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다봄이 작정하고 나무란 말을 지한은 다정한 물음으로 받았다. 이 남자는 단 한 마디만으로도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무슨 생각이야, 대체?”
다봄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차가운 그녀의 반응을 느낀 지한은 뜸을 들였다. 그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서글픈 감정이 고였다.
-충동이었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모른 척하려니 그게 잘 안 됐나 봐. 미안해.
“아니. 처음은 그랬을지 몰라도 그 후는 아니잖아.”
지한은 굳이, 그리고 보란 듯이 다른 이들 앞에서 과거를 밝혔다. 작위적이었던 그의 행동을 그녀가 읽지 못할 리 없었다.
다봄의 지적에 지한은 고민했다. 다른 남자 곁에 앉아 있는 너를 보고 소유권을 주장하듯 굴었다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지한은 그를 충동질했던 또 다른 이유를 들었다.
-승훈 선배한테 알리고 싶었어.
“갑자기? 날 보자마자?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있는 데서 그랬다고?”
다봄이 황당해하며 따졌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홧홧해졌다.
반면 지한의 음성은 잔잔하기만 했다. 그가 특유의 잔잔한 목소리로 다봄을 두드렸다.
-너와 비밀로 만났던 걸 내내 후회했어.
이게 뭐지, 무슨 뜻일까.
조금쯤 흥분한 그녀의 머리가 열심히 굴러갔다. 하지만 그 의도를 안다 한들 바뀌는 건 없었다.
“지난 일이야.”
-만나는 사람 있어?
“이런 얘기 의미 없어.”
다봄은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까칠하게 답했다.
그러나 지한은 여전히 살갑고 너그러웠다. 그는 그녀가 어떻게 반응하든 괜찮아야 했다.
-만나는 사람 없으면 내일 점심 같이 먹자.
“난 오빠랑 다시 시작 안 해.”
-시작하자는 거 아니야. 밥 먹자는 거야.
“그럼 수작처럼 들리는 건 내 기분 탓이야?”
다봄이 얼른 선을 그었다.
하필 그 말에 첫 만남이 떠오른 그는 눈매를 접으며 받아쳤다.
-딱히 아니라곤 못 하고.
‘보험 처리만 하면 되는 상황에 뭔 밥을 먹어요?’
‘밥 싫으시면 커피 마셔요.’
‘제가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래도 조금만 내줘요. 저도 지금 그쪽이 뒤에서 박는 바람에 시간 뺏기고 있잖아요.’
‘……그건 정말 죄송해요. 근데 지금 수작처럼 들려서 말인데요, 혹시 제가 착각하고 있어요?’
‘사고를 당하고도 기분이 좋은 걸 보면 딱히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다른 건 몰라도 그 기억만큼은 선명했다. 계절도, 날씨도, 그때 그 갓길도, 서로를 바라보던 눈동자도.
그의 기억 속에서 절대 지워질 리 없는 장면이었다.
-회사로 갈게.
“안 만날 거야.”
다봄은 반항하듯 대꾸했다.
같은 기억을 떠올렸지만 그녀는 그리움 같은 건 느끼고 싶지 않았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라고 끊임없이 되새길 뿐이었다.
-한 번만 더 만나자, 응?
그런데 지한의 목소리는 더욱 부드러워졌다. 마치 그는 수년의 공백이 없는 것처럼 그녈 대했다.
이건 반칙이었다.
순간 울컥한 다봄이 원망스레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봄아.
다봄이 잽싸게 입을 다물었지만 그 뒤에 나올 말은 뻔했다. 그는 단숨에 목이 메었다.
고개를 도리질 친 다봄이 티 나게 말을 돌렸다.
“탓하려고 한 말 아니야.”
-내가 갈게. 얼굴 보고 얘기하자.
“…….”
-봄아.
“……1시부터 점심시간이야. 그때 와.”
-고마워.
통화가 끝날 때, 그녀의 날카로운 기세는 한풀 꺾여 있었다.
다봄은 난감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눈썹 사이를 긁고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가습기와 노란 조명을 껐다.
그녀가 새까맣게 변한 공간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 * *
다음 날, 월요일 아침 9시부터 회의를 마친 다봄은 주혁 대신 11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8층으로 내려갔다.
이상하게 층 전체가 무척 어수선했지만 그녀는 월요일인 탓이라 여기며 회의를 시작했다.
보통 한 계절이 절정일 때, 그들은 다음 계절 신메뉴를 준비했다.
특히나 봄은 회사에서 가장 힘을 주는 시기였다.
“내일 5시까지 모든 직원 상대로 후보 음료 시음할 수 있도록 준비 부탁하고, 홍보 아이디어도 받는다고 알림 넣어 줘요. 뽑힌 직원에겐 인센티브 두둑이 준다고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저, 부대표님.”
“네?”
다봄이 자료를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홍보팀장이 상기된 얼굴로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다봄은 뭔지도 모르고 액정부터 내려다봤다.
“SNS요? 이건 왜…….”
“지금 SNS 해시태그에 늘봄 커피를 검색하면 전부 서지한 선수가 뜨고 있어요.”
지한의 이름만으로도 크게 당황한 다봄은 아예 팀장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서지한이 여기, 1층 카페에 와 있거든요.”
정말이었다. 화면 속 서지한이 들고 있는 머그잔에 벚나무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가 액정을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봤다.
사진 아래는 고객들이 적은 해시태그가 빼곡했다. 최신순으로 누르면 아예 그를 찍은 손님들 사진이 한 페이지를 차지했다.
“게시글 댓글 좀 보세요.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손님들은 혹시 연승훈 선수도 오는 거 아니냐고 기대하고 있어요.”
“오빠가 여기 올 리가 없잖아요.”
“네. 저희는 알지만…… 그래서 말인데요, 부대표님.”
홍보팀장이 핸드폰을 받아 가며 눈을 빛냈다.
그녀와 6년 넘게 일해 온 다봄은 듣지도 않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좋지 않은 예감에 일단 안 된다 하려는데, 팀장이 조금 더 빨랐다.
“저희 광고 모델로 두 선수, 어때요? 대표님이 이번 일로 당분간 배우는 싫다 하셨잖아요.”
“맞아요. 그렇다고 뜬금없이 가수나 예능인 걸어 놓는 것보다 평소에 저희 커피를 좋아하는 유명인을 모델로 쓰는 게 훨씬 신뢰성 있을 것 같아요.”
‘아니, 얘기가 왜 그렇게 가?’
다봄은 절로 벌어지려는 입술을 애써 다물었다.
그녀의 부정적인 기색을 눈치채고도 각 팀에서 모인 팀장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연승훈 얘기를 꺼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반응은 당연히 각오한 뒤다.
“서지한 선수 여기 처음 온 거 아닌가요? 그런데 무슨…….”
“그래도 연승훈 선수랑 묶으면 단골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두 시간째 앉아 있대요. 직원들도 내려가 같이 사진 찍고 있어요.”
다봄의 낯이 아연해졌다. 그녀가 빙 돌려 퇴짜를 놨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벌써 두 선수에게 꽂힌 모양이었다.
회사가 오늘따라 유독 소란스러웠던 이유가 서지한 때문이라니.
다봄은 그의 인기를 별로 활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인기에 누구보다 지친 사람이었다.
“저도 회의 직전에 다녀왔어요. 근데 운동선수라 그런가? 웃고 있는데도 뭔가 어려워서…… 인터뷰 읽을 때처럼 친근한 느낌이 들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누구처럼 음주운전을 하진 않겠죠.”
“그건 그렇긴 해요. 그래도 통신사나 화장품 광고 보면 화면상으론 엄청 다정해 보여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연승훈 선수를 차가운 느낌, 서지한 선수를 따뜻한 느낌으로 매치하면 되겠어요.”
“벌써 난리 날 것 같은데요.”
제품개발팀까지 나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을 아예 모델로 쓸 생각이 없는 다봄은 다른 말에 놀랐다.
약속까지 아직 30분이나 남아 있는데 벌써 두 시간째 앉아 있단다. 게다가 다음 말은 더 기가 막혔다.
“다른 사람들이랑 사진을 찍었다고요?”
다봄의 뒷북에 홍보팀장은 친절히 핸드폰을 다시 내밀었다.
그녀는 조금 전 사진 대신 지한이 팬서비스하듯 브이를 치켜든 사진을 콕 집어 보여 줬다.
다봄이 연신 황당해하자 팀장은 그의 편을 들기에 이르렀다. 지금 손님이 많다느니, 회전이 느리긴 하지만 반응이 좋다느니. 다봄이 알아서 거를 얘기였다.
잠시 후, 재차 시간을 확인한 다봄은 발표 전 나눠 주었던 기획서를 팔락거리며 단정했다.
“모델은 다른 분 알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연승훈 선수는 현역일 때도 들어오는 광고 전부 거절한 걸로 유명하잖아요.”
“가족 일이면 다르지 않을까요? 인기도 그렇고 인지도도 여전한데 아까워요.”
“저희도 다음 시즌 전까지 얼른 대체 모델 구해야 하잖아요.”
이제껏 다봄이 엄두도 못 내 본 방안이었다.
서지한은 당연하고, 연승훈한테 광고 제의를 하는 순간 대답할 가치도 없다며 묵살할 게 눈앞에 보였다.
다봄이 회의적으로 고갤 저었다.
그러나 홍보팀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가 공적으로 제의해 볼게요. 번호만 알려 주세요!”
“진심이에요? 그냥 다른 사람 알아보는 게 좋을 텐데.”
“그래도 해 보고 싶어요. 구상이 떠오르니까 직접 거절당하기 전까진 포기가 안 될 것 같아요.”
“정말 만약의 경우에 오빠가 승낙해도 최종 결정권자가 코웃음 칠 수도 있어요.”
다봄은 서류를 받아든 주혁의 표정을 상상했다. 지금 그녀의 얼굴과 흡사했지만 이유는 달랐다.
다봄은 무서워서, 주혁은 무시해서.
“대표님이요? 왜요?”
“퀄리티 떨어진다고 그럴 거예요.”
“……대표님 가족도 되게 현실 가족이네요.”
다봄은 말없이 핸드폰에서 승훈의 전화번호를 찾아 줬다. 안 될 걸 알지만 의욕이 넘치시니 시도라도 해 보라는 뜻이었다.
물론 제게 돌아올 두 남자의 타박은 각오해야 했다.
“저장하셨어요?”
“네. 그럼 혹시 서지한 선수 번호도 알고 계세요?”
“아뇨. 밑에 있다니 직접 명함 드리고 오시거나, 정식으로 에이전시 쪽에 연락하세요.”
통화 기록에 남은 번호가 떠올랐지만 그녀는 고개부터 저었다. 그와 관련된 거짓말과 발뺌은 거의 자동이었다.
“이만 회의 마칠게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다봄은 평소보다 빠르게 회의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