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19/72)

19.

건오의 눈빛을 미처 보지 못한 다봄은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자리를 피하려 했다.

“저보다 언니 같은데,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하영이 다봄에게 친근하게 접근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홀 안에서처럼 대응하면 되는데, 다봄은 저 말이 뭐 그렇게 어렵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늘봄 얘기 종종 들었어요. 그렇게 큰 사업을 실질적으로 운영하신다고요.”

본인이 당황했음을 자각한 다봄은 한발 늦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무턱대고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평소처럼 대외용 모습으로 대화를 받았다.

“대표님 덕에 여러 기회에 참여해 보고 있어요.”

“와. 아빠인데도 대표님이라 하시는구나.”

“밖에서만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사무적인 다봄과 달리 하영은 퍽 친근하게 굴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하영을 앞에 두고 다봄은 슬쩍 건오를 살폈다. 계속 그녀를 보고 있던 건지 곧장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은 게 많아요. 괜찮으시다면 파티 끝나고 연락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다봄은 먼저 건네어 오는 하영의 명함을 받아들었다.

제양 백화점. 차차 늘봄이 입점할 곳이었다.

다봄도 제 명함을 꺼내자 하영이 덥석 받았다. 다봄이 의례적으로 덧붙였다.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

편하게 연락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봄은 또 건오를 곁눈질하려다 겨우 시선을 고정했다.

“감사합니다. 영광이에요. 아, 경매 끝났나 봐요.”

하영의 말대로 열린 연회장 사이로 어두웠던 조명이 도로 밝아지고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그 가운데 우섭도 있었다.

“다봄 씨.”

그는 다봄을 발견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만 빠져 줘야겠다.

아까부터 건오에게 이상한 배신감이 몰려들던 다봄은 이번에야말로 우섭을 이유 삼아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하영이 그녀를 질문으로 붙잡았다.

“최우섭이랑 오셨어요?”

“네. 아는 사이세요?”

“그냥, 서로 얼굴만 아는 정도예요.”

얼굴만 안다는 것치고 하영은 상당히 적대적으로 우섭을 보았고, 다봄에게 다가오던 우섭도 하영을 보곤 잠시 주춤거렸다.

“여기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최우섭 씨.”

“네, 오랜만이네요, 윤하영 씨.”

우섭과 하영은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로 인사했다. 그게 끝이었다.

“이쪽은…….”

우섭이 하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건오를 보았다.

습관처럼 한 발 나선 다봄은 문득 그의 소개가 제 몫이 아닌 걸 깨닫고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건오는 하영이나 다봄이 나서기 전에 대충 자신을 소개했다.

“백건오입니다. 윤하영과 함께 왔습니다.”

“최우섭입니다.”

우섭도 마찬가지였다. 건오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예의상일 뿐이었다.

그는 제가 낙찰받은 와인을 다봄에게 선물하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봄이 와인을 싫어한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께 선물하는 거라고 말하며 자신의 다정함을 어필할 계획이었다.

“다봄 씨, 함께 바람 좀 쐴까요?”

“네.”

다봄이 우섭의 제안에 덥석 동의했다. 속이 자꾸 널뛰어 건오에게서 떨어지고 싶었다.

그녀가 시끄러운 속을 달래며 하영에게 이만 인사를 건네려는 때였다.

“보기 좋구나.”

“회장님.”

하필 일석이 다가왔다.

“할아버지.”

금세 다봄의 곁에 선 일석은 조용히 그녀 주위를 둘러보다 한곳에 시선을 멈췄다. 그 끝엔 건오가 서 있었다.

일석의 눈길을 알아차린 다봄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하영이 기다린 것처럼 냉큼 나섰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제양 백화점에서 일하는 윤하영입니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조부는 잘 계시고?”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일석은 일단 건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우섭은 일석과 시선이 마주치길 기다리며 괜히 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저보다 하영이 먼저 인사했으니, 이젠 그녀와 함께 온 건오 차례였다.

“회장님, 이쪽은 저와 함께 온…….”

“안녕하십니까.”

이번에도 건오는 하영의 소개가 필요치 않다는 듯, 그녀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석은 건오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이군.”

“네. 좋은 기회로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자네가 윤하영 양과 함께 올 줄은 몰랐어.”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리고 허겁지겁 나타난 태철 또한 건오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태철은 일석과 인사하기 위해 몰린 인사들 사이로 어깨를 치켜올리며 합세했다.

태철이 끼어들자 다봄은 반사적으로 건오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은 마치 작은 몸으로 그를 보호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건오가 그런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 저흰 이만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우섭에게 귓속말하는 지웅을 발견한 다봄이 건오의 손목을 잡았다. 지웅이 속물이라는 단어를 말하던 그 눈빛으로 건오를 보고 있었다.

일석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봄아, 너는 네 짝이랑 있어야지.”

잠시 건오밖에 보이지 않던 다봄에게 일석이 나직이 일렀다.

다봄이 반사적으로 우섭을 보았다.

우섭은 지웅에게 건오의 존재를 들었는지, 얼굴을 찌푸리곤 녀석을 보고 있었다.

“주혁이가 잘 키우긴 했네요. 부모 잃은 애 하나 데려왔다기에 걱정했더니, 벌써 커서 이런 데도 오고.”

태철은 건오의 환경을 입에 올리며 칭찬 아닌 칭찬을 던졌다.

다봄은 태철의 시선에 건오가 어떻게 보일지 가히 짐작이 갔다.

웬 고아 하나가 주혁의 밑에서 크더니 제양 하나 물었다고 여기겠지.

“정말 모자람 없이 키워 주셨죠.”

건오도 그걸 알면서 선뜻 긍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다시 뵙게 된 친부모님께서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

……지금 뭐라고?

다봄은 주춤주춤 물러나 건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제외하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각각의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다봄만 망연하게 그대로 멈춰 섰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남들보다 느리게 이해한 다봄은 그에게 확인을 바랐지만, 건오는 그녀를 마주 보지 않았다.

다봄은 제가 꿈을 꾼 걸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처럼 당황한 연 씨들 틈에서 하영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큰아버지께서 갑자기 젊어지시는 것 같더니, 다 건오 오빠를 찾아서 그런 거더라고요.”

그 짧은 시간에 건오를 둘러싼 분위기를 읽은 하영은 과장해 너스레를 떨었다.

다봄의 눈에는 그 모습이 오히려 가시처럼 느껴졌다.

“큰아버지라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는 이였다.

“네, 우리 사장님이요.”

제양그룹 사장, 윤호섭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것과 생글생글 웃는 하영의 얼굴까지, 모든 게 충격적이었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저마다 말을 옮기며 건오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그 가운데 다봄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우두커니 굳었다.

친부모, 그리고 제양.

그녀에겐 두 단어만 반복되어 들렸다.

“저와 함께 온 백건오 변호사가 사장님 외아들이에요.”

* * *

“다봄 씨, 제가 아까 낙찰받은 와인이 있어요.”

호텔 정문 앞으로 발레파킹 기사가 우섭의 파란 차를 몰고 나타났다. 예정대로라면 다봄은 그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했다.

“또 만나 뵈면 선물하고 싶은데.”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와인을 즐겨 하지 않아서요.”

다봄은 능숙하게 거짓말하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들 앞에 우섭의 차가 멈춰 섰다.

우섭은 다봄을 향해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럼 늘봄 대표님께 드리는 저의 성의라고 여겨 주세요.”

“아빠요? 어, 아니요. 어렵게 낙찰받으셨을 텐데 정말 괜찮아요. 와인은 좋은 분과 함께 나누셨으면 해요.”

우섭이 다봄의 반응을 예상하고 와인을 건네려 했던 것처럼, 다봄도 생각해 둔 거절의 말을 꺼냈다.

좋은 분과 함께하시겠지만, 그게 자신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저는 여기서 따로 들어가 봐야겠네요.”

이건 더 확실한 거절의 뜻.

“……전 다봄 씨와 더 알아가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감사해요. 하지만 우리가 인연은 아닌 것 같네요.”

“그 남자 때문인가요?”

예상에 없던 질문을 들은 다봄은 무심코 눈썹을 모았다.

그녀가 대답 없이 우섭을 응시했다. 건오를 여기서 들먹일 줄이야.

“아직 정식으로 제양 일원이 된 건 아닌 것 같던데.”

“우섭 씨와 할 얘긴 아닌 것 같네요.”

“그 남자 배경이 아니라면 얼굴 때문인가?”

다봄이 건오 때문에 자신을 거절한다고 단정 지은 우섭은 혼잣말하듯 물었다.

그 순간 다봄의 눈엔 우섭과 지웅이 겹쳐 보였다.

“얼굴 빼곤 제가 더 낫지 않나 해서.”

그걸 말이라고.

다봄은 저절로 굳어지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천천히 입꼬리만 올렸다.

“건오가 잘생기긴 했죠.”

비교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머리도 좋고, 인성도 발라요. 요리도 잘하고, 제 부모님에게도 얼마나 사근사근한데요. 착한 일 해도 생색도 안 내고, 힘들어도 티 내지 않고. 또 말도 예쁘게 해요.”

“다봄 씨.”

“그리고 몸도 좋아요.”

이걸로 의미 없는 실랑이가 끝났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낸 그녀가 비장한 눈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걸 직감한 우섭은 다봄을 태우기 위해 열어두었던 조수석 문을 닫고 혼자 운전석에 올랐다.

곧 새파란 차가 연광 호텔을 떠났다. 다봄이 그린 듯한 입꼬리를 내렸다.

그녀는 오래 서 있어 아픈 발을 짧게 내려다보곤 걸음을 옮겼다.

터덜터덜 걷던 느린 발걸음이 더 느려지고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얘기 좀 해요.”

언제부터 있던 건지, 건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 얘기 없어.”

다봄은 호흡을 고르듯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언제 멈췄었냐는 듯 그를 지나가려 했다.

왜 이렇게까지 감정이 상하는지 모르겠지만, 화가 났다.

“내가 있어요.”

“무슨 얘기? 언제 진짜 부모를 찾았는지? 아니면 왜 네가 여기 왔는지? 나 그런 거 안 궁금해.”

“누나.”

“너 때문에!”

건오가 돌처럼 굳었다.

다봄은 채 지나치지 못한 그를 올려보다 그 망연한 눈동자와 마주하고 입술을 꾹 물었다.

“누나.”

다봄이 도망치듯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건오는 거의 넋이 빠진 상태로 그녀 뒤를 쫓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엉켰다. 다봄이 저한테 화를 내는 게 처음이라 침착할 수 없었다.

“누나.”

“…….”

호텔 부지를 빠져나온 그녀 앞에 10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다봄은 차가 쌩쌩 달리는 곳으로 다가가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연다봄!”

그렇게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던 다봄이 단번에 그를 응시했다.

잔뜩 놀란 눈이 쉴 새 없이 깜빡거렸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름 좀 부른 게 그렇게 큰일이에요?”

건오의 대꾸가 다봄에게 충격을 더했다.

무려 20년이었다. 그는 그 20년 동안 다봄에게 누나라는 호칭 외엔 어떤 호칭도 쓰지 않았다.

“나 때문에.”

건오는 멍하니 선 다봄과의 거리를 작정하고 좁혔다.

“그다음,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에 건오의 눈빛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감춰지길 반복했다.

그의 코앞에서 다봄의 어깨가 오르내렸다.

“내가 할 얘기 없댔잖아.”

너 때문에 내 감정이 엉망진창이야.

“선 넘지 마.”

제발 그렇게 보지 마.

다봄은 하고 싶은 말을 꾸역꾸역 삼키고 앞뒤 없이 말했다.

금방이라도 녀석의 시선에 모른 척 휩쓸릴 것 같은 스스로가 불안했다.

“선?”

그녀의 번잡한 마음을 알 리 없는 건오는 그녀의 말을 되짚더니 비죽 웃었다.

전혀 웃기지 않다는 얼굴로, 위험하게.

“그 소리는 내가 키스라도 했을 때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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