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모른다니까. 아무튼 미안해.”
긍정과 다름없는 대답이었다.
술이 확 깬 건오가 다봄을 향해 몸을 낮췄다.
“사과는 됐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요?”
몸을 돌려 누운 다봄이 하람의 이불을 어깨높이보다 더 올려 덮었다.
대답하지 않으려 자는 척할 의도였지만, 술이 거나하게 취한 그녀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순식간에 색색 내쉬는 작은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건오만 애가 탔다.
그녀가 깰까, 다시 부르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바라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건오가 다봄을 보며 씩 웃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의식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다봄이 신경 쓰일 만큼 선정적인 꿈을 꾸었다면 환영이었다.
“잘 자요.”
키스보다 더한 걸 꾸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 * *
다봄이 번뜩 눈을 떴다.
낯선 풍경에 놀라길 잠시, 하람의 방이란 걸 기억해 내곤 안도하며 머리를 붙잡았다. 숙취 때문에 두통이 심했다.
“아으으.”
그녀는 침대 아래로 발을 디디다가 어지러움에 살짝 휘청거렸다.
“다섯 시 반이네.”
오늘은 승훈과 지한의 지면 광고 촬영 날이었다. 두 사람은 아마 곧 촬영에 들어갈 터였다.
“어, 건오야.”
방을 나온 다봄은 꼭두새벽부터 커피를 마시던 건오와 마주쳤다.
“잘 잤어요?”
다봄의 찡그린 표정을 보고 그가 숙취해소제와 인사를 함께 건넸다.
다봄은 하루의 시작이 여러모로 어이가 없었다.
“내가 너희 집에서 이걸 마시고 있을 줄이야.”
“좀 더 자다 가요.”
“아냐. 너랑 밥 먹고 슬슬 준비해야지. 넌 잘 잤어?”
“모처럼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다봄이 힘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주방엔 없는 것 같아 거실을 둘러보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건오야, 근데…… 아.”
다봄이 건오를 돌아보기 전, 소파 구석에서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새벽부터 촬영 현장에 가서 상황을 컨트롤하기로 한 해수의 메시지였다.
하려던 말을 잊고 핸드폰을 확인한 다봄은 곧 난감해진 얼굴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부대표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제가 깨운 건 아니죠?
“아이가 아프면 누구라도 깨워야죠. 지금 현장이에요?”
-네, 지금은 아이 아빠가 병원에 있어요.
다봄이 시계와 건오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고민은 짧았다.
“제가 8시까지 갈게요. 남편분과 교대하고 오늘은 쉬어요.”
예상보다 출근을 일찍 하게 된 다봄은 마음이 급해졌다.
집에 가서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그 와중에 건오와 밥을 먹는 일도 그녀에겐 중요했다.
“건오야, 집에 좀 다녀올 테니까 너도 준비할래?”
“누나 지금 술도 다 안 깼는데 운전하려고요?”
“술은 다 깼어.”
“숙취 운전도 위험해요.”
그는 단호히 말하더니 바로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일단 다봄도 대충 짐을 정리했다.
“가요. 제가 데려다줄 테니까.”
“어딜?”
“누나 집이랑 촬영장이요.”
“너 거기가 어딘지 알고 그래?”
“지금은 그게 어디든 누나가 운전하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그는 다봄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상태를 파악했다.
술이 깼는지는 모르겠지만, 숙취로 인한 괴로움과 급한 마음이 더해진 다봄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와 해장을 하고 집에도 들른 뒤 스튜디오로 향하는 중이었다.
전부 건오의 차로 말이다.
“건오야,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스튜디오에 가까워지자 다봄이 넌지시 물었다.
출근길 도로 위로 슬슬 정체가 시작됐다. 곧 건오 혼자 꽉꽉 막힌 도로 위에 있을 예정이었다.
“뭐든 갖게 해 줄 거예요?”
“능력껏, 최선을 다해 볼게.”
그는 장난스러웠지만, 다봄은 무척 진지했다.
차창으로 침범한 아침 햇살 탓에 눈가를 찌푸리고 있던 건오가 낮게 웃었다.
“내가 뭘 갖고 싶어 할 줄 알고.”
그가 핸들을 돌려 스튜디오 지상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이미 건물 앞은 여러 차량과 수많은 사람으로 정신없었다.
저 중 서지한도 있겠지.
“말했잖아. 능력껏이라니까. 웬만한 건 가능할걸?”
다봄이 가방을 챙겨 들며 머리카락을 올려 묶었다.
그 사이 건오는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까지 열어 주었다.
“그럼 일단 누나가 잊은 지난밤부터 기억해 내요. 누나의 최선은 그 후에 말해 보자고요.”
건오가 그녀 위에서 나긋이 말했다. 다봄이 퍼뜩 고개를 치켜올렸다.
“너 내가 필름 끊긴 건 어떻게 알았어?”
“전부 기억하고 있으면 누나가 제 차만큼은 절대 안 탔을 테니까.”
다봄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차에서 내렸다.
그의 대답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낀 그녀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내가 내 발로 방에 들어갔니?”
“그것도 기억이 안 나요?”
그녀의 필름이 끊긴 걸 예상하곤 있었지만, 그것도 기억나지 않을 줄은 몰랐던 건오는 어이가 없었다.
기가 막혀 하던 그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부대표님.”
“아, 해수 씨. 저 왔으니까 얼른 가 보세요.”
“죄송해요. 지금 촬영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어요. 그런데 여건상 몇몇 신을 바꿔야 할 것 같다고 해서 급하게…….”
건오에게 미안하단 눈짓을 보낸 다봄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그는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
다봄 앞에서 짓던 황당한 표정은 어디 가고, 그의 입가엔 어느새 옅은 미소가 걸쳐졌다.
“어, 연하람.”
건오가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운전석에 올랐다. 동시에 그는 근처에 주차된 승훈의 차를 확인했다.
오늘 건오에겐 다봄을 만날 핑계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 * *
“좋아요! 로고가 좀 더 보이게, 아주 좋아요!”
쉴 새 없이 터지는 셔터 소리와 감독의 외침, 직원들의 호응이 섞여 들렸다.
다봄은 그 소음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았다.
아까까진 다들 그녀의 자리를 마련해 준 덕에 감독 옆에서 모니터를 보긴 했지만, 차마 더 지켜보긴 힘들었다.
친오빠의 연기를 직관하는 건 상당히 고역이었다.
“이야, 연 선수, 누가 보면 모델인 줄 알겠어요.”
‘으윽.’
다봄은 아직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더 뒤쪽으로 물러섰다.
사실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는 건 비단 승훈만이 아니었다.
다봄은 기억해 버렸다.
‘의식하고 있잖아요, 저를.’
제가 제 발로 들어가지 않았단 사실은 녀석에게 묻자마자 스스로 깨달았다.
차라리 네발로 기어들어 갈 것이지.
“미치겠다, 진짜.”
거기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잔소리에, 뜬금없이 건넨 사과까진 기억하는데…… 정작 사과를 건넨 이유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 버리겠네.”
끙끙 앓느라 높게 묶었던 머리가 흐트러졌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다시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올리던 와중이었다.
“연다봄.”
“실례합니다.”
잠시 쉬었다 가는 동안 승훈과 광고 회사 직원이 동시에 그녀를 찾아왔다.
“아.”
그들에게 연달아 불린 다봄은 문득 외마디 탄성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가 한데 묶이지 못하고 등 뒤로 떨어졌다.
“너 왜 그래?”
“왜 그러세요, 부대표님?”
다봄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가락을 번갈아 보다 경악했다.
지난밤, 흘러내린 이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던 건오의 손길을, 제가 붙잡은 녀석의 손을, 기억하고 말았다.
기어코 떠올려 버렸다.
잠시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다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승훈을 두고 직원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이어질 콘셉트를 거듭 확인한 뒤 직원이 자리를 떠나자, 다봄이 제 뒤에 선 승훈을 돌아보았다.
“술은 깼어?”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
“뭐라도 먹고 온 거냐?”
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본인 질문만 했고, 다봄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볼 때 멀쩡하다 못해 완벽한 상태인 그녀지만, 승훈에겐 빈틈만 보였다.
“숙취해소제도 먹고, 아침도 먹었어.”
그녀는 오늘만큼은 건오의 존재를 감췄다.
이미 다봄과 함께한 이를 알고 있는 승훈은 구태여 그 존재를 묻지 않았다. 대신 건오를 숨기는 다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오빠 오늘 꼭 연예인 같네.”
“누구 덕에.”
다봄은 승훈의 시선에 지레 찔려 말을 돌렸고, 그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빈말은 아닌 게, 현재 승훈은 정말 연예인 같았다.
“진서 언니가 보면 좋아하겠다.”
“광고주 생각은 어때?”
승훈이 눈썹을 까딱이며 다봄을 가리켰다.
건오를 떠올리게 하는 저 버릇은 건오가 승훈에게서 배운 습관 중 하나였다.
“진짜 광고주님께 여쭤볼게.”
“실세는 너잖아.”
“내가 실세였으면.”
다봄이 눈앞의 승훈과 개인 촬영이 진행 중인 지한 쪽을 번갈아 눈짓했다.
“둘 다 여기 없었겠지.”
팔짱을 낀 그녀가 무척이나 아쉽다는 투로 속삭이니 승훈이 헛웃음을 흘렸다.
“까분다.”
“어? 헤어 쌤이 오빠 찾는 거 같은데?”
건방진 동생은 오빠의 등을 떠밀기도 했다. 마침 헤어디자이너가 꼬리빗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촬영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파이팅, 오빠. 계약금 받은 만큼만 해 줘. 알지?”
해맑게 웃으며 은근히 승훈을 놀린 다봄은 그가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미소도 함께 감췄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묶으려다 주저앉았다.
건오에게 건오를 의식하는 걸 들켜 버렸다.
그녀가 그를 의식한다는 건 다봄에게 무척 큰일이었다.
‘그런데 걔는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
다봄은 술에 취한 자신이 무슨 말을 더 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부대표님, 잠시 이것 좀 봐 보실래요?”
“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매우 바빴다. 건오 생각만 하기에는 책임질 일이 많기도 했다.
하지만 그 틈으로 건오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건 이전과는 확실히, 그리고 너무나 다른 점이기도 했다.
* * *
“잘못 온 거 아니야?”
“잘만 먹어 놓고서 이러네.”
“오빠가 팬들이 어딨어?”
촬영장에 있는 모두가 승훈과 지한의 팬들이 보내 준 밥차와 커피차로 점심을 먹은 후였다.
숙취가 사라진 다봄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켜며 재잘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온 거 같아.”
“시끄러워.”
다봄은 이 상황이 꽤 재밌었다.
그녀도 전성기 시절 승훈의 인기를 익히 알았지만, 정작 승훈은 그 시절 얘기를 상당히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그의 과거는 동생들의 흔치 않은 놀릴 거리가 되었다.
스태프들도 남매의 대화를 웃으며 엿듣고 있던 와중이었다.
“선배가 수영 금메달 최다 기록 보유자잖아. 저보다 2개 더 많으셨던가요?”
지한이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그렇죠. 연승훈 선수가 서 선수보다 원조 수영 스타기도 하고요.”
지한과 함께 온 그의 매니저가 대화에 참여했다.
“연 코치님, 저희 에이전시에서 몇 번 연락드렸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승훈을 띄우며 끼어든 지한의 매니저는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명함까지 내미는 통에 승훈이 잠시 다봄에게서 멀어졌다.
그 틈을 타 지한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사진 어때? 마음에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