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8/72)

08.

일석도 표정 변화 없이 되물었다.

“더 성장시켜 준다는데도 말이냐?”

“패밀리 레스토랑과 아이스크림 전문점 매출이 신통찮다고 들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여기서 이러시는 것보다 전문적인 인재를 들이는 게 나은 방법일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연광이 요식업과 맞지 않을 수도 있고요.”

몇 년 전, 연광은 야심차게 요식업계로 발을 뻗쳤다.

실적은 기대 이하였다. 매출이 점점 떨어지니 직원들을 모아 머리를 싸매게 했지만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요식업 총 관리자인 태철은 매 분기마다 보고서를 받아들며 욕을 했다. 임원들 사이엔 다봄의 조언처럼 아예 요식업을 접자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살짝 고개를 돌리니 중국까지 진출한 연주혁의 커피 전문점 늘봄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후 태철은 절연하다시피 한 막냇동생 대신 그의 딸을 회유하기 시작했고, 오늘은 기어이 아버지까지 모셔와 압박하고 있었다.

“회사가 조금 커졌다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이구나. 언제 주저앉을지 모르는 게 이 업계야. 너희가 실력으로 성장한 줄 아나 본데, 어림없는 소리다. 무엇보다 넌 전문적인 교육도 필요해 뵈고. 경영할 걸 뻔히 알면서 법대를 갔으면 유학이라도 다녀오든지 해야지.”

유순하게만 굴던 다봄이 건방지게 입을 놀리자 태철의 말이 길어졌다. 그는 분한 눈으로 그녀를 깔아뭉갰다.

그녀도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하, 연광 계열사로 들어가면 전 유학길에 올라야 하나 보네요.”

“네가 모르는 것들을 배우고 와야 뭐든 나아질 것 아냐?”

“그렇게 다녀오면 제 자리는 사라진 상태일 거고요.”

“피해의식이 기가 막히는구나.”

“할아버지도 절 보내실 생각이세요?”

다봄이 일석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는 두 핏줄의 날 선 대화를 들으며 테라스로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그렇게 잠시 있던 일석은 다봄을 다시 보곤 무언가를 꺼냈다.

“네 배움은 그만하면 충분하다. 승계 전까지 계열사는 차치하고, 당장은 이것부터 참석해라. 송열 외손주한테서 연락 올 게다.”

다봄이 일석이 내민 종이를 떨떠름하게 받아들었다. 여기까지 일석이 직접 행차한 이유가 태철의 닦달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연광이 주최하는 자선 파티 초대장을 훑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날짜가, 건오 생일이었다.

“참석할 의무는 없죠?”

“내가 주혁이 놈과 연을 끊었다지만 결국 너도 이 바닥에서 회사 운영할 거잖니. 와서 여러 사람과 인사도 하고 인맥도 넓혀라.”

그녀가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않자 일석이 덧붙였다.

“대한민국에서 어차피 넌 연광 핏줄이다.”

“……송열 그룹 외손주는 뭡니까?”

“뭐긴 뭐겠어? 혼기 꽉 찬 애들끼리 만나 보라는 거지.”

태철이 귀찮다는 듯 대신 답했다.

다봄은 당장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삼켰다. 그래봤자 표정에 불쾌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태철은 기가 막혔다. 동생 놈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저렇게 버릇이 없는지,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중매를 서나 보네요.”

“이러다 너까지 근본도 없는 놈과 결혼할까 봐 그런다.”

다봄이 눈을 질끈 감았다. 결혼 재촉이야 선하에게 꾸준히 겪어와 대충 넘길 수야 있었지만, 저런 이유라면 짜증이 치솟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일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내아들과 닮은 손녀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그를 보지도 않았다.

“그럼 그날 보자꾸나.”

“일단 승계부터 앞당기고, 계열사로 들어오는 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연광 계열사 안 한다니까 그러네.

“……들어가세요.”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녀가 쓰러질 듯한 몸을 축 늘어트렸다. 서지한 앞에서도 멀쩡했는데 여기서 기를 다 빼앗긴 느낌이었다.

초대장을 주머니에 구겨 넣은 다봄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회사를 물려받을 그녀로서도 인맥을 넓힐 자리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올해 건오 생일은 선물로 대신해야 할 것 같았다.

* * *

-연다봄은?

면담을 끝낸 하람이 건오에게 전화했다.

의자에 앉은 건오는 높은 천장을 응시했다. <늘봄> 본사 카페는 오늘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직.”

-네가 밥 같이 먹어 줘. 겸사겸사 너도 좀 먹고.

“그러려고.”

-어련하겠어. 의뢰인 얘기 좀 같이 들어 달라 불렀는데 쏙 가 버리고 말야. 하여튼 연다봄이라면.

“복잡했냐? 증거도 증인도 있으니 별로 어려운 사건은 아닐 것 같던데.”

-맞아. 사실 복잡한 건 없었어.

잠시 대화가 끊겼다. 하람은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건오는 잠자코 기다렸다. 말이 많은 녀석은 얼마 가지 않아 운을 뗐다.

-서지한이 너에 대해 물어봤어.

하람은 친구의 반응을 살피듯 한 박자 쉬었다. 건오는 갑자기 이 공간이 매우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가 넥타이도 없는 목을 습관처럼 매만질 때, 나름대로 뜸을 들인 하람이 말을 이었다.

-둘이 무슨 사이냐고 해서 난 곧이곧대로 답하려고 했는데, 형이 그런 건 뒤에서 물어보지 말고 네가 직접 물어보라고 그러더라.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건오가 형제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말투만 들어도 그들 표정이 그려졌다.

무엇보다 승훈 입장에선 다봄만 당황하는 게 아주 많이 거슬렸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애매한 대답을 내놓은 거겠지.

“그래, 알겠다.”

-뭐야. 반응이 그게 다야? 걔가 왜 너에 대해 물어본 건데?

목가를 배회하던 건오의 손이 더디게 내려왔다. 회사 로비와 연결된 카페 옆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누나 왔어.”

-차아암나. 예에, 모셔 가라, 모셔 가.

통화를 끊고 자리를 정리하던 건오가 눈썹을 모았다. 멀리서 봐도 다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누나.”

넓은 복층 카페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도 건오를 발견했다.

다봄은 제게 다가오는 건오를 향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웃었다. 입매를 끌어올리자 지친 기색이 조금은 사라졌다.

그녀는 매장 매니저가 자신을 알아보기 전에 다시 로비로 건오를 데리고 나왔다.

“뭐라도 먹었어?”

“왜 그런 표정이에요?”

다봄의 질문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그가 허리를 숙여 가까이 왔다. 그녀가 잡고 있던 건오의 손이 물러나려는 다봄을 잡아 세웠다.

다봄은 시선을 피했다.

그녀도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대충 예상이 갔다. 아무리 웃어도 건오 앞에선 통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대론 그의 허리가 펴지지 않을 것 같아 다봄은 가장 쓸데없었던 이야길 꺼내 들었다.

“유학 갈 생각도 없는데 유학 보내려고 그러셔서…….”

슬쩍 건오를 확인한 그녀는 입을 합 다물었다. 건오가 살벌하리만치 험악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회장님이 그러셨어요?”

건오는 욕을 삼키고 겨우 물었다.

“……큰아버지가.”

“누난 어디 갈 생각 없는 거죠?”

“그럼. 가긴 어딜 가, 내가.”

그녀는 재깍재깍 대답했다. 거의 본능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봄이 망설이는 기색도 보이지 않자 그는 날 선 기세를 차차 누그러트렸다.

그런 건오의 반응 때문에 그녀는 승계고 계열사고 다 잊어버렸다.

“그, 우리 집에 가서 뭐라도 시켜 먹을래?”

“누나 먹고 싶은 걸로 해요.”

다봄은 거절하지도 않는 건오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헛소리에 대신 화내 주는 녀석이 옆에 있으니 묘하게 안심되었다.

“정말 내가 먹고 싶은 거 시킨다?”

다봄을 따라 가볍게 웃은 건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식당에 주문을 넣고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다봄은 소파에 코트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뒤따라 들어온 건오의 시야에 코트에서 떨어진 흰색 봉투가 들어왔다.

건오가 봉투를 천천히 집어 들자, 금세 편한 옷으로 갈아 입은 다봄이 나타났다.

“누구 결혼한대요?”

“웬 결혼? 아니? 아아.”

그가 봉투를 가리키자 다봄은 네가 직접 보라며 눈짓했다.

건오가 봉투를 열어 확인하는 동안 그녀가 긴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며 불평했다.

“자선 경매라니, 뭐라도 사서 나와야 할 텐데.”

“…….”

“진짜 기부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대체 얼마를 예상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하필 네 생일이더라.”

건오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자선 파티 초대장이 까딱까딱 흔들렸다.

“대신 내가 선물 진짜 좋은 거 줄게.”

속상해하는 다봄 옆에서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생각에 빠질 때면 보이곤 하는 모습이었다.

소파 끝에 무릎을 모으고 앉은 다봄이 말 없는 건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단단한 팔뚝과 허벅지는 모르겠지만, 하도 봐 온 건오의 눈, 코, 입은 촉각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완벽한 이목구비를 찾으면 건오일 것이다. 그만큼 녀석의 이목구비는 무엇 하나 아쉬운 곳이 없었다.

부족한 것 없는 그의 겉모습에서 굳이 부족한 점을 찾으라면 다봄은 인상을 꼽았다.

건오는 선한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감정 표현이 두드러지지 않은 그가 삐딱하게 서 있으면, 쟤가 변호사인지, 형사인지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나 저렇게 표정 없이 있을 때면 더욱 그랬다.

“백건오, 뭘 그렇게 생각해?”

때아닌 감상을 마친 다봄이 한쪽 다릴 쭉 뻗어 그의 허릴 톡톡 건드렸다.

건오가 자그마한 발을 보곤 속절없이 입꼬릴 올렸다.

“응? 뭘 그렇게 생각하냐니까?”

“누나의 사회적 지위.”

뚱딴지 같은 소리에 다봄의 미소가 해괴하게 변했다.

생일 따위 중요하지 않은 건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혼자 힘으론 쫓아가기 어려워서.”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으쓱이는 그의 어깨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다봄은 건오의 사고 흐름을 따라갈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엄청 배고픈가 보네. 이상한 소릴 다 하고.”

건오가 그저 해맑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고요한 눈빛이 이어지자 다봄이 헛기침을 했다.

잠시 눌러두었던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 * *

건오와 식사를 하고, 못다 한 일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연락하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다봄은 밤 10시를 알리는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꾸물대기를 또 몇 분, 다봄은 지한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기다렸어.

신호음이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그는 지금까지 핸드폰만 보고 있던 것처럼 전화를 받았다.

침대맡 노란빛 조명이 다봄의 복잡한 얼굴을 비췄다.

-밥은 제때 챙겨 먹었어? 아까 아무것도 안 먹고 갔잖아.

지한은 그들이 꼭 어제도 만난 사이인 것처럼 질문했다.

-무슨 일 있던 건 아니지?

“오빠.”

그녀는 말을 골랐다. 낮에 긴장한 티를 잔뜩 냈기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싫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더라. 옛날 생각도 나고.

“왜 이러는 거야?”

지한이 말을 멈췄다.

다행히 다봄은 처음 통화할 때처럼 정신이 없지도, 심장이 난리를 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가 계속 가라앉았다.

“우리 모른 척해야 맞잖아. 그걸 5년 만에 만났다고 잊은 건 아닐 테고.”

-화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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