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다봄이 물을 마셨다.
“너 오늘 왜 이래, 진짜.”
“심사가 꼬여서 그런가 봐요.”
“나한테?”
“어이없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일이 없는데.”
다봄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녀석의 표정을 보고 행동을 멈췄다.
건오의 입매가 짧게 움직였다. 그것 말고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는데, 이상하게 그가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자고 갈게.”
그런 건오를 보고 있으니 다봄은 괜히 제가 잘못한 것 같았다. 그의 말처럼 그럴 만한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배고프다. 밥 먹자, 건오야.”
다봄의 입에서 배고프다는 소리가 나온 이상, 건오는 하기 싫은 식사를 해야 했다.
건오는 본인을 둘러싼 상황에 예민했다. 선천적이라기보단 어린 건오를 물리적, 감정적으로 학대하던 양부모 탓이었다.
양부모가 죽고, 옆집에 살던 다봄의 집에서 자라며 그 기질도 점차 변화했지만, 다봄에 관련한 건 서른이 되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끼니를 거를 정도로 날카로워지는 건, 전부 다봄과 관련되었을 때뿐이었다.
“연하람 방 되게 지저분하네.”
씻고 나온 다봄은 꽉 찬 네 방 중 당연히 비어 있는 동생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어째 서재보다 침대 협탁에 더 많은 종이가 쌓인 듯했다.
“이거 건드리면 안 되는 거지?”
다봄이 뒤에 선 건오에게 물었다. 그는 하람의 방 앞에 비스듬히 기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요.”
마찬가지로 씻고 나와 그녀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질서처럼 보이지만 다 나름대로 질서가 있다며 선하와 싸우던 하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어 다봄이 떨떠름하게 베개를 들어 보았다.
“혹시 커버 언제 바꿨는지 알아?”
“그저께 아주머니 다녀가셨어요.”
“그건 다행이네.”
“찝찝하면 제 방에서 자도 돼요.”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받아쳐야 평소와 다름없을지 잘 아는 다봄은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그럼 그럴까?”
누가 보기에도 그럴듯했지만, 그는 다봄의 눈코입 대신 가만있질 못하는 손을 주시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다봄도, 다봄의 손을 보고 있는 건오도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 대신 한 발 뺐어야 할 건오가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녀가 재빨리 말을 보탰다.
“너는 연하람 방 괜찮지?”
“난 상관없어요.”
“아냐. 그냥 내가 여기서 잘게. 아주머니가 알아서 깨끗하게 해 주셨겠지.”
대화가 끊겼다. 하람 방에서 둘이 마주 보고 있어 봤자 딱히 할 게 없었다.
그 와중에도 건오는 주춤거리는 그녀의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눈썹 사이를 좁혔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접촉을 해도 동요가 없던 다봄이 오늘따라 그를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와인 한잔할래요?”
“그럴까?”
어색한 기분을 견디지 못한 다봄은 건오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 * *
“어? 그거 내가 좋아하는 거야.”
건오가 꺼낸 와인을 보고 다봄이 반색했다. 당연히 그녀의 취향을 알고 고른 것이었다.
“너희 집엔 위스키가 더 많을 줄 알았는데.”
건오가 와인 병을 기울였다. 곧바로 다봄의 잔에 검붉은 액체가 채워졌다.
“위스키는 안쪽에 더 있어요.”
“넌 그거 마실래? 위스키 좋아하잖아.”
“아뇨. 누나랑 같은 거 마셔야죠.”
건오는 여상히 대꾸하며 제 잔에도 와인을 따랐다. 그동안 다봄은 와인 잔만 빙빙 돌렸다.
건오가 먼저 한 모금 마셨다.
다봄은 움직이는 그의 목울대를 무심코 곁눈질했다. 굵고 선명한 목선을 보고 있으니 공연히 갈증이 이는 듯했다.
다봄은 홀린 듯이 그를 따라 목을 축였다.
“역시 맛있다.”
와인과 함께 간단히 내놓은 큐브 치즈도 그녀의 취향이었다.
좋아하는 와인, 안주. 그리고 건오까지. 다봄은 어느새 긴장을 풀었다.
그런 그녀를 구경하던 건오보다 다봄의 잔이 먼저 비었다.
“짠.”
한잔하자며 시작한 술자리는 한 병을 비울 때까지 지속됐다.
그때쯤엔 그녀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커피만큼이나 와인을 좋아하는 다봄에겐 예견된 모습이었다.
취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눈이 풀려 있었다.
“왜 집에 안 갔어요?”
건오가 문득 물었다. 그는 다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네가 여기서 자고 가라며.”
다봄은 싱겁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잔에 남은 와인을 마저 털어 마셨다.
“내가 말했잖아요. 난 누나 친동생 아니라니까.”
건오가 그녀 앞에 포크로 치즈를 찍어 들이밀자, 다봄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려 받아먹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경계가 없네요.”
손바닥에 턱을 괴고 건오를 바라보는 다봄에게 그가 손을 뻗어 왔다. 건오의 엄지가 다봄의 입가를 훑었다.
“뭐 하는 거야.”
다봄은 뒤늦게 놀라며 흠칫 몸을 물렸다. 동시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치즈가 묻어서요.”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입가를 문질렀다.
건오가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20년 동안 봐 왔지만 그녀는 한결같이 예뻤다. 문제는 그의 눈에만 예쁜 게 아니었다.
다봄이 빈 잔을 만지작거리는 걸 보며 그도 잔에 남은 와인을 비웠다.
“내 심사가 왜 꼬였는지 듣고 싶지 않아요?”
“응. 듣고 싶어.”
여전히 묘한 분위기 속에서 다봄이 건오의 와인 셀러를 눈짓했다.
그녀가 취기가 오르는 듯해 그가 망설이니, 다봄이 허락을 구하듯 한 번 더 고갯짓했다.
건오는 별수 없이 두 번째 와인을 꺼내 직접 코르크 마개를 땄다. 새로운 와인이 다시 잔에 채워졌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정말?”
“내일 속 쓰려요.”
“내가 더 마시고 싶다 해도?”
잔을 들던 건오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다봄도 무심코 흘린 자신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심사가 꼬인 이유나 말해 줘.”
다봄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고, 건오는 그녀를 직시하며 와인을 마셨다.
그녀는 꼼짝없이 그의 눈길을 받아 냈다.
“제 욕심이 커져서 그래요.”
“욕심?”
다봄이 되물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부터 온몸에 퍼진 긴장감이 그녀의 어딘가를 두들겼다.
마른손을 쥐었다 폈다 한 그녀가 숨을 얕게 내쉬며 입가에 잔을 갖다 댄 순간이었다.
“내 생각에, 지금 누난 알아듣고 있는 것 같은데.”
건오가 떠보듯 말했다.
확신은 아니었다. 넘겨짚는 말에 가까웠다.
자신의 오랜 바람이 만들어 낸 착각, 또는 그와 비슷한 망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년간 한없이 천진하던 다봄과 제 앞의 다봄은 분명 달랐다.
그가 넌지시 던진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봄은 여느 때처럼 헛웃음이라도 흘릴 것이다.
“무슨 소리야.”
하지만 저렇게 무언가 들킨 얼굴을 하면…….
건오는 두근거리다 못해 불안할 정도로 울렁이는 속내를 겨우 억눌렀다.
“의식하고 있잖아요, 누나가, 저를.”
이 한마디는 그에겐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봄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서둘러 입술에 잔을 갖다 댔다.
머리를 굴리려는데,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색색 호흡만 했다.
건오는 한순간도 다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했다.
이 분위기를 감당하지 못한 그녀는 잔을 비우고 다음 잔을 따랐다.
“그렇게 빨리 마시면 바로 취해요.”
“백건오.”
다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황을 원망으로 덮은 눈빛이 그를 노려보았다.
“너 때문이잖아.”
다봄은 술기운에 숨어 제 모든 잘못을 건오의 탓으로 넘겼다. 해서는 안 될 생각, 꿔서는 안 될 꿈, 말도 안 되는 착각까지.
결국 그가 그녀의 잔을 빼앗았지만, 이미 잔은 비어 있었다.
주정을 부리듯 투정한 다봄의 고개가 서서히 떨어졌다.
건오는 그녀가 앉은 의자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접었다.
“누나, 괜찮아요?”
흘러내린 다봄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겨 준 그는 얼마간 그 모습을 감상하듯 지켜보다 속삭였다.
“자러 갈래요?”
술에 잠식당한 다봄은 겨우 고개만 움직였다.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목에 감싸게 한 그는 다봄의 등과 다리를 받쳐 가뿐히 안았다.
공중에 들린 다봄이 어렵사리 실눈을 떴다. 빠르게 오른 취기가 완연했다.
건오는 제품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다봄을 고쳐 안았다. 그녀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백건오.”
하람의 방문을 열며 그가 눈썹을 살짝 내렸다.
“또 뭘 혼내려고 성까지 붙여요.”
“담배 말이야, 담배.”
“넘어가 줘요. 버릇이라고 할 만하지도 않아요.”
다봄을 침대 위에 고이 눕힌 건오가 허리를 펴려고 했다.
한데 그녀가 제 목 뒤에서 빠져나가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피우지 마, 그거.”
“누나 때문이에요.”
건오도 술기운을 빌려 다봄 탓을 해 보았다.
그녀는 곧장 입술을 비쭉 내밀면서도 사과를 건넸다.
“내가 미안해.”
무작정 나온 사과에도 건오는 놀라지 않았다. 다봄이 그에게 약한 건 스스로 제일 잘 알았다.
평소라면 아니라고 답했을 건오는 이번에도 술기운을 빌려 다른 말을 해 보았다.
“뭐가 미안한데요?”
“음.”
다봄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점차 몸이 무거워져 건오를 붙잡았던 손에도 힘이 빠졌다.
“네 와인 막 마신 것도 미안하고, 밥 안 먹는다고 잔소리한 것도 미안하고, 그리고…….”
웅얼거리는 다봄은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이 보였다.
픽 웃으며 그녀에게서 떨어진 그가 종알거리는 입술을 어이없이 보고 있던 때였다.
“너를 두고 그런 꿈을 꾼 것도 미안.”
기울어지던 그의 고개가 멈췄다. 건오는 내리깐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인상을 썼다.
서늘한 낯에 명확한 당혹감이 어렸다.
“그런 꿈이 뭔데요.”
“몰라.”
건오의 눈썹이 들썩였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는 다봄이 자신을 의식하고, 사과할 만한 꿈을 추측했다.
“꿈에서, 우리 키스했어요?”
이것도, 도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