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16/72)

16.

다봄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하람이 있잖아요.”

“하람인 하루 더 자고 간대.”

“그럼 내일 가져가면 되지.”

다봄이 에둘러 거절했지만 선하는 그저 귀찮은 것이라 해석했다.

“내일은 설날이 아니잖아.”

“당일 아니면 어때서. 엄마가 전에 준 반찬도 많이 남았을걸요. 맞지, 연하람?”

“걔가 요즘 밥을 대충 먹어.”

그 한마디에 다봄이 졌다. 유난스럽게 걱정하는 선하 옆에서 다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건오에 대한 유난이라면 선하 만만치 않은 다봄이 침묵하고만 있으니, 설거지를 끝내고 나오던 하람이 그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백건오가 연다봄 말은 잘 듣잖아.”

“이래도 내일 간다는 소리 할 거야?”

선하는 하람이 나온 주방으로 들어가 벌써부터 건오 몫을 싸기 시작했다.

다봄도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엄마, 너무 무겁게 싸 주지 마요. 나 못 들어.”

“건오한테 전화해 봐. 맞춰서 가면 되지.”

“연하람, 네가 해.”

“네가 가니까 네가 해.”

오늘따라 하람이 다봄의 신경을 긁었다.

그날 놀이터에서 싸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다봄은 핸드폰을 들었다.

어차피 마주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통화 정도야.

‘내가 널 불편해했으면 좋겠어?’

……안 되겠다.

“오빠, 나 지금 배터리가 없어.”

다봄이 우두커니 TV만 보던 승훈을 돌아보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다봄의 환한 액정을 이미 봐 버린 후였다. 그럼에도 한마디 묻지 않고 핸드폰을 들었다.

“건오야. 이따 연다봄이 반찬 가지고 간대. 7시쯤이면 도착할 것 같은데.”

다봄은 시간을 말한 적 없지만, 건오와 통화하는 승훈을 막지 않았다.

‘그러다 직접 받으라고 하면 어떻게 해.’

“그래. 수고해.”

짧은 통화를 끝낸 승훈이 다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몇 시간 후, 다봄은 선하의 명절 음식을 싣고 건오의 집에 도착했다.

오늘도 지상 주차장에 주차한 그녀는 룸미러를 들여다보며 표정을 점검했다.

이미 7시는 지나갔다. 이만 저것들을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시간임을 알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아 괜히 거울만 보았다.

그때 아파트 밖으로 나오는 건오를 발견했다.

“흡.”

다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그녀의 차를 찾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다봄은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데, 건오는 다봄의 차를 발견하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성큼 다가왔다.

이윽고 건오가 지척에 섰다.

“누나, 안 내려요?”

다봄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척하려고 했던 건 그녀인데, 건오야말로 정말 태연해 보였다.

“으응, 내려.”

다봄은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에서 선하가 싸 준 반찬이 든 가방을 꺼냈다.

건오가 가방을 받아 들자 손이 빈 다봄이 조수석에 놓아 둔 그의 선물을 곁눈질했다.

여기까지 와 놓고 준비한 선물을 안 주는 것도 이상했다.

그녀가 건오에게 줄 쇼핑백을 가지러 가려 다시 차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그냥 가는 거예요?”

건오가 그녀를 붙잡았다. 다봄이 멈춰 서서 그를 올려다봤다.

“아냐, 너랑 저녁 먹고 갈 거야.”

이번엔 그녀가 생각해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어깨를 으쓱이기까지 하던 다봄은 도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내 눈을 보네요.”

건오는 다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고작 그것뿐인데 그의 가슴이 꽉 막혔다.

“올라가요.”

“응.”

다봄은 쇼핑백을 두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살금살금 걷는 모양이 긴장한 그녀의 상태를 드러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 현관에 들어서고, 저녁을 차릴 때까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다봄은 몇 번이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분위기가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네, 어머니.”

어느새 차려진 식사를 사이에 두고 숟가락을 들던 때였다. 마침 선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이제 같이 먹어요.”

전화를 받은 건오는 멈칫하는 다봄을 보며 선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다봄은 그가 통화하는 동안 먼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시간 내서 찾아뵐게요. 네. 잘 먹겠습니다.”

이내 전화를 끊은 건오도 식사를 시작했다.

다봄은 그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뿐인데, 지금만큼은 웬만한 거래처 사람들과 하는 식사보다 힘든 느낌이었다.

“점심은 뭐 먹었어?”

“떡국이요.”

점심을 건너뛴 건오는 아침으로 먹은 메뉴를 대신 말했다.

제양그룹 회장, 윤재규를 중심으로 모인 가족 모임에서도 설엔 어김없이 떡국을 먹었다.

“그래도 챙겨 먹었네.”

다봄은 다행이라는 듯 눈꼬리를 접었다.

이 기묘한 분위기에서도 어쩔 수 없이 안도가 되었다.

“명절인데 어머니랑 더 있지 않고 왜 일찍 왔어요?”

건오는 제 식사 여부 따위에 웃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일찍 온 게 아니라 원래 그러려고 했어. 엄마는 바쁜 거 끝나면 또 찾아뵈려고.”

‘사실이니까 변명처럼 들리진 않겠지.’

금세 눈웃음을 지운 다봄은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눈을 굴렸다.

“전 누나 못 보나 싶어 아쉬웠는데.”

“아.”

“결과적으로 둘만 있게 됐으니 저로선 잘됐네요.”

건오가 낮게 덧붙인 말에 다봄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행동이고 말이고 점점 뻣뻣해지고 있던 다봄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밥 먹어.”

건오에게 대수롭지 않은 듯 툭 던지긴 했지만, 그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운 다봄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어영부영 식사를 마친 뒤 식탁을 치우고 나니 집에 가는 일만 남았다.

다봄은 차 키를 들었고, 건오는 캡슐커피를 꺼냈다.

“그럼 쉬어, 건오야.”

“커피 마시고 가요.”

“이제 가 봐야지.”

건오는 대꾸하지 않고 벽시계를 응시했다. 여덟 시였다.

다봄은 자정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서둘렀고, 건오는 집었던 캡슐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럼 데려다줄게요.”

“괜찮아. 너 일했잖아.”

다봄의 반복된 거절에 건오가 싱크대에 기대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부러 그를 보지 못한 척 외투를 마저 챙기곤 중문을 향해 길게 난 복도를 걸었다.

금세 현관에 다다른 다봄은 신발까지 신고서야 그녀를 따라온 건오를 마주했다.

“갈게.”

“엘리베이터 불러야죠.”

그런데 건오도 운동화를 신었다.

그가 신발을 신고 허리를 펴자 그녀가 건오의 얼굴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다봄이 물었다.

“내가 따라오지 말라면 안 따라올 거야?”

건오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누나 혼자 보내는 건 그날이 마지막이에요.”

언제라고는 굳이 얘기할 필요 없었다.

다봄이 지한과 술을 마시고 왔던 날, 다봄이 밀어낸 그날에도 건오는 그녀를 혼자 보낸 게 무척 신경 쓰였다.

어쩌면 서지한과 술을 마셨단 사실보다 더 불편했던 것 같다.

“가요.”

건오가 현관문을 열자 찬 공기가 침범했다. 정신을 차린 다봄이 막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집까지 가겠다는 건 아니지?”

“가겠다는 건데.”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애도 아니고.”

다봄이 정면만 응시하며 거절했다. 건오는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나도 애 아닌데 누나가 끼니 챙겨 주잖아요.”

“그건…….”

반박할 말이 없는 다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그녀의 차 앞에 섰다.

다봄은 운전석으로 가는 건오를 보며 이마를 일그러트렸다.

“너 어떻게 돌아오려고 그래?”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 대학생 때부터 운전했어.”

“누나 운전 잘하는 거 알아요. 근데 난 나 보러 온 누나를 데려다주는 거예요. 배웅이요.”

다봄은 짐짓 당황했다.

그녀는 건오의 고집이 익숙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이제까지 다봄은 건오가 하는 양을 그러려니 하며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도 없었다.

“몰라. 마음대로 해.”

다봄은 과장된 몸짓으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을 차지한 건오는 지체하지 않고 시동을 걸어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다봄이 침묵하자 차 안에 정적이 깔렸다.

“화났어요?”

그녀를 곁눈질하던 건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심코 그의 옆모습을 보던 다봄이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 같은 건 나지 않았다. 화날 일도 아니었다.

“누나.”

건오가 재촉하듯 그녀를 불렀다. 다봄이 대답하지 않자 막연히 조급해진 탓이었다.

“화는 무슨.”

다봄의 목소리는 다소 시큰둥하게 나왔다.

“아니야.”

그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그녀는 한 번 더 부정했다.

빨간불에 차를 멈춘 건오가 아예 그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다봄은 제게 눈길이 닿아 오는 걸 알면서도 시선을 사선으로 두고 모른 척했다.

건오는 그 행동마저 애가 탔다.

“나 지금 최대한 평소처럼 대하려고 하고 있어요.”

“거짓말.”

다봄이 즉각 반박했다. 건오가 눈꺼풀만 깜빡였다.

그는 뒤에서 울린 클랙슨에 일단 차를 출발시켰지만, 다봄의 대꾸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뜻이에요?”

건오가 다봄의 아파트에 주차를 마치자마자 질문했다.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다봄의 어조에는 투박한 날이 서 있었다.

“네가 여기까지 오는 게 평소처럼 대하는 거야?”

“벌써 잊은 거 아니죠? 나 누나 공항까지 데리러 갔었어요.”

잊을 리 없다. 그녀는 건오더러 왜 데려다주냐고 투덜거리고 있지만, 원래 그는 공항까지 다봄을 데리러 오는 남자였다.

“전엔 이렇게 거절하지 않았잖아요.”

건오는 억울해졌다.

자신을 평소처럼 대하지 않는 건 그녀였다.

그날 나눈 대화가 아니었다면 오늘도 다봄은 그저 유난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제가 그의 끼니에 예민한 것처럼. 건오도 그런 것뿐이라고 말이다.

“나 누나 거절에는 면역 없어요.”

그가 표정 변화 없이 힘주어 말했다.

그 한마디에 어색하기 짝이 없던 다봄의 기세가 단숨에 사라졌다.

“그러니까 항상 그랬던 대로 거절하지 마요.”

건오가 명령하듯 애원하자 다봄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완연했다.

서둘러 차에서 내린 그녀는 저를 따라 내린 건오를 올려다봤다.

“네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싫어요?”

“…….”

다봄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휙 돌렸다.

건오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도 다봄의 입이 꾹 다물려 있자, 그는 그녀에게 어떤 말이라도 듣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뒤돌아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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