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오빠!”
다봄이 비명처럼 지한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건오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승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한이 다봄의 번호만 받아갔다 알고 있는 승훈은 누가 들어도 빼도 박도 못하는 대화에 어이가 없었다.
그 후엔 언짢아졌다. 건오가 사법연수원에 있던 시기라면 한참 전이다. 지한의 속내가 뭐든 굳이 여기서 과거 일을 끄집어낸 짓거리가 탐탁지 않았다.
“여기서 그 오빠가 나를 부르는 건 아닐 테고.”
승훈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지한만 보던 다봄도 뒤늦게 승훈을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빈속에 딸꾹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별 사이 아니야. 다들 드세요. 죄송합니다.”
“너도 먹어, 연다봄.”
동생의 당황한 모습에 기분이 좋지 않은 승훈은 이만 대화를 일축했다. 그런데도 다봄은 눈동자를 가만히 두질 못했다.
그녀는 밥 한 번 얻어먹으러 나왔다 일어난 일에 머리가 과부하 걸릴 지경이었다. 뭘 먹을 기분도 아니라 샐러드만 뒤적이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회사였다.
“네, 연다봄입니다.”
-부대표님, 권유정 팀장입니다. 지금 바쁘세요?
“무슨 일이에요, 유정 씨? 토요일에 왜 회사예요?”
불안하기 짝이 없던 다봄의 모든 행동이 단숨에 사무적으로 바뀌었다.
막 다음 음식이 들어왔지만 그녀는 식사를 뒤로하고 룸을 나섰다. 일정한 구두 소리와 함께 다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전 그냥 출장 갔던 보고서만…….
돌연 강필이 승훈을 톡 건드렸다. 그는 눈으로 해경과 지한, 그리고 건오를 가리켰다.
강필을 따라 시선을 옮긴 승훈은 혀를 찼다. 세 남자 모두 그녀가 나가며 닫은 미닫이문을 보고 있었다.
“지한이 형, 이 상황 뭐야, 대체?”
해경은 음식을 놓아준 직원이 나가자마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승훈이 뭐라 하기도 전이었다.
지한은 해경이 아닌 승훈을 보며 말했다.
“1년 11개월 만났습니다.”
“와이씨. 어쩐지 지한이 형이 여자한테 말을 막 놓을 리가 없는데.”
“1년 11개월이면 2년이잖아? 그게 너 몇 살 때야?”
생각보다 긴 기간에 놀란 해경과 강필 옆에서 승훈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지한이 그런 승훈을 곁눈질하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27살, 28살이요.”
“그때라고? 근데 어떻게 속였지?”
“대단하다. 저였음 티 다 났을 텐데.”
“그래, 박해경. 연애하면 집중 못 해서 기록 떨어져.”
“아뇨, 코치님. 전 봄이랑 연애할 때가 성적 제일 좋았어요.”
“그러고 보니…….”
주제가 주제인지라 강필마저 격의 없이 반응했다.
떠들썩한 해경 덕에 필요 이상 동화된 것일 수도 있지만, 후배의 연애는 그만큼 놀람의 연속이었다. 그중에서도 그 연애 상대가 승훈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제일 놀라웠다.
체육인들이 떠드는 동안 하람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는 건오를 지켜봤다. 좋지 않은 녀석의 버릇이 또 나왔다.
“근데 너 넥타이 어디 뒀냐?”
그 꼴을 보다 못한 하람이 아예 다른 질문으로 화제를 바꿨다. 잠시라도 녀석의 머리를 환기하려는 의도였다.
건오는 묵묵히 하람의 손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항상 정석으로 차려입고 사무소에 나오는 그가 허전한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넥타이라면…….
“건오 어제 연다봄 집에서 잤다며. 그럼 거기 있겠지.”
불쑥 끼어든 승훈은 툭 폭탄을 던졌다.
시끄럽던 강필과 해경이 곧장 대화를 멈췄다.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바뀌었다.
승훈은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을 해 놓고 뒷수습을 하지 않았다.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승훈은 건오의 시선을 무시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다들 안 먹고 뭐 해? 선배도 더 드세요.”
“어, 어, 그래야지.”
“알겠습니다, 코치님.”
강필과 해경은 주책을 멈추고 건오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하람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먹기 시작했다.
그 후로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룸 안에서 지한과 건오만 손을 놀리지 않았다.
하람이 젓가락을 세 번째 입에 갖다 댈 무렵이었다. 다봄의 구두 소리가 침묵을 깼다.
“나 회사 가 봐야 해.”
다시 돌아온 그녀는 갑자기 가방을 챙겼다. 언뜻 봐도 급한 기색이었다.
하람이 손도 대지 않은 다봄 몫의 음식을 가리켰다.
“뭔데? 심각한 거 아니면 밥은 먹고 가.”
“할아버지랑 큰아버지가 회사로 오셨대.”
“뭐?”
그녀를 잡아 앉히려던 하람이 표정을 구겼다. 승훈도 마찬가지였다. 선택지가 없는 다봄은 빠르게 체념한 후였다.
그녀는 벌써부터 지친 얼굴로 강필과 해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엔 더 오래 봬요. 사건 잘 해결하시면 좋겠어요. 뒤에서 응원할게요.”
“예. 감사합니다. 바쁜 일인 것 같은데 어서 가 보세요.”
“죄송해요. 집안 어른들이 기다리셔서요. 해경 씨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오빠랑 잘 지내 줘요.”
“그, 반가웠습니다.”
다봄을 코앞에 둔 해경이 간신히 대답했다. 바지에 손바닥을 문대고 악수까지 하니 다시금 목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인사하는 해경 뒤로 지한이 서 있었지만, 다봄은 보지 못한 척 외면했다.
“넌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가냐?”
하람이 투덜거리고, 다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로서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할아버지도 오셨다잖아. 아빠한테 말하지나 마. 오빠, 나갈게. 진서 언니한테 선물 잘 좀 전해 주고.”
“그래. 차는?”
“건오랑 같이 와서 앞에서 택시 타고 가면 돼. 그럼 진짜 가 볼게.”
“같이 가요.”
어느새 일어선 건오가 다봄 곁에 섰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봤다. 이후에 다봄이 무슨 말을 할지는 뻔했다.
건오는 다봄이 거절하기 전에 먼저 선수 쳤다.
“연하람이 변호할 거라 저는 가 봐도 돼요. 법정에 서 줄 증인도 둘이나 있고요.”
그가 그렇게 말해도 건오를 부려 먹는 느낌인지라 다봄은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한데 이번에도 건오가 빨랐다.
“누나 집에 넥타이도 두고 왔어요.”
“진짜? 내가 빠진 거 없이 잘 챙기라니까.”
“그러니까요.”
조금 전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던 건오는 잘도 제 상황과 승훈의 말을 이용했다. 거기다 다봄의 코트를 대신 들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 주기까지 했다.
하람은 녀석의 간극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 그가 보는 건오는 여우에 가까웠다.
“그만 가요.”
“어어. 그래.”
건오의 몸이 다봄의 시야를 가렸다. 그 상태로 건오가 움직이자 그의 손에 어깨가 감싸인 그녀도 발을 떼야 했다.
룸을 벗어난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당한 이유까지 슬쩍 흘렸다.
“인사가 너무 길어서요. 연 회장님 성격 급하잖아요.”
“맞아. 큰아버지도 만만치 않…….”
그들이 식당을 빠져나온 직후였다. 다봄의 손목이 잡혔다.
불시에 강제로 당겨진 그녀가 깜짝 놀라며 휘청거리자, 건오가 급히 다봄을 잡아 바로 세웠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다른 손으론 지한의 팔뚝을 잡은 건오가 살벌하게 눈을 가라떴다.
지한이 이런 식으로 그녀를 붙잡을 줄은 몰랐던지라 저지할 틈이 없었다.
지금의 지한은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
“동생은 잠시 비켜 주지?”
두 남자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건오에겐 지한에게 붙잡힌 다봄의 손목만 확대되어 보였다.
그는 흥분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서지한 앞에서 동요하고 싶진 않았다.
“봄아.”
“……오빠.”
다봄이 그를 작게 불렀다. 건오는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며 불안정한 제 상태를 겨우 다잡았다.
“난 진짜 오빠가 왜 이러는지…….”
무심코 토로하던 다봄이 말을 골랐다. 그녀는 건오의 존재를 되새기며 표정을 관리했으나 그런다 한들 복잡한 감정이 감춰지진 않았다.
“아니야, 나중에 얘기해. 연락할게. 그러니까 이것 좀 놔 줘.”
“아, 미안.”
지한이 황급히 손을 뗐다. 다봄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옆에 선 건오를 잡아당겼다.
“우리 갈게.”
“연락 기다릴게.”
잠시 망설이던 다봄이 고개를 끄덕이곤 뒤돌았다.
더 붙잡을 수 없었던 지한은 멀어지는 그녀를 우두커니 바라봤다. 그러다 그를 돌아본 건오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향한 시선에 호의라곤 없었다.
다봄이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그 동생이 저런 놈이었을 줄이야.
지한이 떫은 입술을 축였다.
* *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구두와 대리석 바닥이 부딪쳤다.
다봄이 디디고 선 <늘봄> 본사 9층은 주혁과 그녀, 그리고 VIP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이 거대한 벽을 돌면 그 손님들과 함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조 공원이 나왔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다봄과 주혁이 출근하지 않는 주말, 특히 이곳엔 아무도 없어야 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연일석과 연태철을 생각하고 만든 곳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들도 남들이 보기에 귀한 손님이긴 했다. 그들은 당연하게 VIP용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큰아버지.”
지팡이도 짚지 않은 백발의 노인과 그 옆에 자리한 남자가 다봄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는 착하게 꾸며 낸 미소를 걸치고 큰아버지, 태철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장 상석에 앉은 할아버지, 연일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태철은 불만을 터트렸다.
“근처라며 뭘 그렇게 꾸물대다 온 거야?”
꿀 같은 주말에 이 무슨 행패세요.
다봄은 그렇게 답하는 대신 형식적인 웃음을 걸쳤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길 하려고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찾아왔나 싶어 한숨이 가득 찼다.
“하여간 대답도 없고…….”
“그동안 잘 지냈냐.”
일석은 무뚝뚝한 인사로 태철의 말허리를 잘랐다. 다봄이 기다렸단 듯 마주 답했다.
“네, 덕분에요. 할아버지도 잘 지내셨어요?”
“그래. 새해도 됐으니 찾아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올해도 그 고아랑 보냈겠죠.”
태철이 거든 한마디에 다봄은 그나마 차리던 예의를 집어치우고 눈을 치켜떴다.
백건오, 그 이름을 알면서도 굳이 고아라 지칭한 태철은 태연하게 다리를 꼬았다.
어차피 좋은 분위기를 기대하지도 않고 온 일석은 바로 주제를 바꿨다.
“대표 승계는 얼마나 남았니?”
“글쎄요. 아버지께서 주신 과제가 아직 남아서요.”
“이맘때쯤이면 될 것 같았는데, 아직이라고?”
대만 지점도 아직 오픈하지 않았는데 뭘 기대하고 쪼르르 온 건지.
현지 매출도 봐야 했고, 그 외에도 각종 지표들을 살피며 제대로 안정될 때까지 가맹 사업을 맺은 대만 운영사와 함께 관리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건 뭐, 능력이 부족한 건지. 머리는 엄마를 닮은 건가?”
“쓸데없는 말은 됐다. 승계받는 대로 연광 아래로 들어와 관리받는 게 낫겠구나.”
다봄의 눈빛이 형형해지자 일석은 또다시 아들의 말을 끊어 냈다.
연광그룹은 일석이 세운 기업이었다. 제과 회사로 시작해 유통업계에 뛰어들어 식품, 대형 마트, 백화점을 주력으로 하며 관광, 호텔, 건설까지 사업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 연광 창업주가 막내아들과 연을 끊다시피 한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가정사였다.
“아뇨. 그동안 에둘러 거절했는데 할아버지까지 나서시니 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늘봄은 연광 계열사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막내아들의 딸인 다봄은 남을 대하는 것보다 더 차가운 음성으로 제 뜻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