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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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누구?”

-기사부터 설명해 봐.

“연광 관련된 기사는 언론사에 연락할 거고, 광고 얘기는 내일 오빠한테 물어봐. 이럴 때 오빠 핸드폰 꺼 두는 거 알잖아.”

요점을 모르는 다봄의 대꾸에 하람은 한숨을 쉬었다.

비상구에서 통화하던 그는 25층에서 20층까지 내려와 있었다. 도저히 발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 서지한. 난 지금 형보다 서지한이 더 어이가 없다고.

“뭐?”

잘만 대답하던 다봄이 새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당연히 연광이나 승훈 얘기일 줄 알았는데 연하람이 서지한을 물어볼 줄이야.

괜히 민망해진 그녀가 입을 다무니 하람이 더욱 민망한 질문을 던졌다.

-서지한이랑 다시 만나?

“…….”

-설마, 다시 만나는 건 아니지?

하람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는 다봄의 침묵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계단을 정신없이 오갔다.

-빨리 대답해 봐.

연다봄 일엔 누구보다 예민한 그의 친구 새끼는 또 끼니를 거를 예정이었다.

그럴 때마다 불쌍하다는 눈으로 봐 온 하람이지만, 지금은 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진짜 다시 만나?

“아니야!”

다봄은 낯간지러운 만큼 사납게 대답했다.

그제야 하람이 바쁘던 다리를 멈췄다. 그는 눈치 없는 척하며 재확인까지 했다.

-거짓 진술은 아니지?

“아니라고. 아니야.”

-그럼 왜 서지한이랑 계약한 건데?

“내부 결정이야. 그만 물어. 나도 실감 안 나니까.”

-어떻게 전 남친을 광고 모델로 세울 생각을 하냔 말이야. 아버진 서지한이 너랑 사귄 거 알고 계셔?

하람이 다봄을 나무라자마자 통화가 끊겼다. 직접 보지 않고도 짜증이 난 누나 얼굴이 그의 눈앞에 그려졌다.

실제로 다봄은 동생이 상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린 게 별 간섭을 다 하고 있어!”

한편, 단시간에 누나 속을 뒤집은 하람은 걱정을 내려놓고 사무소로 올라왔다.

동생 놈에게 누나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간을 나눠 쓰는 존재는 연다봄이 아니라 바로 저 안에 있는 백건오였다.

다행히 막 점심시간이 된 사무소엔 건오만 남아 있었다.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댄 그는 언뜻 보면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건오의 사무실로 들어선 하람이 그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가자. 밥 먹게.”

“됐어. 먹고 와.”

역시나 거절이었다. 하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그래. 밥은 그렇다 치고.”

“…….”

“연다봄 말인데.”

건오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새카만 눈동자가 하람을 직시했다.

“그런 거 아니래.”

정확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뜻은 통했다.

하람은 최대한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눈썹을 인위적으로 움직여 봤지만, 건오에겐 그 정도로 취급될 일이 아니었다.

하람은 이마를 매만졌다. 그는 겉모습만 멀쩡한 친구 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은 챙겨 먹어야 한다.”

“그래.”

영혼 없는 대답을 뒤로하고 하람마저 사무소를 나갔다.

건오는 도로 눈꺼풀을 닫았다. 애석하게도 그의 마음 상태는 여전히 지옥이었다.

* * *

“아빠, 어째 반찬이 더 많아진 것 같은데요.”

“저번 달에 엄마가 준 건 다 먹었어?”

“반도 더 남았죠. 엄마는 양 좀 줄이셔야 한다니까.”

늘봄 직원 주차장에서 다봄이 아이스박스를 받아 들었다.

큼지막한 걸 트렁크 안에 넣자마자 주혁은 더 큰 아이스박스를 옮겨 줬다.

두 개의 큰 박스와 한 개의 작은 박스, 총 세 박스가 주혁의 차에서 다봄의 차로 전달됐다.

“열심히 먹고 있어. 아빠가 집에 가서 말해 볼 테니까.”

이번 달에도 선하가 챙겨 준 반찬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그나마 혼자 사는 다봄의 몫이 가장 적었고, 승훈의 집이나 동생들 집으로 갈 박스 크기는 그녀 것의 두 배에 가까웠다.

다들 바빠서 집에서 챙겨 먹을 시간도 없는데 선하가 보내는 양은 늘기만 했다.

“다른 애들한테도 빨리 전달하라더라.”

“알겠어요.”

난감해하는 다봄을 뒤로하고 주혁이 트렁크를 닫았다. 이제 다봄이 나머지 두 집에 배달할 차례였다.

승훈은 내일 광고 촬영 때 전달하면 되겠지만, 바쁜 변호사들이 문제였다. 그들과는 시간이 맞지 않아 아파트 경비실에 맡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미 그쪽 경비 아저씨와 안면을 튼 다봄은 갈 때마다 건강 음료까지 챙겨서 드리고 오곤 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또 봐요, 아빠.”

“저녁 챙겨 먹어.”

“아빠도요.”

다봄은 차에 올라타 하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이 울리다 그대로 끊겼다. 바쁜가 싶어 녀석들이 사는 아파트를 내비게이션에 찍은 그녀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하람은 다봄이 아파트 앞에 다다라서야 전화를 걸어 왔다.

-응. 전화했었네.

하람의 말과 함께 블루투스로 연결된 차 안에 안내 음성이 들렸다.

“공항이야?”

-아, 시끄러워? 내일 외지 재판 때문에 미리 가려고 왔어.

“어디?”

-부산. 근데 왜 전화했어?

그들은 매번 이렇게 바빴기에 다봄은 부산이라는 말에도 놀라지 않고 대꾸했다.

“엄마가 반찬 챙겨 주셔서. 그럼 경비실에 놓고, 내가 건오한테 퇴근할 때 찾아가라고 문자 할게.”

다봄은 오늘도 당연히 건오가 퇴근 전일 거라고 여기고 혼자 그렇게 결정했다.

하람은 그 말에 옳다구나 싶었다.

-잘됐네.

“뭐가?”

-백건오 퇴근해서 집에 있어.

“그래?”

-엄마가 보낸 반찬이면 무겁겠네. 걔보고 내려오라고 해.

마침 다봄의 시야에 건강 음료를 사 가던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이 보였다.

건오가 집에 있다는 소식에 다봄의 차는 그곳을 지나 방문자 게이트를 통과했다.

동시에 하람이 명령처럼 부탁했다.

-온 김에 백건오랑 밥이나 먹어 줘.

“밥? 이 시간이면 진작에 먹지 않았을까?”

지상 주차장에 주차한 다봄이 시동을 끄고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야근한 다봄과 주혁은 그렇다 치더라도, 퇴근한 직장인들은 보통 식사를 마칠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람은 마치 건오를 옆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부정했다.

-아닐걸. 가 보면 알아.

하람은 어렴풋한 기억으로 옆집 부부를 떠올렸다.

백건오를 굶겼던 그 양부모란 놈들이 살아 있었어야 했다. 그래야 이 새끼 끼니 거를 때마다 꾸준히 족쳤을 텐데.

“무슨 소리야? 건오 밥 안 먹었어?”

-네가 같이 먹어 주면서 잔소리해. 걔 네 말 하난 잘 듣잖아.

거의 질겁한 다봄의 물음에도 하람은 제 할 말만 했다.

다봄은 무슨 일인지 더 묻고 싶었으나 하람이 빠르게 덧붙였다.

-나 이제 비행기 타야 해. 끊을게.

그대로 통화가 끊겼다.

한숨을 쉰 다봄은 일단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박스 크기에 머뭇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고 힘을 썼다. 괴상한 기합이 절로 따라붙었다.

겨우 꺼낸 박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은 다봄이 어깨를 주무르며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따라 더 무거운 듯한 박스를 보며 다봄은 결국 하람의 말대로 건오의 번호를 눌렀다.

-누나.

“응? 건오야.”

한데 서로의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린 다봄과 아파트 앞에 선 건오의 시선이 마주쳤다.

다봄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응시하자 그도 놀랐는지 눈꺼풀을 몇 번 깜빡였다.

다봄은 우연히 만난 건오를 보며 인상부터 썼다. 그녀가 열린 트렁크와 아스팔트 위 반찬들을 두고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백건오, 너.”

다봄은 성을 붙여 그를 불렀고, 건오는 흔치 않게 당황하다 손에 든 담배를 바로 짓이겼다.

“너 언제부터 담배 피웠어?”

“냄새나요.”

그녀가 다가오자 그가 물러섰다. 그의 향수 냄새에 매캐함이 섞였다.

“백건오.”

“어머니 반찬이에요? 내가 가지고 올라갈게요.”

건오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다봄은 자신의 차로 향하는 그를 황당하게 바라보다 쫓아갔다.

그러나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애 취급하느냐던 건오의 말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거니와 자신을 직시하는 녀석을 마주하니 입이 다물렸다.

침잠한 눈을 한 그가 다봄을 향해 다시 말을 걸었다.

“전화하지 그랬어요.”

“……지금 했잖아.”

건오가 오니 일은 쉬웠다. 다봄은 반찬 정리까지 금세 마칠 수 있었다.

건오는 그의 눈치를 보는 그녀의 시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 밥 안 먹었어.”

다봄이 방금 정리한 반찬 중 몇 가지를 접시에 덜었다. 거기에 선하가 보낸 국과 즉석 밥을 데우기만 했을 뿐인데 빠르게 한 상이 차려졌다.

건오는 제게 묻지도 않고 2인분을 내는 다봄을 보며 하람에게 무슨 얘길 들었단 걸 눈치챘다.

“밥은 거르지 마.”

다봄도 숟가락을 들고 직접 한마디 했다. 맞은편에 앉은 건오가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신경 쓰여요?”

“그걸 말이라고.”

당연한 질문을 하는 건오를, 다봄이 흘겨봤다. 그러자 그가 아주 기가 막힌 말을 했다.

“그럼 계속 걸러야겠어요.”

“뭐?”

다봄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곱씹는데, 그가 덧붙였다.

“담배도 피우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백건오. 불만 있으면 말로 해. 너 가지고 협박하지 말고.”

그의 상태가 다봄에겐 협박씩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화를 내지도 못하고 화난 척만 겨우 했다.

“오늘 자고 가요.”

애써 표정을 유지하는 다봄에게 건오가 뜬금없기만 한 말을 던졌다.

순간 다봄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오늘따라 건오가 이상했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흐름에 다봄은 마냥 혼란스러웠다.

“여기서 자고, 나랑 아침도 같이 먹어요.”

“집에 가야 해.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또 회사도 집이 더 가깝고.”

다봄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눈동자는 도통 자리를 잡지 못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속은 눈동자보다 더 날뛰고 있었다.

“내가 신경 쓰인다면서요.”

건오는 그녀가 거절해도 굴하지 않았다.

“어릴 때처럼 옆에 있어 줘 봐요. 그럼 말 잘 들을게.”

그의 건방진 대꾸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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