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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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층으로 내려온 다봄은 로비와 카페를 이어 주는 옆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봤다.

힘들게 찾을 필요도 없었다. 유난히 사람이 몰린 한가운데 앉아 있는 지한은 정말 브이를 치켜들고 있었다.

다봄이 핸드폰을 꺼냈다.

“진짜 두 시간 전에 왔어?”

그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다봄이 물었다. 지한은 미소 띤 얼굴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며 다봄에게 대답했다.

-응, 그쯤 됐겠네. 근데 안 들어와?

“오빠가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

-그럼 내가 나갈게.

지한이 다봄을 주시하며 자리를 정리하자 그를 지켜보던 이들의 고개도 함께 돌아갔다.

다봄은 서둘러 몸을 감췄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제와 같은 긴장을 느낄 새도 없었다.

“보아하니 룸이 나을 것 같은데, 이 근처엔 그런 식당이 없어.”

-잘됐네. 잠깐 근교로 나가자.

“갑자기? 나 차 안 가져왔어.”

-내가 가져왔어.

다봄은 고민했다. 지한과 밥을 먹을 준비는 됐지만, 저 시선을 감당할 준비는 되지 않았다.

그녀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그가 태연히 말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뭐 어때.

세월이 흐르긴 했나 보다. 서지한이 저렇게 뻔뻔하게 굴고.

“그래서. 보란 듯이 나란히 걷자고?”

“못 할 건 없지.”

지한이 옆문을 열고 나와 다봄에게 다가왔다. 미소를 걸친 그가 제게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다봄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와 지한이 가까워졌다.

“이쪽으로 나가자. 그쪽 입구보단 사람 없을 거야.”

“너 편한 대로 해.”

직원 주차장이 아닌 고객 주차장은 맞은편 주차 건물로 가야 했다.

정해진 점심시간보다 일찍 나온 덕분에 텅텅 빈 로비가 이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와 나란히 걷질 못했다.

“나 여기서 기다릴게. 차 갖고 여기로 와줘.”

다봄은 그와 함께 밖으로 나서길 꺼렸다. 지한이 멈춰선 그녀를 돌아봤지만, 다봄은 모른 척 시선을 내렸다.

* * *

운전석에 앉은 지한이 다봄을 살폈다. 내내 창밖에만 시선을 둔 그녀가 신경 쓰였다.

그는 무슨 말을 꺼낼까 고민하다 툭 감상을 던졌다.

“좋네.”

“뭐가?”

“네가 직급이 높아지니까 30분이나 먼저 만날 수 있잖아.”

영 불편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는 짧게 웃고 말았다.

확실히 정해진 점심시간보다 먼저 나오는 짓은 이전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을 받았다.

“직급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땡땡이친 거야. 그리고 예전엔 오빠가 더 바빴어. 정해진 시간 말고는 만나지도 못했잖아.”

“그랬지. 전지훈련도 자주 갔었고.”

“훈련뿐이겠어?”

당시엔 누구보다 속상했던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우스갯소리로 말할 수도 있게 됐다.

잠깐 나눈 과거 얘기에 어색하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머지않아 다봄의 시야에 호수가 들어찼다.

뭐, 껄끄러우면 경치나 구경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했다.

“나오길 잘했지?”

지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지만, 다봄은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그들은 호수를 둘러싼 식당 중 한 곳에 들어섰다.

종업원을 따라 3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다봄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버릇을 발견할 때마다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

“여기 앉아.”

지한은 종업원이 나서자마자 표정을 감췄다.

그제야 다봄도 시선을 들고 창가에 다가섰다.

바람이 만들어 내는 물결까지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명당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무심코 벌어진 입술을 재빨리 다물었다. 얼굴을 마주 보지 않을 땐 경계심이 바짝 올랐지만, 직접 마주하면 이렇게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그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파스타는 오일로 시킬까?”

막 메뉴판을 펼치던 다봄이 눈을 마주해 왔다.

지한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샐러드도 하나 시킬 거잖아. 그치?”

“…….”

“음료는 레모네이드로 할게.”

다봄이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주문서가 완성됐다.

그가 다시 들어선 종업원에게 주문을 마치는 동안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잔잔한 호수만 바라봤다.

모든 게 평온한 것 같은데 다봄의 속만 평온과 거리가 멀었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아 간 후에도 다봄의 눈길은 창밖에 박혀 있었다. 지한은 그녀의 시선을 붙잡는 대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둥근 이마, 완만하게 올라간 긴 속눈썹, 그 아래 곧게 뻗은 콧대, 더 아래에 선이 분명한 입술까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고 있으니 밝은 다갈색 눈동자가 그를 향해 움직였다.

다봄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 많이 변했어?”

“아니.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야.”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과거 생각에 절로 웃음을 띨 만큼 그녀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반면 그런 그와 달리 다봄의 입꼬리는 점차 내려갔다.

“아냐. 나 많이 변했어.”

“어른스러워졌어?”

“그것도 맞겠네. 그래서 오빠의 이런 행동이 불편하고 이상해.”

차가운 말과 달리 그녀의 심장은 크게 울리고 있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박동이 헤어지던 그때와 비슷했다.

다봄은 물컵을 감쌌다.

“내가 보고 싶진 않았어?”

“다시 시작하자는 거 아니라며?”

다봄은 그의 질문을 질문으로 넘겼다. 진서를 통해 통화한 뒤, 지금은 그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전부 예상치 못한 일들이었다.

다봄은 일상에서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지한은 그녀에게 변수였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는 거야.”

종업원이 3층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봄과 지한이 서로를 응시한 채 입을 다물었다.

문이 열리자 그녀의 고개는 다시 호숫가로 돌아갔다. 지한의 눈길이 달라붙는 것 같아 어깨가 굳었다.

대화 없이 식사가 시작됐다. 다봄은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녀는 파스타보다 음료를 먼저 비워 냈다. 혀가 느끼는 거라곤 레모네이드의 신맛이 전부였다.

“미안. 밥부터 먹고 말했어야 했는데.”

빈 음료 잔을 본 그는 엉뚱한 부분에서 사과했다. 다봄은 눈을 끔뻑였다.

“미안하다고 할 건 그게 아니잖아. 가족들 앞에서 멋대로 밝힌 걸 사과해야지.”

“그래. 그것도 미안해.”

지한은 잽싸게 두 번째 사과를 건넸다.

전부터 지한은 그녀가 화가 났다 하면 무조건 사과했다. 그 모습을 이렇게 보니 다봄은 풀어지지 않기 위해 이마를 찡그렸다.

“화 풀렸어?”

다봄은 입술을 더 악다물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난 다시 만날 생각 없어.”

그녀는 더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 반응에 대해 단단히 각오하고 나온 지한은 애써 괜찮은 얼굴로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

“이러지 마, 오빠.”

다봄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지한은 모든 동작을 멈췄다. 시간은 흐르는데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헤어진 남자에게 또다시 상처 되는 말을 해야 했다.

다봄은 그게 너무 싫었다. 제 말을 들은 그의 표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지한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치워.”

“당장 만나자는 거 아니야. 기회만 줘.”

“헛수고야.”

“각오했어.”

“난 아니야.”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괜찮아, 봄아.”

그는 기어코 다봄의 손을 내렸다. 그녀는 자신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지한은 그녀와 마지막이 어떤 모습일지 예상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내가 너무 미련이 남아서, 그래서 그래.”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덧붙였다. 그녀의 눈꼬리가 잔뜩 내려갔다.

“잠시만 이렇게 지내 줘. 그 후에도 네가 흔들리지 않으면,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혼자 잘 지내 볼게.”

“나한테 왜 그래…….”

“미안해.”

못 잊어서 미안해.

그가 세 번째로 미안하단 말을 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지금, 다봄은 다시 회의실 안에 앉았다.

<연승훈, 서지한, 늘봄 카페 전속모델 계약.>

<드디어 늘봄에 연승훈이 나섰다. 훈훈한 상부상조…….>

<두 금메달리스트가 선택한 늘봄. 계약금은 얼마?>

발 빠른 섭외와 그보다 더 빠른 결정과 결재로 홍보 모델 계약 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봄은 승훈과 주혁에게 이유 모를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들도 조급한 다음 시즌 일정을 고려해 내린 특단의 결심이란 걸 알았다.

“설마 홍보팀이 저런 타이틀을 뽑은 건 아니죠?”

다봄은 회의실 스크린 위로 뜬 포털사이트 기사들을 가리켰다.

홍보팀장 해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 살짜리 우리 아들도 저렇게 유치하진 않을 거예요.”

“근데 확실히 화제가 되긴 되네요. 훈훈한 상부상조 바로 밑 기사가 계약금 얘기라 웃기긴 한데, 가족 일이니까 이미지는 괜찮은 것 같아요.”

“인정하기 싫지만 그러네요. 아, 오늘도 회의 끝나면 연광 얘기까지 쓴 언론사들 연락 좀 돌리세요. 매번 그랬던 것처럼 내용은 허위사실 아니면 터치하지 않겠다 하고, 자극적인 제목만 좀 바꿔 달라고 부탁해요.”

<늘봄의 부자지간, 연광의 부자지간과 다른 모습…….>

다봄은 가늘게 뜬 눈으로 마지막 기사의 제목을 응시했다.

연광 그룹과 늘봄의 관계가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가 된 것도 다 저런 기사 때문이었다.

저 판도 이슈와 트래픽 전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다봄은 이런 언급이 나올 때마다 예외 없이 대처했다.

그들의 손가락에 오르내리다 지친 주혁을 대신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연광 얘기가 많이 줄었어요.”

다봄은 표정 없이 긍정했다. 이 정도 화제는 최종 결정권자인 주혁도, 모델이 된 승훈도 예상했을 테니 그러려니 할 터였다.

“그럼 광고 콘티 완성되는 대로 보고서 올려 줘요.”

“네.”

“신제품 이름과 가격은 다음 회의 때 결정하기로 하고, 다들 점심 맛있게 드세요.”

“네!”

평소보다 일찍 회의를 끝내고 회의실을 나온 다봄은 하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의 중간, 녀석에게 전화를 달라는 문자가 세 개나 왔었다.

“무슨 일이야?”

-기사 뭐야? 형은 왜 전화도 안 받고?

내심 급한 일일 줄 알았더니 기사 얘기였다.

막 회의를 마친 다봄은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오빠를 찾는 거면 내일 걸어 보고, 날 찾는 거면 용건만 말하고. 이제 아빠랑 점심 먹으러 가야 해.”

-넌 점심이라도 먹겠지만 누군 저녁까지 못 먹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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