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어…….”
둘 다 말이 없자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봄은 그제야 제 행동을 자각하곤 그의 머리를 털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음, 수건 가져다줄까? 아님 드라이기?”
“괜찮아요.”
둘 다 필요하지 않았던 건오는 스스로 머리칼을 몇 번 털고는 다봄을 응시했다.
그녀가 오늘따라 유독 뻣뻣했다. 착각하고 싶어질 만큼 묘한 긴장감이 그를 감쌌다.
건오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다봄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이 역시 이상했다.
“나, 먼저 잘게.”
결국 다봄은 다 지우지 못한 동요를 어쩌지 못하고 도망쳤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행여나 녀석이 제 생각을 짐작이라도 할까 무서웠다.
결단코 생각의 한 자락도 들켜선 안 될 일이었다.
* * *
다봄의 머리 위로 물줄기가 쏟아졌다.
뒤에서 뻗어온 크고 예쁜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얽어 들어왔다. 연이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다봄은 몸을 바르작거렸다. 맨살에 남자의 젖은 바지가 느껴졌다.
“으흑.”
다봄의 뒤에 선 남자는 그녀를 천천히 벽으로 밀었다. 미끄러운 욕실 타일과 선이 굵은 몸 사이에 그녀가 뭉개졌다.
남자의 다른 손이 다봄의 허리를 배회하다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남자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건오야…….”
믿을 수 없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른 다봄이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자신을 압박하는 힘에 작은 몸부림밖에 치지 못했다. 그 빈틈에 그의 허벅지가 하얀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고개가 곧바로 젖혀지고, 그가 엉키었던 손을 내려 제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녀의 야릇한 소리는 물소리에 잠겼다. 그러나 그가 버클을 푸는 소리는 너무나 선명했다.
젖은 그의 바지가 욕실 어딘가에 던져졌다. 다봄은 그제야 그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누나.”
그녀를 돌려세운 건오의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를 가렸다. 그 아래 새카만 눈은 정욕에 휩싸여 있었다.
넓게 벌어진 그의 어깨 아래로 시선을 옮기고 싶었지만, 건오가 하체를 밀착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이건 누나가 시작한 거예요.”
다봄은 억울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한순간도 잊지 말고 기억해요.”
벌써 그에게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 * *
지난밤, 건오를 그렇게 의식하던 다봄은 아주 기막힌 꿈을 꾸었다.
그 꿈이 자꾸만 떠올라서 이를 닦다가 주저앉고, 머리를 감다가 그대로 쥐어뜯었다.
다 그 몹쓸 드라마 때문이라고 합리화를 하려고 했지만 마음먹은 것처럼 쉽지 않았다.
건오에게 20년 넘게 듣고 있는 누나란 호칭이 그토록 선정적으로 느껴질 줄이야.
“으으…….”
벌써 다봄은 몇 번이고 한숨을 참았다. 그녀의 옆엔 바로 그 백건오가 있었다.
“빠트린 거 없죠?”
“응. 다 챙겨 넣었어.”
아주 태연한 척 대답하면서도 그녀는 자괴감에 괴로웠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환멸감이 들 수도 있다는 걸 몸소 깨닫는 중이었다.
“벨트 매요.”
건오가 조수석에 앉은 그녀에게 일렀다.
어제 건오와 하람의 사무소에 승훈까지 온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다봄은 아침부터 그와 함께 준비를 시작한 터였다.
제주에서 사 온 가족들 선물도 전달할 겸, 일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승훈에게 점심이나 얻어먹을 심산이었다.
겸사겸사 그 발칙한 꿈도 잊으면 더할 나위 없고.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나도 알아도 돼?”
다봄이 혼자만의 민망함을 참으며 운을 뗐다.
그녀의 상태를 짐작도 못 하는 건오는 메시지로 전해 받은 간략한 사건 개요를 떠올렸다.
“김강필 코치 아세요?”
“응. 오빠 선배잖아.”
국가대표 수영선수였던 승훈은 은퇴 후 코치로 활동 중이었다. 강필은 그보다 선배였다.
“그분이 선수 몇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실 건가 봐요.”
“정말? 왜?”
개인적으로 친분은 없지만 다봄은 강필을 잘 알았다. 승훈이 아니라 지한 때문이었다.
“선수 몇 명이 SNS에 폭로처럼 글을 올렸는데, 그게 기사가 나면서 일이 많이 커진 듯해요. 관련해서 조사 들어가나 봐요.”
그가 운전을 시작하자, 다봄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영 코치를 검색하니 강필 사진이 우르르 떴다.
그 옆엔 <수영 국가대표 김강필 코치, 선수들 차별, 따돌림 방관, 언어폭력까지…….>, <수영선수들 SNS 토로…….>라 적힌 기사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이분 평판 좋지 않아?”
“그래요?”
지한에게 듣기론 그랬다. 유하고 잔정도 많다며 강필에 대해 자주 얘기했었다.
다봄은 여러 기사를 클릭해 보다 시발점이 되었던 SNS 글까지 정독했다.
그사이 그들은 빌딩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 일월 법률사무소는 이 건물의 25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11시 되면 난 근처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있을게.”
다봄이 쇼핑백과 노트북이 든 쇼퍼 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아직 30분 정도 남았으니 승훈에게 선물을 넘긴 후 빠질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다봄은 제가 그린 큰 그림을 재잘댔다.
“이거 가지고 오빠한테 생색 좀 내면 우리 점심도 얻어먹을 수 있을걸?”
“앞에 한식집 예약할까요?”
“그럴래?”
건오는 맞장구를 치며 그녀의 쇼핑백을 받아들려 했다. 평소라면 다봄은 의식조차 못 하고 짐을 넘겨줬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다봄이 어색하게 쇼핑백을 다른 손으로 바꿔 들었다. 건오가 그녀를 내려다봤지만, 다봄은 25층에 다다를 때까지 앞만 봤다.
혼자 눈치를 보던 다봄이 건오의 뒤를 따라 사무소로 들어섰다.
개업 이후 두 번째 방문이었다. 직원이 많아진 만큼 책상도 많아진 사무소엔 여러 사람의 흔적이 생겼다.
“연다봄, 네가 여긴 왜 왔어?”
먼저 와 있던 승훈이 하람의 사무실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건오를 따라온 동생을 어리둥절하게 보았다.
얘가 여길 갑자기 왜 왔지 싶은데, 앞뒤 상황을 알고 있는 하람은 종이를 팔락거리며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연다봄 집에서 외박한 백건오 변호사가 데려온 거지, 뭐.”
그 즉시 승훈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건오와 승훈의 시선이 마주쳤다. 승훈이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는 건오는 눈길을 피했다.
다봄은 정수리 위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고 말갛게 웃었다.
한결같이 퉁명스러운 형제들을 보니 자괴감 가득하던 마음이 좀 진정됐다.
“오빠, 내가 선물 가져왔어. 진서 언니 줄 귤차 세트랑 화장품도 몇 개 사 왔고, 오빠 술도. 봐봐.”
“내 건?”
“집으로 귤 보냈어.”
“귤? 나만 귤?”
남매는 여느 때처럼 투덕거렸다.
하람을 무시하는 다봄이 귀여워 건오의 눈매가 살짝 접혔다.
다른 사람이 볼 땐 티도 안 나는 그 모습을 귀신같이 발견한 하람이 말을 돌렸다.
“둘이 재밌었어?”
“응.”
다봄은 하람이 건오를 놀리려는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단순히 긍정했다.
하람이야 백건오가 한 달을 외박한들 일 년을 외박한들 신경 쓰지도 않지만, 승훈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휘어진 눈썹을 한 승훈이 건오를 재차 비딱하게 보았고 건오는 다시 그 눈길을 피했다.
하람이 짓궂게 한마디 보태려는데, 벌써 소파 하나를 차지한 다봄이 그들을 불렀다.
“둘 다 안 들어오고 뭐 해?”
“어. 가.”
승훈은 먼저 앉아 있던 자리를 찾아갔다. 승훈의 뒤를 따라 건오도 하람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다봄이 그를 자신의 옆자리로 끌어당겼다.
“오빠가 오늘 점심 사 줘. 나 그거 얻어먹으려고 왔어.”
다봄이 말하는 와중에도 승훈은 건오의 차림을 살폈다.
옷은 구겨진 곳이 없고 머리도 녀석답게 단정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앞머리가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하람의 말을 듣고 보니 외박한 티가 났다.
“그래. 근데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괜찮아. 근처 카페에서 업무 좀 보고 있으려고.”
“오. 바쁜 척하네?”
“오빠, 얘는 빼놓고 가자.”
“싫은데? 나도 갈 건데?”
하람이 다봄의 표정을 따라 했다. 연년생 동생들의 설전이 오늘따라 피곤하다 싶을 때, 승훈이 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셨다.”
의뢰인 강필과 강필의 증인이 되어 줄 후배가 사무소 바깥문을 열고 방문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11시 직전이었다.
다봄은 다가오는 걸음 소리를 들으며 가방을 고쳐 멨고, 하람과 건오도 느릿하게 일어섰다.
곧 하람의 사무실 문이 격하게 열렸다.
“승훈아. 나 왔다.”
“코치님, 저도 왔습니다.”
“오셨어요, 선배. 왔냐, 박해경.”
“그래. 아이고, 다들 저 때문에 고생 많으십니다! 김강필이라 합니다.”
“코치님 후배, 박해경입니다.”
중후한 인상의 강필은 털털한 말투로 첫인사를 건넸다. 허허 웃는 얼굴이지만 그 속에서도 강인함이 느껴졌다.
먼저 강필과 하람이 악수를 하고, 뒤이어 해경과 건오가 목례를 나눴다.
“연하람입니다. 코치님 변호를 맡게 되었습니다.”
“백건오입니다.”
“두 분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거, 참. 쉬는 날 수고스럽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그들이 인사하는 동안 다봄은 지갑을 꺼냈다. 누나를 놀리던 남동생이 변호사 가면을 쓴 것처럼, 그녀도 순식간에 대외용 가면을 썼다.
강필의 시선이 하람과 건오를 지나 마침 다봄에게 닿았다. 그녀가 기다렸단 듯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연다봄이라고 합니다. 코치님 선수 시절 팬이었어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승훈이 여동생 얘긴 좀처럼 듣지 못해 궁금했거든요. 저 녀석에게 여동생이라니, 뭔가 신기하네요.”
“오빠가 제 얘기만 안 했나 봐요.”
“다른 동생들 얘긴 툭툭 잘만 하면서 다봄 씨 얘긴 입에도 잘 안 올리더라고요.”
항상 그래 왔던 승훈을 아는 다봄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강필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그녀는 자연스럽게 해경에게 눈길을 줬다.
동시에 해경에게서 의문 같은 탄성이 터졌다. 다봄과 눈이 마주친 후부터 해경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연다봄이라고 합니다.”
애매한 정적에 다봄이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답인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도통 제 소개를 하지 않던 해경의 눈이 조금씩 풀리다 급기야 멍해졌다.
결국 다봄은 자릴 피하고자 보란 듯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편히 얘기들 나누세요.”
“왜, 왜 나가세요?”
다봄이 한 발 떼자 해경은 그제야 입을 뗐다. 이제껏 가만히 있더니 묻는 말은 또 빨랐다.
그녀는 곤란한 얼굴로 자신을 멀뚱멀뚱 보는 해경을 마주했다.
“저는 변호사가 아니거든요. 여기 있어도 별 도움 안 될 거예요.”
“다봄 씨, 굳이 자리 피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봄 씨가 편한 곳에 계세요.”
강필은 제자를 한심하게 흘겨보고는 미안하단 듯 눈썹을 내렸다.
그녀도 소란스러운 카페보단 여기가 나았지만, 그렇다고 이 회의를 듣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다봄이 어색하게 가만히 있자 하람이 끼어들었다.
“그럼 카페 말고 백건오 사무실에 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