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개방된 곳에서 지한이 다짜고짜 물었다.
이미 많은 곳에서 지한을 모른 척한 그녀는 그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자 주변부터 살폈다.
다봄만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다들 그들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운 것처럼 느껴졌다.
“왜. 별로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다봄이 한발 물러서자 지한이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네. 이제껏 찍었던 어느 촬영보다 열심히 웃고 있거든.”
“고마워. 참, 점심도 잘 먹었어.”
지한은 다봄의 뻣뻣한 반응이 주변 상황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에게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럼 남은 촬영도 잘 부탁해.”
다봄은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화를 마무리를 짓곤 자리를 떴다.
승훈이 아직 지한의 매니저에게 붙잡힌 채였지만, 그녀는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다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공개된 곳에서 지한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 * *
촬영이 끝났다. 한시라도 일찍 퇴근하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 옆에서 다봄은 지금껏 찍은 사진을 마지막으로 검토했다.
승훈이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컷 하나만 해도 다양했다.
셔츠만 입은 사진, 앞치마까지 두른 사진, 소매를 반만 접어 올린 사진, 팔뚝이 조금 더 드러난 사진, 고개 각도 등등.
공통점이라면 전부 표정에 웃음기가 없었다.
반면 지한은 신제품 딸기라테를 들고 환하게 웃거나, 어디 앉아 음료를 마시는 장면이 많았다. 누가 봐도 다정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기도 했다.
“어떠세요? 저희가 구상한 컨셉이랑 딱 맞죠?”
팀원 중 한 명이 만족스러움을 가득 담아 물었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그 정도로 늘봄과 잘 어울렸다.
쌉쌀한 에스프레소와 머리를 포마드로 넘긴 승훈, 분홍빛 라테와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지한의 모습은 늘봄이 그리던 그림 그 자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여기저기서 우렁찬 인사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 카메라로 컷 몇 장을 찍은 다봄도 슬슬 자리를 정리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그녀가 인사를 반복하며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건물 앞에서 다봄은 옷을 갈아입는 승훈을 기다렸다.
“다봄아.”
“오빠.”
하지만 기다리던 승훈보다 지한이 먼저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괜찮아. 다들 집에 가느라 바빠.”
“오빠도 가야지.”
“선배 기다려?”
“응.”
“같이 저녁 먹을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다봄은 눈을 굴리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대답을 눈치챈 지한은 눈썹 끝을 내리며 초조하게 보탰다.
“나랑 밥 먹자.”
하필 호수 앞 레스토랑에서 기회를 달라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봄은 도저히 거절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뭐 해?”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승훈이 구석에 있는 두 사람을 용케 발견하고 다가왔다.
지한은 기다렸다는 듯 승훈에게도 똑같이 제안했다.
“선배, 같이 저녁 드시는 거 어떠세요?”
“난 진서가 기다려서. 먹으려면 너희들끼리 먹어.”
구원자가 왔나 했더니 도루묵이었다.
다봄이 괜히 콧잔등을 매만지는데, 승훈이 뜬금없는 소릴 했다.
“근데 서지한이랑 밥 먹을 거면 네 차 키 주고 가.”
그녀는 동생의 곤란함은 안중에도 없는 친오빠를 흘겨보았다.
“차 키는 왜?”
“네 차에 아이스박스 있다며. 최대 시간이 48시간이라고 어머니가 잔소리하시던데.”
“맞다, 엄마 반찬!”
선하에게 미안하게도, 다봄은 그녀의 반찬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허겁지겁 차 키를 꺼냈다. 문제는, 키는 있는데 차가 없었다.
“근데 오빠, 내 차 지금…….”
“알아. 건오네 주차했다며.”
승훈이 여상히 답하며 다봄의 손에서 자동차 키를 가져갔다.
지한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겠어?”
귀찮다는 듯 대꾸한 승훈은 동생에게서 지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새 애써 표정을 관리한 지한이 다봄에게 제안했다.
“잘됐네. 선배랑 따로 가면 내 차 타고 나가자.”
“여기서? 그건 좀,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다봄이 눈을 굴리며 망설이자,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승훈이 보란 듯이 시간을 확인했다.
“건오네 갈 거면 같이 가고.”
“건오 퇴근했대?”
“응.”
다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금은 건오도, 지한도 불편하기만 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다봄이 지한을 곁눈질했다.
“오빠 먼저 가. 진서 언니도 기다리니까. 내 차 키는 건오한테 맡겨 줘.”
의외의 선택에 승훈이 눈썹을 살짝 모았다. 바라는 답은 아니었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비켰다.
둘만 남은 지한과 다봄이 마주 보았다.
“내가 밥 살게.”
“내가 먹자고 했지만 남을 거라곤 기대도 안 했는데.”
“앞으로도 기대는 하지 마. 지금은 내가 오빠 이용하는 거니까.”
차갑게 말해 놓고 다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그를 대하는 게 적응되지 않았다.
적응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 * *
승훈이 건오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댔다.
“오셨어요, 형.”
건오는 승훈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면서도, 시선으로는 차 안을 빠르게 살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도 기다리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누나는요?”
“이젠 대놓고 연다봄만 찾아?”
승훈이 어이가 없어 묻는데 건오는 그저 빤히 승훈을 직시했다.
승훈은 주머니에서 다봄의 차 키를 꺼내 문을 열고 트렁크를 열었다.
“걔랑 밥 먹으러 갔어.”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러니까 다봄은 승훈에게 차 키만 맡기고 지한과 저녁을 먹으러 갔단 말이다.
“자.”
빠르게 아이스박스를 옮긴 승훈은 다봄의 차 키를 내어주었다.
건오가 그 작은 물건을 꽉 쥐었다.
“촬영은 어떠셨어요?”
“그냥그냥. 아버지 맘에 차실진 모르겠다.”
“누나 반응은 어때요?”
“별말 없는 거 보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던데.”
승훈은 뜻을 알 수 없던 다봄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녀와 일을 해 본 적 없는 그는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눈빛을 읽지 못했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을 텐데 물어보네.”
“아뇨, 궁금해요.”
“서지한 사진을 보는 연다봄 모습이?”
승훈이 직설적으로 물었고, 건오는 입을 다물었다. 당황이 아니라 긍정을 표하는 침묵이었다.
“연다봄 만나면 직접 물어봐.”
“그걸 물어보면 누나가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요.”
“오늘 걔 상태 보니까 이미 네가 그렇게 만든 줄 알았는데.”
건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다.
승훈은 녀석을 단 한마디로 떠보곤 운전석 문을 열었다.
“어떤 상태였는지까진 묻지 마라. 더 관여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 * *
다봄과 지한은 이자카야의 프라이빗 룸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곁들였다.
매일 주요리가 바뀌는 이 집은 그들이 연애할 적 자주 오던 식당이기도 했다.
콜록.
술잔을 들이켠 다봄이 마른기침을 했다.
혹여나 할 말이 없으면 마시려고 사케를 주문했던 건데, 지난밤 와인의 여파인지 알코올 냄새를 맡자 속이 좋지 않았다.
“술 안 받으면 마시지 마.”
“응, 그래야겠다.”
“예전이랑 똑같이 시켰는데, 분위기는 딴판이다. 그렇지?”
다봄은 할 말이 없어 괜히 문어 무침으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녀가 답하지 않자 대화가 끊길까 염려된 지한은 다봄에게 질문을 던졌다.
“잠 못 잤어?”
“티 나?”
“아니. 컨디션이 안 좋은 거 같아서.”
“아, 어제도 술 좀 마셔서 그런가 봐.”
“회식한 거야?”
“그런 건 아니고, 건오랑 마셨어.”
다봄은 승훈에겐 말하지 않았던 건오의 존재를 지한에게 말했다.
전이라면 무심코 언급하고 지나갔을 건오의 존재를, 그녀가 의도를 가지고 입에 올렸다.
그런 다봄의 태도에 지한은 동요했다.
“하람이도?”
“하람인 재판 때문에 부산 가 있었고.”
이 말을 할 땐 다봄도 조금 긴장했다. 어제 일이 스쳐 지나갔다.
“식사하고 건오네 가서 차도 가져와야 해. 오늘 건오가 태워다 줬거든.”
“봄아.”
“응.”
“백건오로 날 밀어내려고 하지 마. 나랑 다시 만날 생각 없다고 말한 거 잊지 않았어.”
지한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속이 탔다. 그곳에 사케를 들이켜니 더욱 새카맣게 타는 듯했다.
반면 다봄은 뺨이 달아올랐다. 그의 지적을 듣고 나니 자신이 무심코 한 짓이 건오를 남자로 봤단 반증처럼 느껴졌다.
“봄아.”
붉어진 얼굴이 느껴진 다봄은 서둘러 사케를 따라 마셨다.
자신이 지금 더운 이유는 술 때문이라 여기고 싶었다.
“그만 마셔.”
“괜찮아.”
“음료수 시키자.”
“괜찮다니까.”
호출 벨을 누르려던 지한이 손을 멈추고 다봄을 돌아봤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다 또 한 잔을 더 비웠다.
“오빠를 이런 식으로 대해야 하는 상황이 싫어.”
다봄은 잠시만 이렇게 지내 달라는 지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경각심은 갖고 있었다. 그와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니 그녀는 선을 그어야 했다.
“봄이 네가 대하고 싶은 대로 대해.”
“내가 대하고 싶은 대로 대하다가 둘 다 상처 입어.”
“네 행동 가지고 오해 안 해.”
지한이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다봄의 눈매가 축 처지는 걸 보며 그가 덧붙였다.
“받아주지 않을 거면 밀어내라, 아니면 다정히 말해 달라, 짝사랑 주제에 그런 거창한 거 바라지 않아.”
“오빠.”
“이대로 지내다가 흔들리면 돌아와 달라고 부탁한 건 나야. 네가 나 때문에 말투를 바꾸거나 행동을 바꿀 필요 없어. 설령 그게 훗날 차일 내 모습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바라지 않아.”
지한은 정말 싫다는 듯 인상을 썼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래.’
막막한 다봄의 생각을 아는 것처럼 지한은 마저 말을 이었다.
“네가 진짜 흔들린다면, 난 그깟 말투나 행동이 아니라 눈빛으로 알아차릴 거야.”
“……그게 가능해?”
“가능해. 그러니까 내가 오해할 걸 걱정해서 계산하며 대하지 말아 줘.”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건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본능이었고, 직감이었다.
하지만 백건오는 흔들리는 다봄의 눈빛을 읽지 못할 것이다. 이제껏 연다봄이 백건오를 남자로 본 일이 없으니.
그 사실이 그에겐 천운이었다.
* * *
그러나 지한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깟 눈빛 같은 거 받아 본 적 없어도, 한 여자만 20년을 사랑한 남자의 동물적인 감각은 다른 이들보다 뛰어났다.
“누나.”
“응, 건오야.”
다만, 하도 동생으로만 취급받아 온 세월이 긴 탓에 더럭 겁을 먹었을 뿐이다.
“술 마셨어요?”
그 두려움만 걷어 내면 그의 눈에도 금세 보일 터다.
그녀가 저를 보는 시선이 전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응. 조금.”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던 다봄이 뒤로 물러섰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피곤하지? 오늘 고마워. 차 키 주고 얼른 들어가 봐.”
“만나자마자 가라네.”
표정이 굳은 건오가 옆 그네에 앉자, 다봄이 발을 구르며 살짝살짝 그네를 탔다.
“너 바쁜 거 아니까 그렇지.”
“이 정도는 괜찮아요. 참, 촬영은 어땠어요?”
“촬영?”
다봄은 기억을 되짚어 봤다. 특별할 게 없었다.
“무난했어. 다들 제 역할을 잘 소화해 줘서.”
“결과는 마음에 들어요?”
“최종본이 나와 봐야 알겠지만 마음에 들어. 오빠가 되게 잘하더라고.”
다봄은 승훈을 떠올리며 킥킥 웃었다.
하도 무뚝뚝한 얼굴이라 누구도 몰랐지만, 그녀는 승훈이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서지한도요?”
건오는 의외의 질문을 계속했다.
이번엔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응. 지한 오빠도 잘 찍어 줬어.”
당연한 사실을 답하는데, 다봄은 마음이 불편해 목덜미를 쓸었다.
건오가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해서 그런 건지, 조금 전까지 지한 앞에서 그를 들먹이다 와서 그런 건진 모르겠다.
“건오야, 나 이만 가 볼게.”
다봄이 구르던 발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그가 그녀의 하얀 손에 시선을 두었다.
“술 마셨는데 운전하려고요?”
“대리 부르면 돼.”
“데려다줄게요.”
“그럼 넌 뭐 타고 가려고? 괜찮아.”
다봄은 내민 손을 살짝 더 들이밀어 키를 달라 재촉했다.
건오는 가만히 눈을 들어 다시 그녀를 보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걱정되잖아요.”
그가 다봄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녀가 원하는 차 키 대신 남자의 큼지막한 손이 다봄의 손을 감쌌다.
“잠깐만.”
다봄이 그와 연결된 손을 보며 당황하던 찰나, 건오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이거 놓고, 들어가.”
건오와 아무렇지 않게 팔짱도 끼고, 아무렇지 않게 손이며 팔뚝이며 잡던 다봄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가늘어졌다.
“어젯밤, 기억했나 봐요.”
그는 확신했고, 다봄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