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18/72)

18.

다음 날, 다봄은 예약해 둔 숍에서 화장과 머리를 고치고 화이트 투피스 슈트를 갖춰 입었다. 그러고 나니 오후 6시였다.

-도착했어요.

“나갈게요.”

숍에서 나서니 새파란 컨버터블에서 그녀처럼 하얀 슈트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전날 전화 통화만 한 사이지만, 마주하자마자 서로를 바로 알아보았다.

“다봄 씨?”

“네, 반가워요. 연다봄이에요.”

“반갑습니다. 최우섭입니다.”

다봄이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우섭도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보란 듯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출발할까요?”

“좋아요.”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고, 다봄이 올라탔다.

그녀가 치장을 마친 숍에서 자선 파티가 열리는 연광 호텔까지의 거리가 멀진 않았다.

하지만 평일 퇴근 시간이 그들을 도로 위에 잡아 두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있는 동안 불편하지 않게 지내 봐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기 직전, 우섭이 살갑게 말을 건넸다. 이번에도 다봄은 살짝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서요.”

“알죠.”

“네?”

“연 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고, 무엇보다 제가 다봄 씨를 처음 보니까요.”

우섭이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그가 이제껏 많은 모임에 참석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제가 연지웅이랑 종종 만나기도 하고요.”

“아…….”

갑자기 사촌 이름을 듣게 된 다봄이 살짝 미간을 모았다.

연태철은 종종 보면서도 그의 아들은 본 지 꽤 오래되었다.

“저는 사촌과도 교류를 안 해서요.”

“그래서 더 궁금했어요. 연승훈 선수와 다르게 다봄 씨는 존재만 알려져 있을 뿐 얼굴도 몰랐잖아요?”

하다못해 하람도 일월 법률 사무소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얼굴이 떴다.

“오빠랑 안 닮았죠?”

다봄은 이런 관심을 받을 때마다 집중을 환기하는 질문을 꺼냈다.

그 이후로는 우섭과 시시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짧은 거리를 30분에 걸쳐 달린 우섭의 차가 연광 호텔 앞에 들어섰다.

연광그룹의 자랑인 이곳은 정재계 인사들의 결혼식 단골 장소이자, 비공개로 국빈을 모시는가 하면, 대선 땐 두 층을 전부 비워 놓고 선거인단들의 전략실로 쓰이기도 하는, 명실상부 국내 최고 호텔이었다.

다봄은 3년 전 하객으로 초대된 후, 두 번째 방문이었다.

“이왕 온 거 재밌게 놀다 가요.”

발레파킹을 맡긴 우섭이 조수석 문을 열며 손을 내밀었다.

다봄이 그의 손을 맞잡고 차에서 내렸다.

“감사해요.”

와인 경매 형식으로 진행되는 자선 파티는 기업인뿐만 아니라 정치인, 연예인, 법조인, 교수 등 다양한 인사들이 초대되었다.

그 가운데 송열그룹 외손자와 함께 들어선 여자는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마실래요?”

우섭이 지나다니는 웨이터들에게서 샴페인 잔을 받아 왔다.

지금쯤이면 인사를 나누기 위해 홀을 한 바퀴 돌았어야 했지만, 다봄이 이 자리에 적응할 때까지 잠시 기다릴 셈이었다.

“다들 다봄 씨가 누군지 궁금한가 봐요.”

“꼭 사교계라도 데뷔한 것 같네요.”

“그러니까 앞으론 종종 얼굴 비쳐요.”

우섭은 은근하게 제안했으나, 다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면서 다양한 시선을 받아 봤지만, 학창 시절 이후 이렇게 노골적인 시선은 오랜만이었다.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왔냐.”

“그래.”

우섭이 다봄 옆에만 가만히 있으니, 우섭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릴 때부터 부모들의 교류에 함께 만남을 이어 온 또래 무리였다.

“다봄 씨, 여기는 제가 아까 잠깐 말씀드렸던 녀석들인데…….”

“오랜만이네, 다봄아.”

“네. 오랜만이네요.”

무리 중 가운데 선 남자가 우섭의 소개를 끊고 다봄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모부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봤으니, 벌써 8년이 흘렀다.

“작은아버지는 잘 계시고?”

“그럼요. 큰어머니도 건강하시죠?”

“그렇지 뭐.”

연태철의 큰아들, 연지웅과 안부를 묻고 나서야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연광그룹의 ‘그’ 손녀.

우섭이 어디서 연예인이라도 만나 같이 온 건가 싶었던 이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다봄이도 결혼할 때가 되긴 했구나. 안 하던 짓도 하는 걸 보면.”

그리고 다봄의 눈빛도 바뀌었다.

“야, 지웅아.”

“그렇잖아. 집안에 도움도 안 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보다야 낫긴 한데,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싶어서.”

“얘가 오늘 좀 기분 상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다봄 씨가 이해하세요. 아, 전 김해성이라고 합니다. 라온 제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 겪는 상황에 주변을 탐색하듯 조심스럽던 다봄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비우고 지나가던 웨이터의 쟁반에 내려놓았다.

“늘봄에서 일하는 연다봄입니다.”

다봄은 길게 지웅을 응시하던 눈길을 돌려 해성과 마주했다. 입꼬리를 살포시 올리곤 살짝 고개를 까딱이는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그린 듯 우아했다. 지웅의 곱지 않은 시야 안에서 그녀는 여유롭게 사람들과 눈을 맞췄다.

이곳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의 핏줄들이 모여 있었다.

“저 얼마 전에 늘봄 소식 봤어요. 연승훈 선수를 모델로 쓴다고. 부러워요. 가족이 스타라.”

해성과 함께 온 여자가 다봄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그래서 그녀도 적당히 대화를 나누던 때였다.

“할아버지께 눈도장만 찍고 들어가.”

지웅이 다봄 곁에서 목소리를 깔고 일렀다.

그녀는 한 번 곁눈질해 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다봄이 무시하자 지웅은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여기서 정말 남자 하나 잡아챌 생각이야?”

지웅의 신경질에 일행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다봄은 어정쩡하게 서 있던 우섭을 그 무리에 떠넘기고 지웅을 흘깃 보았다.

“확실히 그럴 목적이면 이곳보다 더 나은 장소는 없겠네요.”

지웅과 나란히 선 다봄이 조곤조곤 속삭이자, 그가 다봄을 흘겨보며 경고했다.

“집안 망신시키지 마.”

“왜요? 이 집안, 이런 조건 좋아하잖아요.”

“교양 같은 건 갖추지도 못했구나.”

“교양이요?”

다봄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아, 죄송해요. 방금 건 좀 실례긴 했네요.”

다봄이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지웅이 으르렁거리듯 이를 갈았다.

“이런 곳에서 만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란다. 할아버지를 내세워 여기 사람들한테 접근하지도 말고.”

“제가 저 사람과 함께 온 게 무척 아니꼬웠나 봐요.”

다봄이 다시 제게 걸어오는 우섭을 발견하고 턱짓했다.

“최우섭 씨, 이번에 송열 전자로 발령 났다죠?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하네요.”

“속물 짓도 유전이니?”

그 대단한 연씨 일가에서 선하를 지칭하는 표현을 지웅이 입에 올린 순간, 여유로웠던 다봄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우섭이 살벌한 다봄의 표정을 보고 지웅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 미친!”

다봄의 스틸레토힐이 지웅의 구두코를 꾹 밟았고, 지웅이 욕설을 내뱉었다.

“조용히 해요. 교양 없게.”

우섭이 듣든 말든, 다봄은 아이라도 타이르는 것처럼 지웅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때를 맞춘 것처럼 곳곳의 조명이 은은하게 바뀌고, 상단에 빛이 집중됐다.

모두 그곳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 끝나고 보자.”

지웅이 이를 갈며 뱉은 말에 다봄이 코웃음을 쳤다.

동시에 행사가 진행됐다.

여느 파티와 다르지 않았다. 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박수가 터져 나왔고, 태철이 상단으로 올라섰다.

“연광 자선 파티는 불우 이웃을 도와 사회 통합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아주 작은 마음으로 첫발을 디딘 게 엊그제 같은데 여러 귀빈의 도움을 받아 벌써 15회를 맞이했습니다. 큰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태철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박수가 한 번 더 터졌다.

그 소리가 끝날 때쯤 다시 상체를 세운 태철은 환영사를 마저 이어 갔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허락해 주신 연일석 회장님께도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상단 바로 앞줄에 있던 일석이 자리에서 일어서 뒤로 돌았다.

그의 묵례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한차례 지나간 뒤, 경매사가 단상에 섰다.

이때만을 기다린 다봄이 우섭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

“경매는 참여 안 하세요?”

“네. 와인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한 다봄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녀는 홀을 빠져나가자마자 깊게 숨을 들이켰다.

선하의 욕을 듣자마자 눈물이 핑 돌 만큼 욱했다. 마음 같아선 발이 아니라 거기라도 차 주고 싶었는데, 무릎조차 올리지 못했다.

다봄이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는데, 하필 지금 선하에게 전화가 왔다.

괜히 자신 때문에 엄마가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아 다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안 받아요?”

그 순간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박혔다. 다봄은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다.

“누나.”

느리게 뒤돌아선 다봄의 고개가 올라갔다.

“건오……?”

“어머니 전화잖아요.”

정말 건오였다.

“왜 혼자 이러고 있어요?”

그건 다봄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다봄은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여전히 연광 호텔 3층이었고, 홀 안에선 연광 그룹이 주최한 자선 파티가 이어지고 있었다.

“너야말로 여기 무슨 일이야?”

“자선 파티라길래 왔어요.”

그러고 보니 건오는 우섭이나 지웅이 입고 있던 슈트와 비슷한 차림을 한 채였다.

눈앞에 나타난 건오 덕에 다봄은 선하 일을 잠시 잊고 혼란해졌다.

“너, 여기, 초대장, 그러니까 어떤 경로로 온 거야?”

“제양그룹이요.”

제양?

설마하니 그에게서 들을 줄 몰랐던 이름이었다.

다봄은 일단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혼자?”

“아뇨.”

“오빠! 원하던 거 낙찰받았어요! 겨우 얻었네.”

건오의 답을 부연하듯 홀에서 나타난 여자가 개운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봄이 아니라 건오에게 걸어왔다.

“어? 함께 계신 분이 있었네요. 전 윤하영이에요. 저희 오빠랑 아는 사이신가 봐요.”

윤 씨.

제양그룹 회장 윤재규, 제양그룹 사장 윤호섭.

건오가 함께 온, 초대장을 쥔 제양그룹 사람이 눈앞의 이 여자였다.

다봄은 얼떨떨한 표정 그대로 그녀와 마주 인사했다.

“연다봄이에요.”

저희 오빠……? 오빠…….

“아하. 늘봄 그분이시구나.”

하영이 그녀를 아는 체하는 와중에도 다봄은 그녀가 건오를 부른 호칭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네, 건오 친구 누나예요.”

다봄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건오와의 관계를 그렇게 소개했다.

단숨에 건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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