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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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다봄은 뒷좌석에 놓인 건오의 생일선물을 보며 한숨 쉬었다.

그날 이후, 틈만 나면 멍해지거나 한숨을 쉬는 다봄 때문에 직원들까지 은근히 그녀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그녀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부대표님, 어디쯤이세요?

“주차장이에요. 들어갈게요.”

이만 선물에서 눈을 뗀 다봄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기와가 장식된 한식집 앞에서 숨을 고른 그녀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예약자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연다봄입니다.”

다봄은 직원의 안내를 따라 식당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도착한 해수가 다봄을 맞이했다.

“부대표님, 저 너무 떨려요.”

해수의 솔직한 말에 다봄은 옅게 웃었다.

지금껏 다양한 거래처와 식사를 하고 기업들과 미팅을 해 왔지만, 제양그룹과의 미팅은 다봄도 처음이었다.

연광그룹 못지않은 명성과 지위를 가진 제양은 자체 커피 브랜드는 없지만, 그들과 제휴한 커피 프랜차이즈 전문점만 세 곳이었다.

그 와중에 연광그룹의 막내아들이 창업한 늘봄은 제양에게 있어서 협력할 회사가 아닌, 라이벌로서 예의주시하는 회사였다.

다봄은 공연히 물을 마시며 긴장을 눌렀다.

그녀가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창호지가 붙여진 미닫이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일어서서 상대를 마주한 다봄은 빠르게 명함을 내밀었다.

“처음 뵙네요. 늘봄 부대표 연다봄입니다.”

“홍보팀, 차해수입니다.”

반사적으로 차례대로 인사한 다봄과 해수는 사실 무척 당황한 상태였다.

믿기 힘들지만, 아무리 봐도 눈앞에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반갑습니다. 제양그룹 윤호섭입니다.”

그는 본인을 구체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차기 제양그룹을 이끌어갈 가장 유력한 이이자, 제양그룹 창업주의 장남 윤호섭이었다.

“여기서 사장님을 만나 뵐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지라, 다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운을 띄웠다. 밖에 세워 둔 이를 제외하면 호섭은 이곳에 같이 온 사람도 없었다.

“늘봄에서도 두 번째 가는 분이 나온다고 하셔서 제가 왔습니다.”

그 말에 아찔해졌지만 다봄은 일단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의 명함을 이리저리 보던 호섭이 눈을 돌려 다봄을 지그시 보았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가 호섭을 바라보았다.

“어떤 음식을 좋아합니까? 마음껏 주문하시죠.”

“다 잘 먹습니다. 저희는 사장님께서 고르시는 게 편합니다.”

“그럼 골고루 먹어 봅시다.”

호쾌하게 대꾸한 호섭은 메뉴판을 가져가 정말 다양한 음식을 주문했다. 널따란 식탁에 차려진 음식의 양이 어마어마해 살짝 압도될 정도였다.

다봄은 지갑 내 법인카드의 존재를 되새기며 숟가락을 들었다.

“갑자기 보자 해서 놀랐겠습니다.”

“그렇긴 한데, 동시에 반가웠습니다. 제양이란 그룹이 무척 궁금했거든요.”

“저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늘봄의 젊은 부대표가.”

호섭이 말하는 다봄에 대한 궁금증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늘 들어 왔던 다봄은 그의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소문이라는 게 어떻게 났을지 몰라 조금 무섭네요.”

“능력이 특출 나다던데요. 걱정 마세요. 다 좋은 말들뿐입니다.”

“다행이에요. 저희 아버지께서 설렁설렁 일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다 보니 항상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어서요.”

근래만 빼면.

다봄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기다렸다. 호섭이 늘봄을 만나길 바란 이유.

다봄은 여기서 늘봄이 가장 원하는 것을 챙길 생각이었다.

어색함을 억지로 풀려 하지 않는 식사가 이어졌다. 중간중간 대화가 끊겼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다봄은 호섭의 눈치를 보다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호섭이 반응했다.

“좀 더 먹지 않고.”

“이것저것 챙겨 주셔서 많이 먹었습니다.”

정말이었다. 호섭은 다봄과 해수에게서 좀 멀다 싶은 음식들을 접시에 덜어 앞에 놓아 주었고, 그럴 때마다 그들은 몸 둘 바 몰랐다.

“그래요. 이것저것 먹여야 일도 하니까.”

호섭은 입술을 달싹거리는 다봄을 관찰했다.

‘우리 부부 대신 우리 아들을 키워 준 아이.’

호섭에게 다봄은, 그들이 건오에게 못다 준 사랑을 대신 준 이였다.

“얼마 전 중국에 이어 대만 진출도 했다죠.”

다봄은 말문을 연 호섭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인자한 듯 날카로운 호섭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늘봄의 미래 가치를 고려해 봤습니다.”

호섭은 진중한 태도의 다봄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순간, 다봄이 움찔했다.

언론에서 많이 봐서인지, 어쩐지 낯설지 않다 싶던 얼굴에 묘한 익숙함이 얹어졌다.

“내달 부산 제양 백화점을 시작으로 전국의 제양 백화점에 입점하는 것, 어떠십니까?”

하지만 너무나 파격적인 호섭의 말에 다봄은 기시감을 잊어버렸다.

호섭이 제안한 것은 그녀가 제안하려던 것과 규모가 다른 사업이었다.

“……저희로선 너무나 감사한 제안입니다.”

“그건 시작입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진산에 제양 건설 사옥 하나를 새로 짓고 있습니다. 또 내후년 쇼핑센터도 오픈이 예정돼 있죠. 그곳들 입점도 고려해 보셨으면 합니다.”

다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옆에서 조용히 장단을 맞춰 주던 해수도 말문이 막혔다.

호섭은 그들의 당황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 역시 늘봄과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될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늘봄의 가치가 얼마인들, 제양이 알 바가 아니었다.

이미 제양이 운영하는 몇몇 곳에 입점한 늘봄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고부터 달라졌다.

사실 진작 달라졌어야 했다.

“이제껏 맺지 못했던 연을 천천히 이어가 봅시다.”

* * *

건오가 핸드폰을 엎었다. 둔탁한 소리가 나자 회의하던 소수의 인원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의뢰인과는 이번 주 내로 약속 잡는 걸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건오의 맞은편에 앉은 하람은 원래 그럴 예정이었던 것처럼 회의를 끝냈다.

그 말만을 기다린 것처럼 직원 둘이 사무실을 나섰다.

“네가 사기당한 거 아니면 얼굴 좀 풀지?”

“당했어.”

“뭐라고?”

건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영이랑 같이 다녀와야겠어.

짧은 메시지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지난 설, 스치듯 얼굴 한 번 보았던 사촌 동생이란 사람과 함께 연광 자선 경매 파티에 참석하라는 말이었다.

이런 모임이 익숙한 누군가가 따라붙어야 그들도 안심한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알면서도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건 없이 보내 줄 줄 알았더니.”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내일 약속 있어.”

“알아. 3시부터 자리에 없을 거라고 말했잖아. 그건 또 무슨 일인데?”

하람이 회의 자료를 챙기며 던지듯 물었다. 건오 역시 관자놀이에서 손을 내리고 정해진 일정을 훑었다.

“그날.”

“그날?”

하람이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건오가 마주 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연광 자선 파티.”

“……미친놈.”

하람의 표정과 말이 제대로 일치했다. 그는 정말 미친놈을 보듯 건오를 보았다.

“네가 왜 굳이 부탁해 가며 거길 가? 연다봄이 정말 송열 외손자랑 결혼이라도 할까 봐 그래?”

송열그룹에 이어 결혼이란 단어가 이어지자 건오가 천천히 친구를 응시했다.

절로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시선이었지만, 하람은 개의치 않았다.

“너 거기 가면 연다봄한테 제양 숨긴 거 다 들통나. 그건 알지?”

“어.”

“네가 그거 들키면 나까지 연다봄한테 욕먹는 것도 알고 있지?”

“어.”

그것까진 건오가 알 바 아니었다. 정작 따지듯이 물어본 하람도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연다봄 때문에 너답지 않은 짓 좀 그만해.”

다리를 꼰 하람이 이마를 문질렀다.

지금 건오는 본인의 울타리를 넘어 다른 세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재벌 친부모와 상봉하고도 그 일가에 전혀 관심 없던 녀석이, 제 존재를 알리며 연광 자선 파티 초대장 따위를 받아냈다.

연다봄 때문에.

“어차피 연다봄한테 뭣도 못 할 거면서, 괜히 걔 세상에 휩쓸리지 말라고.”

하람은 복잡한 눈과 달리 명확하게 말했다.

그의 무례하고도 직설적인 걱정에도 건오는 반박하지 않았다. 20년을 뭣도 못 했던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제 다봄이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걸 하람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건오는 하람이 자신의 친구인 동시에 다봄의 남동생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

“휩쓸리면 어때.”

“뭐? 야, 연다봄은 네 인생 책임 안 져.”

“책임이라니.”

어느새 회의 자료를 챙겨 일어선 건오가 하람을 내려다보며 건조하게 웃었다.

“내가 누나한테 책임을 바란다면 너무 양심 없지.”

그녀로 인해 인생이 뒤바뀐 건오는 감히 그런 무거운 단어를 다봄에게 갖다 댈 수 없었다. 하람도 그걸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구치소 면회 다녀오고 바로 퇴근한다. 집에서 보자.”

건오가 먼저 자릴 벗어났다.

간단히 가방을 챙겨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탄 그는 느릿하게 넥타이를 조여 맸다.

하람이 모르는 게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제 누나가 결혼 시장에서 얼마만큼의 가치가 매겨지고 있는지 관심 없었으니, 당연히 알 턱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보였다.

성장하는 커피 프랜차이즈 회사의 차기 대표이자 연광그룹의 손녀.

이제 막 서른한 살이 된, 나무랄 곳 없는 외적 조건까지 갖춘 다봄이 그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 어떤 계산이 오갈지 눈에 빤했다.

주혁이 연광과 연을 끊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다봄은 비슷한 조건과 배경을 갖춘 또래와 어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젠장.”

주차장을 빠져나간 건오가 차창을 열었다.

내일 송열그룹 놈 옆에 있을 다봄을 상상하니 벌써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차를 달리며 바람을 쐬어도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신호마저 자꾸 걸려 좀처럼 미간이 펴지지 않던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모르는 번호라면 으레 그렇듯 업무일 것이라 여긴 건오가 딱딱하게 통화를 연결했다.

“백건오입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블루투스로 연결된 차 스피커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기억하시죠? 윤하영이에요. 그쪽 사촌 동생인데.

건오가 파란불로 바뀐 신호를 확인하고 액셀을 밟았다.

사촌 동생이라는, 놀라울 정도로 낯선 단어만 빼면 그에겐 업무로 분류할 만한 통화였다.

-왜 말이 없어요? 저 기억 못 해요? 할아버지 댁에서 잠깐 봤는데.

“기억합니다.”

그의 짧은 대답을 들은 하영은 들으란 듯 한숨을 내쉬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일 드레스 코드 알려 주려고요. 명색이 파트너인데, 저랑 맞춰 입으셔야죠.

다봄도 이런 통화를 하는 걸까.

건오는 목적지에 다다라서도 끝나지 않는 통화를 들으며 다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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