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15/72)

15.

건오는 꽉 잡고 싶은 손에서 겨우 힘을 뺐다.

그사이 다봄은 얼른 손을 가져갔다.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야.”

“궁금하면 물어봐요. 다 얘기해 줄게.”

“궁금한 거 없어. 궁금해하지도 않을 거야.”

그녀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오기와 두려움이 동시에 찼다.

그런 다봄의 눈빛을 마주한 건오도 오기와 두려움이 함께 솟았다.

“무서워요? 누나가 무슨 말을 했을지?”

지금 그의 감정은 모두 다봄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때 상황을 묻어 두려는 다봄이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서.

“무섭다니. 내가?”

“그게 아니면, 내 마음이 무서운 건가?”

시치미를 떼려던 다봄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심정이 가득 담긴 낯빛을 숨길 겨를이 없었다.

다봄은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자신이 이 대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라고.

“차 키 줘.”

한참 만에야 그녀가 꾹 눌린 음성으로 요구했다.

이번엔 건오도 말없이 다봄의 차 키를 제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

“건오야.”

다봄이 건오의 손에서 차 키를 가져갔다. 그녀답지 않게 손길이 매서웠다.

“내가 널 불편해했으면 좋겠어?”

건오의 미간이 바짝 모였다. 제게 향하는 다봄의 날 선 말에는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들어가. 다신 이런 장난 치지 말고.”

막연한 상상보다 훨씬 아팠다.

고백했다 차인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차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봄은 들어가라 했지만 건오는 정신이 아득해져 걸음을 뗄 생각도 못 했다. 자신의 눈을 일부러 피하는 다봄을 보니 이렇게 막막할 수가 없었다.

“백건오.”

때마침 다봄과 닮은 친구가 건오에게 걸어왔다.

부산에서 돌아온 하람은 그들의 근처까지 걸어와선 다봄과 건오를 번갈아 보았다.

“둘이 싸웠어?”

“싸우긴.”

다봄이 즉시 부정했지만, 하람은 믿지 못했다. 그들 사이엔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건오랑 같이 들어가서 쉬어.”

“넌?”

“나도 집에 가야지.”

두 사람을 흘깃거리던 하람이 말을 잇지 못하는 건오를 툭 쳤다.

“야, 가자.”

이윽고 건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고개를 든 다봄과 다시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그를 외면했다.

건오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착각이 들었다.

“네, 역문 아파트요.”

그녀는 대리를 부른다는 핑계로 그가 돌아갈 때도 바라보지 않았다.

* * *

다봄은 고된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뒤에도 잠들지 못했다.

어떻게 잠들 수 있을까.

자신의 잘못을 건오에게 넘긴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고, 그에게 화를 낸 자신에게 화가 났고, 그를 외면해 미안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보다 무서움이 가장 컸다.

건오의 말이 맞다. 그녀는 그가 뱉을 말이 두려웠다.

“아닐 거야. 아니야.”

다봄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건오의 태도는 한결같은데, 다 내가 미쳐서 지레 도망치는 거다.

“그런데 건오, 저녁은 먹었나?”

다봄은 이래저래 계속되는 건오의 걱정을 누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 *

거의 반쯤 감긴 눈으로 출근한 다봄은 오전에만 아메리카노를 두 잔 마셨다.

주혁에게 어제 촬영에 대해 보고하고, 최종으로 올라온 신제품 이름을 결재했다.

오후엔 홍보에 대한 회의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점심 먹어야지.”

“아빠 드시고 오세요. 전 쪽잠 좀 자려고요.”

9층 본인 사무실 조명을 끈 다봄이 하품까지 했다.

사무실 앞에 선 주혁이 인상을 썼다.

“조금이라도 먹고 들어와. 뭐라도 먹어야지.”

부모에게 자식이 굶고 일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게 설령 상사라도 마찬가지였다.

“승훈이랑 진서가 요 앞까지 왔대. 너 먹고 싶은 만큼만 먹고 들어와.”

“언니가?”

주혁은 끝까지 망설이던 딸을 결국 식사 자리에 끌어와 앉혔다.

그러나 그곳에 앉은 다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와, 금세 다 오셨네요. 당분간 못 뵐 것 같아서 이렇게 모셨어요.”

“또 훈련 가니?”

“네. 이번에 외국은 아니고 지방…….”

국가대표 양궁 코치인 진서는 선수들 훈련으로 자주 출장을 갔다.

그때마다 오늘처럼 식사하자 식구들을 모으진 않았다.

자리를 비울 동안 가족 행사가 있다면 미리 챙기는 식인지라, 가끔 있는 일이었다.

“곧 설이기도 하고 건오도 생일이잖아요. 그때 축하 못 해 줄 것 같아서 겸사겸사요.”

다봄이 빈자리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근데 정작 주인공이 안 왔네요.”

* * *

“더 먹지 않고.”

“괜찮습니다.”

그 시각, 건오도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에게 이것저것 내미는 중년의 여성과, 그런 두 사람을 보는 중년 남성의 얼굴엔 초조함과 흐뭇함이 동시에 엿보였다.

“다 먹었습니다.”

단호히 말하는 건오의 그릇엔 다 먹었다기엔 많은 양의 음식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중년의 부부는 더 권하는 것을 그쯤에서 포기했다.

“이렇게 종종 찾아와. 엄마가 네 소식 많이 궁금했어.”

“곧 명절인데, 그때 집에 한 번 들르는 게 어떠냐.”

건오의 생모와 생부는 곧 돌아올 설 명절을 언급했다.

그들과 만난 지 3년에 가까워지지만, 특별한 관계의 진척 없이 어영부영 세월이 흘렀다.

그건 건오의 선택이었다.

달라지는 건 없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못 박았던 장성한 아들은 그래도 가끔 못 이긴 척 얼굴을 비추곤 했다.

“네, 알겠습니다.”

호섭과 미경, 제양그룹의 일원인 동시에 잃어버렸던 아들을 겨우 찾은 이 부부는 그가 이렇게 곧장 긍정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거절당할 걸 알면서 제안했던 윤호섭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 옆에 앉은 미경은 이미 활짝 웃고 있었다.

“주소는 엄마가 문자로 보내 줄게. 그날 먹고 싶은 건 없니?”

“따로 없습니다. 다만.”

건오는 그들과는 사뭇 다른 온도로 마저 말을 이었다.

“회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아버님을?”

올라간 미경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건오는 건조하게 그들을 훑던 눈을 돌렸다.

“말씀드렸듯 경영엔 관심 없습니다.”

다소 직설적이었지만, 그래서 호섭은 안심했다.

제양그룹의 창립자인 윤재규는 슬하에 두 딸과 두 아들을 두었는데, 가족 경영이 3대째 이어지며 제양의 지분을 둘러싸고 소리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호섭과 미경은 다시 찾은 아들을 그 싸움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거냐?”

“별건 아니고, 연광 자선 파티에 참석하고 싶어 그럽니다.”

건오는 다시 시선을 들었다.

별것 아니라는 말과 달리, 건오의 뜻은 대수로웠다.

매년 열리는 연광의 자선 파티는 비밀스러웠다. 초대되는 이들의 조건 기준이 높다 보니 필연적으로 그렇게 굳어졌다.

“고작 변호사론 안 되더라고요.”

건오가 겨우 서른의 나이로 쌓아 온 모든 커리어는 연광 앞에서 ‘고작’이었다.

연광의 손녀인 다봄은 그 파티에서 그녀의 세계와 어울리는 이들과 만날 것이다.

“지분 따윈 필요 없지만, 제양의 이름이 필요합니다.”

처음 보는 아들의 눈빛에 부부는 침묵했다.

욕심.

건오의 눈에 형형한 욕심이 어른거렸다.

만약 그것만 보았더라면 호섭은 건오를 재규 앞에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건오의 밑에 깔린 간절함까지 엿보고 말았다.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 * *

“건오는 따로 일 있다고 연락 왔더라.”

다봄은 현관에서 멈춰 섰다.

선하의 말을 이해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봄이 가장 늦게 왔을 줄 알았던 본가엔 진서와 건오가 없었다.

“내일이 설날인데?”

“그래. 무슨 놈의 일을 그렇게 하는지. 생일도 같이 챙겨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선하는 속상하다는 듯 토로했다. 이로써 정말 건오가 오지 않는단 사실이 확실해졌다.

다봄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놓지 않고 그대로 차고로 내려갔다.

곧 건오의 생일이었다. 다봄이 차에 도로 옮겨 놓은 쇼핑백 안엔 그의 선물이 들어 있었다.

“연다봄.”

막 차 문을 닫는데 승훈이 그녀를 불렀다.

지방에 간 진서와 통화를 하고 들어가려던 그가 늦은 밤 도착한 동생을 발견한 참이다.

다봄이 몸을 돌렸다.

“몇 신데 지금 와?”

“요즘 바쁠 때라 일이 늦게 끝났어.”

“아버진 한참 전에 와 계셨는데?”

“그거야 아빠니까. 오빠의 광고주님이잖아.”

다봄이 싱겁게 웃었다. 건오가 오지 못했단 소리를 들은 후 심란했던 마음이 대번에 감춰졌다.

“건오도 바쁘다던데.”

“그러게.”

짧게 동조한 다봄은 팔뚝을 쓸었다. 아직 추운 겨울이었다.

“들어가자.”

건오의 이야기를 이어 하려던 승훈은 다봄의 행동을 보곤 일단 들어가자며 현관을 턱짓했다.

가족들은 다들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뒤였다. 늦게 도착한 다봄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아파트 놀이터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마지막으로 다봄은 건오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본가에 온 다봄의 기세가 무색해졌다.

‘알겠지만, 내가 그날 일이 있어서 미리 주는 거야. 생일 축하해.’

다봄은 준비했던 말을 입에서 굴리며 상상했던 건오의 반응을 떠올렸다.

분명 다봄처럼 아무 일 없던 척 대했을 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라 식구들이 많은 집에서 챙겨 주려 했던 속셈도 있었다.

“수임도 줄인다며, 무슨 일이 얼마나 바쁜 거야.”

명절에 쉬지 못할 만큼 바쁘다는 일도, 끼니를 대충 생각하는 습관까지도 걱정하느라 다봄은 자신이 투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건오가 자신을 피하려는 의도인 건가 싶어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걱정으로 덮었다.

* * *

다음 날.

“건오 그렇게 바빠?”

다봄은 설거지하는 하람의 뒤로 가 슬쩍 물었다.

하람은 수상하게 속삭이는 누나를 힐긋 보았다.

“응. 겁나 바빠.”

동생은 대충 대답했고, 누나는 내심 안심했다. 건오가 자신을 피한 게 아니라 정말 바쁘단 사실에.

물론 건오를 향한 걱정은 여전했다.

“건오 일 좀 줄이라고 해.”

하람이 흐르는 물을 잠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헹군 그릇의 물기를 툭툭 털고 다봄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정략결혼 같은 거 할 생각이야?”

“뭐?”

“정략결혼.”

다봄은 거실에 모인 가족들을 확인했다.

연년생 남매의 대화보단 TV에 집중하고 있던 가족들은 하람의 황당한 질문을 듣지 못했다.

다봄은 다시 동생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너 심심해?”

“연광 자선 파티 간다며.”

하람이 자선 파티를 입에 올린 순간, 다봄이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표정과 어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백건오가 그러던데.”

“응, 가.”

“아버지도 아셔?”

하람도 거실 쪽을 확인했다. 주혁은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봄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이야?”

“별생각 없어. 그냥 다녀오는 거야.”

안일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적어도 하람이 듣기엔 그랬다.

“거기 모인 작자들도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돈 좀 내고 나올 생각이니까 오버하지 마.”

“할아버지부터 의도를 가지고 널 불렀는데 뭘 네가 그렇다면 그래?”

하람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다봄이 주혁을 곁눈질했다. 곧장 눈이 마주쳤다.

남매가 하는 얘긴 들리지 않았지만, 서로 대치하는 기세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다들 그쪽을 보고 있었다.

“밥 잘 먹여놨더니 왜 싸워? 봄이 네가 시비 걸었지?”

“아냐. 왜 나만 갖고 그래요?”

“딱 봐도 동생 설거지하는데 얼쩡거린 모양이고만.”

다봄은 부러 입술을 내밀고 하람을 지나쳐 엄마에게로 향했다.

다들 그녀만 잡는 게 억울했지만, 어쨌든 하람의 이상한 질문에선 도망칠 수 있었다.

“귤 좀 먹어.”

선하는 제 곁에 온 딸에게 귤 하나를 까 건넸다.

말없이 귤을 받아먹는 다봄의 머릿속엔 정략결혼 따위가 아니라 건오로 꽉 찼다.

“이따 갈 때 건오 음식 좀 챙겨 가.”

건오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선하가 건오 얘길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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