어떻게 왔어?”

다봄은 몸을 굽혀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건오를 올려다봤다.

그는 그녀의 멍한 눈빛을, 놀랐다기보다는 취해서 그런 거라 여겼다.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네요. 정리하고 와요. 데려다줄 테니까.”

건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입구 쪽으로 돌렸다. 다봄은 고개를 돌려 재차 그를 확인했다.

진짜 건오였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봄은 순간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뭔지 모를 그 감정을 꾹 눌러 삼킨 그녀는 일단 허둥지둥 일행을 찾아갔다.

“저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아, 부대표님. 대표님께서 동생분께 연락드리라고 해서 전화했습니다. 곧 이리 오실 겁니다.”

다봄은 최 실장의 한마디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가 발간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괜한 걱정을 시켰네요. 감사합니다.”

“밖이 추운데 여기서 좀 더 계시다 동생 오시면 나가 보시죠.”

“그렇지 않아도 밖에서 만났어요. 오늘 재밌었습니다. 다음 주에 뵐게요.”

“벌써 오셨군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봄이 코트와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자리는 빠르게 정리했는데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일부러 발끝에 힘을 주고 걸었지만, 다시 건오와 눈이 마주치자 힘이 풀려 버렸다.

“왔어요?”

건오가 그녀를 기다리며 물고 있던 담배를 버렸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비가 쓰레기통으로 처박히는 모습을 본 다봄은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왜 안 펴?”

나 때문이냐는 말을 그렇게 돌려 물었더니 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직시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누나 때문인 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누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 줬으면 싶은 거예요?”

다봄이 입술을 물었다.

“듣고 싶은 대로 말해 줄게요.”

“듣고 싶은 대로?”

할 말을 잃은 그녀는 숨을 내쉬며 망연히 그의 말을 따라 했다.

“그래야 또 나 안 버리지.”

잘도 다봄이 아파할 말을 고른 그의 눈빛이 형형했다. 그녀가 본 적 없는 종류였다. 그 표정은 못되게 비뚤어진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애처롭게 보였다.

다봄의 눈꼬리가 내려가며 울상이 되었다.

“가요.”

그 얼굴을 보고서도 건오는 무심히 제 차를 턱짓했다.

다봄은 그 찰나에도 갈등했다.

건오의 차를 타야 하나, 혼자 가야 하나.

그 속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건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누나.”

건오가 그녀를 힘주어 불렀다.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이 그의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다봄은 그를 마주하길 포기하고 시선을 내리며 그의 차 조수석으로 향했다.

다봄을 따라 운전석에 올라탄 건오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벨트 매요.”

갈 길을 잃은 그의 손이 핸들을 꽉 쥐었다. 다봄이 후다닥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인생에서 건오와의 침묵이 이렇게 불편한 적이 없었다.

다봄은 잠이 오지도 않는데 눈을 감았고, 건오는 전방만 보았다.

다봄의 집까진 빠르게 도착했다. 그녀는 차가 멈추자 알아서 눈을 떴다.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다봄은 준비했던 말을 하며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에서 내렸다.

쿵 닫히는 문에 그녀나 그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마음을 무시하고 몇 걸음 걷던 다봄은 기어이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다음 순간, 눈이 마주친 그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이상해요.”

“……뭐가?”

다봄은 그 물음조차 머뭇거렸는데, 그는 기다린 것처럼 답했다.

“누나 뒷모습은 익숙할 정도로 봤는데, 왜 또 버려진 것 같지.”

이번에도 다봄을 아프게 하려 의도적으로 한 말이라면 성공했다. 꽉 조이는 심장을 느낀 그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언제 집에 들어갔어?”

두 사람은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같은 날을 떠올렸다.

“글쎄요.”

그리고 그 모호한 대답이 다봄의 짐작을 현실로 만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조급하게 말했다.

“오늘은 바로 들어가.”

“그것도, 글쎄요.”

같은 답을 반복하는 그를 나무라기엔 녀석의 표정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장난치지 마.”

“장난이라고 해 줄까요?”

“백건오.”

“또 성 붙여 부르네. 내가 여기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럼 어떻게 마음에 들어?”

다봄이 이마를 찡그리며 반문했다.

그가 머릿속이 어지러운 다봄에게 다가갔다.

“그럼 나 데리고 올라가요.”

“뭐?”

다봄이 황당하게 그를 보았지만, 건오는 뻔뻔히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 전까진 재워 주기도 했잖아요.”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

“나는 다를 게 없는데, 누나는 다른가 봐요.”

매우 달랐다. 그녀가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다봄은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추워요. 들어가요.”

건오의 차 전조등이 반짝이며 문이 잠겼다.

다봄의 시선이 자신을 지나치는 녀석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그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까닥했다.

“안 들어가요?”

그는 다를 게 없다고 말했지만, 지금의 건오도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적어도 다봄이 보기엔 그랬다.

“저 배고파요, 누나.”

그 한마디에 결국 다봄은 머뭇머뭇 그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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