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6/72)

06.

하람은 친구의 사무실을 제 공간처럼 대여해 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연다봄이니까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해요, 누나.”

기다린 듯 사무실 주인까지 허락하자 다봄이 반색했다. 머뭇거리던 기색은 사라졌다.

“진짜? 나야 좋긴 하지. 그럼 나 네 책상 써도 돼?”

“뭘 물어봐. 백건오가 책상도 못 쓰게 하겠어?”

연다봄한테.

하람은 능글맞게 웃고, 건오는 친구를 노려봤다.

어쨌든 다봄은 정말 빠질 시간이었다.

건오의 공간에 머물기로 한 그녀는 다시 한번 강필과 눈인사를 나눴다.

그 와중에도 해경은 여전히 다봄을 향해 서 있었다. 화르르 붉어진 해경의 목이 여간 눈에 띄는 게 아니었다.

“이제 그만 나가 있어.”

승훈이 그녀에게 대충 손을 내저었다. 다봄이 해경의 상태를 눈치채기 전에 그가 먼저 선수를 친 거였다.

건오는 문까지 직접 열어 줬다.

“알았어. 갈게, 갈게.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그럼 얘기 나누세요.”

다봄은 거의 내쫓기듯 하람의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해경은 끝까지 그녀 뒤를 응시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승훈의 여동생을 직접 본 해경은 얼이 빠져 있었다.

해경에게 눈앞에서 본 다봄의 첫 모습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지금까지 봐 왔던 누구보다…….

“얘 정신 놓은 것 좀 보게. 그렇게 예쁘던?”

그래. 예뻤다. 너무 예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뭐라 얘기하고 싶어도 실수할 것 같아 입술이 딱 붙어 버렸다.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정신 차려, 새끼야.”

“와…….”

강필이 해경을 나무라면서 킬킬 웃던 그때, 승훈이 해경의 어깨를 묵직하게 짚었다. 평소보다 서늘한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박혔다.

“박해경, 정신 어디 팔아먹었지?”

“......그,”

“너 여기 증언하러 온 거야. 여자 보고 넋 빠져 있으라고 온 게 아니고.”

“네, 선배님.”

해경은 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겐 훨씬 선배인 강필보다 승훈이 더 어려웠다.

딱히 승훈이 기합을 주거나 쥐 잡듯 잡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 혼나 보면 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나마 해경은 뻔뻔한 편이라 승훈과 이렇게 어울리지, 다른 선수들은 그를 무척이나 불편해했다.

“선배님 동생분께도 이따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건 됐어.”

뒤늦게 창피해진 해경은 고개를 들고 뺨을 긁적였다. 그런 그를 변호사란 직업이 맞춤처럼 잘 어울리는 두 남자가 보고 있었다.

해경은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하람보다 표정 하나 없는 건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경은 건오를 향해 참 뜬금없이 물었다.

“왜 수영 안 하셨어요?”

“그래. 그건 나도 묻고 싶었어요. 대체 그 신체 조건을 가지고 왜 운동을 안 한 겁니까?”

체육인들의 시선은 건오에게 오래도록 머물렀다.

강필은 아쉬워하는 눈으로 건오의 어깨부터 허리, 허벅지까지 훑었다. 눈대중으로만 봐도 그의 몸은 웬만한 선수 못지않았다.

“얘가 공부를 워낙 잘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요.”

“앞뒤 상황은 서면으로 파악했으니 박해경 씨 얘기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하람의 능청스러운 대꾸는 건오의 딱딱한 말에 바로 묻혔다.

건오가 해경을 직시하자, 해경은 훔쳐보다 걸린 것처럼 움찔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저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느낌이라, 해경은 잡소리를 삼키고 말문을 열었다.

“저희 쪽 군기 장난 아닌 거 아시죠?”

당연하게 보통 선수와 코치가 친해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제가 볼 땐 이게 다 코치님이 잘해 주려 해서 그래요. 사실 김 코치님처럼 좋으신 분이 없거든요. 불만은 많고 제 딴엔 억울하니, 만만해 보이는 김 코치님을 가지고 일을 벌인 거죠. 김 코치님이 연 코치님처럼 선수들 대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당한 걸로만 따지면 연 코치님 걸고넘어지는 게 더 그럴듯할걸요?”

“……박해경.”

삐딱하게 앉은 승훈이 이마를 문질렀다. 저 자식은 안에서도 촐싹거리더니 밖에 나오니 더했다.

해경이 눈치를 보기 시작하자 하람이 말을 받았다.

“선수들이 제기했던 차별이나 왕따 방관, 언어폭력은 목격한 적 없으십니까?”

“언어폭력은 말도 안 되고, 차별이나 왕따는 파벌 싸움을 문제 삼으려는 것 같아요.”

체육계의 고질적인 문제까지 튀어나오자 얘기가 길어졌다. 대화는 해경에게서 다시 강필로 넘어갔다.

자신이 아는 건 죄다 꺼낸 해경은 어느 순간부터 몸이 근질거렸다. 언제 끝나나 싶어 시계만 자꾸 봤다. 서서히 배도 고파 오는 것 같고, 이 답답한 공간을 빨리 나가고 싶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다른 증인이 사무소로 들어섰다.

그를 발견한 승훈이 드물게 난감한 낯을 띄웠다.

“선배, 온다던 다른 증인이…….”

“어, 왔나 보네. 왜 이렇게 늦었대?”

“쟤 오늘 인터뷰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랬어? 나는 일 끝나면 바로 오겠다고 하니까 그러라 했지.”

“와, 또 인터뷰했대요? 역시 스타라니까, 지한이 형.”

그 순간 강필에게만 집중하던 변호사들의 표정이 단번에 달라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해경은 분명 ‘지한’이라고 했다. 당황한 하람이 되물었다.

“지금 누구라고……?”

“들어보셨죠? 서지한이라고, 지난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 3관왕 거머쥔 놈입니다. 허허.”

강필이 자랑스레 지한을 소개하자마자 해경이 하람의 사무실 문을 열며 반겼다.

“형, 여기예요.”

“아, 그래.”

“여, 왔냐?”

“네. 늦었습니다.”

지한이 하람의 사무실로 들어서려는 때였다.

갑자기 들린 우당탕 소리가 지한의 발을 멈추게 했다.

뭐가 쓰러지기라도 한 건지 크게도 나는 바람에, 다들 소음의 진원지인 건오의 사무실로 고개를 틀었다.

“다봄 씨, 뭐 떨어트린 것 같은데?”

강필이 승훈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동시에 지한의 눈빛이 바뀌었다.

지한은 하람의 사무실이 아닌 건오의 사무실로 방향을 바꿨다.

“어라? 형! 왜 거기로 가요?”

“그러게. 야, 거기 아니야!”

해경과 강필이 한마디씩 외쳤다.

그들 뒤에 앉은 하람과 승훈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건오를 봤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승훈도 지한이 진서를 통해 다봄에게 관심을 보인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건오는 조용히 머리만 쓸어 넘겼다. 그의 기분이 단숨에 흙탕물에 처박혔다. 명치가 타들어 가는 느낌에 절로 미간이 모였다.

* * *

한편 다봄은 벌떡 일어서다 의자를 넘어트렸다.

지한의 이름과 그의 목소리에 누구보다 놀란 쪽은 다봄이었다. 의자를 다시 세워야 하는데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켰다.

정말 서지한이었다.

내리지 않은 블라인드 사이로 지한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통화를 하던 순간처럼 그와의 기억이 살아났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다봄의 시야에 점차 그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지한이 건오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

두 남녀는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다봄은 혼란스러웠고, 지한 역시 이렇게 만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지라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정하려 애를 썼지만 곤두선 감각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문득 지한이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을 움직였다. 곧 책상 위에 놓인 다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답장이 없어서 또 번호 바꾼 줄 알았잖아.”

인사를 건너뛴 그의 첫마디였다.

다봄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니지. 이렇게 무시하는 것보다는 바꾼 게 나았으려나.”

지한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다봄은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과거가 덮쳐 오며 온몸이 잔뜩 긴장했다. 그녀가 무심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다봄의 다리에 넘어진 의자가 걸리며 뱅그르르, 의자 바퀴가 돌아갔다.

돌연 정신이 든 다봄은 그제야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이들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꼬리가 바짝 올라갔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입매를 늘어트렸다. 다봄은 과거와 변한 게 없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지? 끝나고도 볼 수 있을까?”

다봄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는 지한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인이었을 때, 연다봄과 서지한은 관계를 철저히 숨겼다.

처음엔 주변에 말하는 게 낯간지러워 감췄다지만 나중엔 그의 입장 탓에 쉽사리 밝힐 수 없었다.

그들은 헤어진 지금까지도 서로에 대해 괜한 말이 퍼지지 않게 조심했다.

그런데 그 불문율을 지한이 무시하고 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오늘 점심 먹자.”

“선약 있어요.”

다봄은 거절했는데, 지한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게 꼭 네가 몇 번을 거절해도 괜찮다는 듯 느껴져 다봄은 불편했다. 그의 속이 자신에게 보이는 것처럼 제 속도 그의 눈에 보일 것 같아 도망가고 싶었다.

다봄이 재차 거절하려던 때였다.

“같이 먹어.”

어느새 그들 곁에 다가온 승훈이 제안했다.

“오빠?”

“그 선약, 우리잖아. 말 나온 김에 지금 다 같이 먹고 들어오자고.”

승훈은 이 상황에 대해 무엇 하나 묻지 않았다. 승훈을 따라 자리를 정리한 하람과 건오도 마찬가지였다.

해경과 강필만이 궁금해 죽겠다는 듯 건오의 사무실을 건너보고 있었다.

다봄이 안절부절못하며 지한과 눈을 맞췄다. 지한이 달래듯 눈웃음을 그렸다.

“그렇게 하자. 응?”

다봄은 진짜 왜 이러냐고 묻고 싶었다.

* * *

원래 승훈과 함께 가려 했던 한식집에 다 같이 와 버렸다. 직원은 인원수를 보고는 비어 있는 8인용 룸을 안내해 줬다.

냉큼 구석에 자리를 잡은 다봄은 자신의 맞은편엔 하람을 앉히고, 건오를 옆자리로 끌어당겼다.

지한은 건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다 체하겠는데.”

하람이 제 옆의 지한과 그 앞에 앉은 건오를 번갈아 봤다. 다봄 또한 먹지도 않았는데 체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남매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한은 물컵을 채워 하람에게 내밀었다.

“반가워요. 승훈 선배랑 정말 닮았네요.”

“아, 예, 저도, 반갑습니다.”

하람이 크흠, 헛기침했다. 지금은 반갑다는 빈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람조차 괜스레 목이 간지러운 상황에, 건오는 묵묵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겉모습만큼은 여기서 그가 제일 무감해 보였다.

“지한이 형, 오늘 인터뷰했다면서요?”

“응. 예상보다 늦게 끝났어.”

다봄처럼 식탁 가장자리에 앉은 해경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마침 애피타이저로 샐러드와 흑임자 죽이 각자 앞에 놓였다.

건오는 당연하게 제 몫의 죽을 다봄에게 건넸고, 그녀도 당연하게 받았다.

“고마워.”

다봄의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지한은 그릇을 잡으려 했던 손을 거두었다. 제가 그녀에게 하려던 걸, 그리고 제가 했었던 걸 건오가 그대로 하고 있었다.

지한이 가늘어진 눈으로 건오를 관찰하듯 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건오가 처음으로 지한에게 말을 걸었다. 건오는 평소보다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무섭도록 진중한 눈을 한 채 지한을 직시했다.

잠시간 건오를 뜯어보듯 보던 지한이 뜬금없이 미소를 걸쳤다.

“세월 빠르네요. 그땐 건오 씨가 사법연수원에 있었는데.”

지한은 착하게 웃으며 인사도 나누지 않은 건오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의중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가 사법연수원에 있던 시기면,

“봄이에게 동생들 얘길 종종 들었거든요.”

연다봄과 서지한이 사랑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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