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다봄이 아득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루 동안 벌써 몇 번이나 건오 때문에 놀랐지만, 이번만큼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그녀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한 말을 꾸역꾸역 되새기고 있으니, 건오가 그녀를 붙잡았다.
욱한 마음에 거칠 것 없이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데, 눈앞의 다봄은 또 도망갈 것처럼 보였다.
“집에 가요.”
그녀의 손까지 차가워 건오는 조급해졌다.
“누나 지금 춥잖아요.”
그가 그 말을 하고 나니 다봄은 뒤늦게 추위가 느껴졌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팔뚝을 문지르자 건오는 호텔에 차를 두고 택시를 잡았다.
다봄은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다 택시 뒷문이 열리고서야 천천히 움직였다.
택시가 출발했다.
건오는 내심 안심했다. 그로선 다봄이 혼자 가겠다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아이고, 둘 다 얇게도 입었네. 얼른 집에 가서 몸 녹이셔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건오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택시 기사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한 다봄은 제가 엉뚱한 말을 한 줄도 몰랐다.
“안녕히 가세요.”
잠시 후, 택시에서 내린 그녀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자세, 걸음걸이, 목소리.
겉모습만 보면 다봄은 멀쩡해 보였다. 그녀가 집에 오는 내내 허공만 응시하지 않았더라면 건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게 거리를 유지하며 다봄의 뒤를 따랐다. 한동안 구두 소리만 엉켜 들렸다.
다봄이 그의 존재를 알고는 있는지 염려스러워질 때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
건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섰다.
그녀가 고요히 그를 바라봤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건오의 입이 바싹 말라 갔다.
그들을 감싼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염없이 시선을 마주하던 어느 순간, 돌연 다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널 어떡하지?”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허공으로 전해진 그 말이 건오의 어딘가를 할퀴었다.
오늘 다봄의 기억에 남은 거라곤 오로지 눈앞의 이 남자뿐이었다.
막말하던 지웅도, 초대해 준 일석도, 파트너였던 우섭까지 모두가 희미했다.
머릿속에서 건오의 자리가 커질수록 그녀의 이성이 끊임없이 외쳤다.
이래선 안 된다고, 심장을 두들기며 경고했다.
“백건오.”
그를 부르는 다봄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네 마음 정리하고 찾아와.”
건오의 낯이 허물어지듯 일그러졌다. 그가 어쩌지 못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리하라고요?”
아무리 감정이 요동쳐도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는데, 다봄의 한마디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응. 정리해야지.”
“내가 잘못한 거예요?”
헛웃음을 흘린 건오가 비꼬듯 물었다.
다봄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치켜떴다.
“말해 봐요. 이 감정이 잘못된 거고, 내가 틀린 거라고.”
절대 그렇게 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 건오는 대답을 요구했다. 빈정대는 목소리가 위험했다.
그는 그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평소와 달랐다.
감정을 절제하면서 드러냈고, 말을 고르면서도 거침없었다.
“난 할 말 다 끝났어.”
“난 아니에요.”
“너한테 듣고 싶은 말 없어.”
“아닐 텐데.”
건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 가까워졌다.
다봄의 싸늘한 시선만으로 그는 갉혀 나갔다.
“궁금하잖아요. 제양. 내 친부모.”
건오가 금세 그녀 지척에 섰다.
다봄이 어느 때보다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알리기 싫으니까 말 안 했겠지. 그러니까 듣지 않아도 돼.”
네 얘기에 관심 없다는 작위적인 행동이었다.
지어낸 동작인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를 떨쳐내기 위해 보이는 모습이란 걸 알면서도 건오는 온몸이 경직됐다.
“이만 들어갈게. 춥다.”
20년 동안 숨겨 왔던 마음을 밝힌 대가는 가혹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건오를 뒤로하고, 다봄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면서부터 다리가 후들대고 입술이 파들거렸다.
춥다는 말과 달리 다봄은 집에 와서야 꽁꽁 언 뺨을 실감했다.
“얼른 돌아가, 건오야.”
다봄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건오가 내려다보이지도 않는 테라스 근처를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이제 그에게 잘 들어갔냐는 전화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 애가 닳았다.
녀석이 아직 현관을 서성이고 있을 거란 확신 때문에.
다봄은 당장이라도 도로 내려가 집으로 끌고 오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이미 그녀는 상처를 줬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건오야.”
다봄은 그 말만 반복하며 테라스 곁을 떠나지 못했다.
오늘은 건오의 생일이었다.
* * *
꽃이 움트는 계절, 다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신제품 출시와 함께 프로모션이 시작되었고, 예상했던 부산보다 강주시 제양 백화점 입점이 먼저 추진되면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배로 늘었다.
거기다 오는 4월, 대만 1호점 오픈도 준비해야 했다.
이 와중에 주혁이 드라마 협찬 건에 이견을 내놓았다.
“대표님, 이건 좀…….”
다봄은 대표실에서 한숨을 꾹 참고 덧붙였다.
“그 드라마에서 협찬 제의가 들어왔다지만, 반사이익이 전혀 없습니다.”
주혁은 그쪽에서도 그냥 찔러 본 거 알지 않냐며 자신을 설득하는 딸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 눈빛에도 다봄은 굴하지 않았다.
“보고드린 두 드라마는 보셨어요? 하나는 흰나비 스튜디오에서 제작 중이고, 또 하나는 얼마 전 도연화 출연이 확정됐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그 드라마까지 포함하는 거죠.”
“대표님……?”
주혁이 공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제 다봄은 그에 맞춰 대꾸할 힘이 없었다.
그녀가 피곤함에 절은 몸을 소파에 눕다시피 기댔다. 그러자 기다렸단 듯 주혁의 비서가 대표실 문을 닫고 나갔다.
“통일신라 배경에 커피를 어떻게 광고해요?”
“근데 최소종 나오잖아.”
“최소종이든 최대종이든, 안 돼요.”
둘만 남게 되자 다봄은 단호하게 퇴짜를 놓았다. 그쯤 되자 주혁도 더는 우기지 않고 사무실 블라인드를 내렸다.
“20분 정도 자고 돌아가.”
“……그럼 그동안 올려놓은 것들 다 결재해 주세요.”
“그래.”
다봄은 뜬금없는 주혁의 제안을 넙죽 받아들였다.
다봄이 바쁜 건 주혁이 제일 잘 알았다. 지금이 유난히 일이 많은 시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한계 이상 몰아붙이며 일하는 게 그의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더 할 일이 많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 같아 말리지는 못하지만, 잠시 휴식할 시간 정도는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봄은 정말 딱 20분만 눈을 감았다 떴다.
“건오 얘기 들었지?”
결재를 마친 주혁이 막 핸드폰 알람을 끈 딸에게 물었다.
“어지간히 놀랐을 텐데 이제까지 한마디 안 꺼내네.”
다봄은 건오 얘기가 나오는 순간부터 안절부절못했다. 주혁으로서는 그런 다봄의 반응을 당연히 제양이랑 연결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건오한테 너무 서운해하지 마.”
“아빤 알고 있었어요?”
주혁이 바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말 안 해 주셨어요?”
“건오의 뜻이었고, 나도 막상 말을 꺼내려니 입이 안 떨어지기도 했고.”
친자식에게선 느끼지 못할 감정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애초에 내 자식이 아니지만, 내 자식을 빼앗아가기라도 한 느낌에 가까웠다.
“엄마는 아세요?”
“네가 연광 파티 다녀온 날 말했다. 건오가 거기 갔다는 건 이제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주혁은 건오가 제양 이름으로 연광 자선 파티에 간 것까지 미리 알고 있었다.
건오는 그게 예의라고 생각할 아이니까 다봄으로서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래서 서운해?”
“모르겠어요.”
다봄은 서운했다.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게 한가득한데, 다봄은 바쁘다는 이유로 건오와 가족들까지 피하는 중이었다.
“딸도 나한테 연광 파티에 참석하는 걸 비밀로 했잖아. 비슷한 심정이라고 생각하면 아예 이해 못 할 것도 아닐 텐데?”
다봄은 할 말이 없었다.
경우가 너무 다르지만, 그렇다고 너무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 없는데도 건오는 나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파티에 참석했지만, 딸은 송열 외손자랑 파트너였다는 것까지 지라시로 듣게 한 점이 참 아이러니했지.”
“그건…….”
“내가 불편할 걸 네가 짐작한 거지. 넌 네 방식대로 아빠를 배려했고, 건오는 건오의 방식대로 날 배려했고. 그 차이야.”
배려라고 한 행동이라도, 그 배려가 전부 환영받지는 않는다. 주혁이 다봄의 배려를 달갑잖게 여긴 것처럼 말이다.
“건오랑 서먹해졌어?”
다봄이 눈을 피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에서 대답을 들은 주혁은 혀를 찼다.
“가족 찾은 걸 축하해 주진 못할망정 서먹해지긴 왜 서먹해져? 네 서운함보다 그게 더 우선인데.”
주혁 본인도 형용하지 못할 감정을 느꼈으면서, 딸이 건오를 서먹하게 대했다니 잔소리가 바로 튀어나왔다.
“바쁜 거 끝나면 연락할 거예요.”
“잘도 하겠다. 건오가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다행으로 알아. 엄마도 그렇게 한다니까.”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대표님.”
건오 얘기가 나오고부터 불편함을 내비치던 다봄은 괜히 핸드폰을 확인하며 일어섰다.
마침 액정 위로 깜빡하고 있던 일정이 보였다.
“참, 오늘 회식 오시죠?”
“그거 꼭 가야 하냐?”
“간단히 하고 빠져요.”
“그래야지.”
대표도 귀찮아하는 회식이 누굴 위한 회식인가 싶지만, 다봄은 오늘만큼은 기껍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용한 저녁보단 여러모로 시끄러운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따 뵐게요.”
다봄은 대표실을 나서고 긴 복도를 지나 인조 공원을 가로질렀다.
건너편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그새 올라온 프로모션 중간 보고서가 보였다.
“흐음…….”
다봄이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글자를 보고 있는데 도저히 읽히질 않았다. 머릿속엔 온통 건오 생각뿐이니 내용이 들어올 리 없었다.
주혁이 정곡을 찔러서인지, 오늘따라 녀석의 존재가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회식 장소 공지였다.
그래, 술. 오늘은 술을 마셔야겠다. 술을 마시고 곯아떨어졌다 느지막이 주말 아침을 맞이하는 거다.
머릿속이 소란스러운 다봄은 회사 생활 처음으로 회식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