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그는 자신을 붙잡은 다봄의 손을 끌어와 제 뺨에 올렸다. 그녀가 불에 덴 듯 화들짝 멀어졌다.
지금 다봄은 눈꺼풀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그녀와 거리가 벌어지자 건오가 느릿하게 허리를 폈다.
다봄의 눈길이 멀거니 그를 따라 올라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되짚어 봤지만, 정확히 인지할 수 없었다.
부딪친 그와 그녀의 시선이 서로에게 머물렀다.
다봄의 말간 낯에 혼란스러움이 깃들자, 눈을 깜빡이던 건오가 흐리게 웃었다.
이내 녀석의 큼지막한 그림자가 그녀에게 다시 다가섰다.
“뭘 그렇게 놀라요? 가요.”
건오는 여기까지라고 스스로 선을 그었다. 이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래야 했다.
“과일 사야죠.”
태평한 얼굴의 그를 앞에 두고서도 놀란 그녀의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다봄은 설마 싶던 찰나를 착각이라 명명하며 마트 골목으로 서둘러 꺾어 돌아섰다.
그녀는 일부러 앞만 보며 걸었다. 건오도 건오지만 별스러운 본인 반응이 제일 당황스러웠다.
다봄은 제 생각이 들키기라도 할까 봐 건오를 곁눈질하며 숨을 골랐다.
“저기 보인다. 오렌지가 있으면 좋겠는데.”
분위기가 모호해지자 다봄은 습관처럼 말머리를 돌렸다. 건오는 허둥지둥하는 그녀를 살피며 고갯짓으로만 대답했다.
대꾸가 들리지 않으니 다봄은 딴소리를 억지로 이어 나갔다. 다른 때였다면 말 없는 그를 올려다봤을 텐데, 이상하게 마주 보기가 겁이 났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소음이 달라붙었다.
그 속에서 다봄은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조금 전 상황을 잊은 건 아니지만 잊은 듯 녀석을 대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녀는 정육 코너를 지나가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고기 더 먹을래?”
“지금요?”
“응. 집에서 구워 먹자.”
다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엔 마감 세일하는 소고기 몇 팩이 진열되어 있었다.
건오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먹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녀 집에 너무 오래 있게 됐다.
“내가 가야지 누나가 자죠.”
건오는 애써 그곳을 외면하려 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을 듣고서도 다봄이 고기 세 팩을 집었다.
그녀는 하람이 남겨 놓은 문자로 건오가 오늘 저녁 한 끼밖에 먹지 않았단 걸 알고 있었다.
어린 건오가 파양되기 전 겪은 일 때문에 연년생 남매는 그의 식사에 민감했다.
“먹고 그냥 자고 가도 돼.”
다봄의 동요를 보고 싶던 건오는 정작 제가 동요하고 말았다. 다봄이 그의 움찔한 어깨를 발견했다.
“왜? 네가 불편하려나? 그러고 보니 갈아입을 옷도 없구나.”
그의 반응에 다봄도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았다. 괜히 말을 길게 하며 고기를 내려놓는데, 그가 재빠르게 가로채 카트에 도로 넣었다.
다봄이 고개를 들기도 전 건오가 정육 코너를 벗어났다. 그녀가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자고 갈 거야, 건오야?”
건오는 어딘가 경직되는 걸 느끼며 마시지도 않을 음료수를 집었다. 그가 손을 뻗는 대로 카트가 채워졌다.
다봄이 중복되는 것들을 꺼내 슬그머니 내려놨다.
“필요한 건 사서 가면 돼요.”
그녀가 물건을 꺼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서, 건오는 마치 멀쩡한 것처럼 덤덤히 고갤 끄덕였다.
“그럼 그럴래?”
다봄도 평소처럼 천연덕스럽게 목소릴 냈다.
“누나는 뭐 더 안 먹을래요?”
“네가 담은 게 너무 많은데?”
그녀가 카트를 눈짓했다.
뒤늦게 음료수, 과일, 과자로 빈틈이 없는 카트를 확인한 건오는 내심 당황하고 말았다. 제가 담았다는데 기억에 없었다.
다봄은 건오를 뒤로하고 카트를 밀었다. 그녀는 앞서 걸으며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재잘댔다. 그렇게 아직 남은 혼자만의 어색함을 덮어 두었다.
“재밌겠다. 파티 하는 것 같아. 우리 연하람도 부를까?”
그 순간 달아오르던 건오의 뺨이 차게 식었다. 다봄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왜 이럴 땐 재깍 전화를 받는지, 남매는 벌써 통화가 연결됐다.
“연하람, 퇴근했어?”
-뭐야?
“오늘 건오랑 고기 구워 먹고 우리 집에서 자기로 했는데, 너도 올래?”
이게 무슨 소린가 싶던 하람은 어느 정도 상황이 파악된 후에야 기막히단 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아직도 집에 안 들어오더라.
“한우야, 한우. 차 끌고 와. 너희 사는 아파트에서 우리 동네까지 10분이면 오잖아.”
다봄의 천진한 꼬드김에 하람은 헛웃음이 나왔다. 연다봄 옆에 서 있을 제 친구가 어떤 표정일지 절로 눈앞에 그려졌다.
-나 내일도 사무소 나가야 해서 바빠. 마침 전화 잘했어. 백건오나 바꿔 줘 봐.
하람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칼같이 거절했다.
애꿎은 핸드폰을 노려본 다봄이 건오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그가 떨떠름한 낯으로 통화를 바꿔 받았다.
“왜.”
-연다봄 집에서 자고 온다고?
“어. 너도 오든지.”
다봄이 다시 움직이자 건오가 그녀 옆을 따라 걸었다.
-됐어. 미안한데, 백건오.
진심이라곤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은 성의 없는 건오의 제안에 하람은 비웃었다.
마침 다봄이 남성 속옷 코너를 가리켰다. 그녀는 그가 부끄러울까 혼자 보라며 손짓했지만, 원체 부끄러움 따위 없는 건오는 태연히 브리프를 집어와 카트 안에 넣었다.
다봄이 카트에서 눈을 돌렸다.
-난 네가 거기서 하루가 아니라 한 달을 머물러도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장담해.
‘연다봄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 모두가 알잖아?’
건오는 하람이 생략한 말이 절로 들리는 듯했다.
욕을 삼킨 건오가 다른 진열대에 놓인 반소매 티셔츠와 양말, 면도기를 마저 집었다.
“할 말이나 해.”
건오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고서야 하람은 진짜 용건을 꺼냈다.
-내일 11시엔 사무실로 와.
다봄은 마트에서 파는 와인 하나를 들더니 건오에게 어떠냐며 흔들었다. 그는 고갤 끄덕이며 하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퇴근 전 통화를 상기한 하람은 요점만 간략히 전했다.
-형 소개로 의뢰가 들어왔는데 너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승훈 형?”
-응. 증인까지 한 번에 만나기로 했어.
“알았다.”
대화는 하람이랑 하지만 건오의 감각은 다봄만 찾아다녔다. 그는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무슨 사건인지 안 궁금해?
“형이 관련된 거야?”
-아니.
“그럼 내일 얘기해.”
-내가 무척 방해된다는 말툰데?
“잘 알아들었어. 끊는다.”
건오는 지체하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조용해진 다봄의 핸드폰 액정 위로 부재중 전화와 읽지 않은 문자 개수가 보였다. 건오가 발을 멈추고 손가락을 머뭇거렸다.
마침 계산대로 향하려던 다봄이 그를 불렀다.
“건오야.”
건오가 고개를 들었다.
“더 필요한 거 있어?”
“아뇨.”
그가 작게 답했다. 잠긴 핸드폰이 그녀에게 넘어갔다.
“그럼 이제 집에 가자.”
* * *
건오를 양껏 먹이고 나니 자정이 한참 지났다.
누군가는 벌써 쓰러져 잠들 만한 일정을 소화한 다봄은 아직도 눈이 초롱초롱했다. 그래서 그녀는 밀린 드라마 최신화를 틀었다.
“저게 재밌어요?”
“응. 중간에 하차를 못 하겠다니까. 충격의 연속이야.”
거실 바닥에 자리를 잡은 다봄이 맥주 캔을 따 건오에게 내밀었다. 순순히 맥주를 받아든 그는 고성이 오가는 TV 화면과 다봄을 번갈아 봤다.
그 순간, 방금까지 깨부수고 소리치던 장면이 갑자기 바뀌더니 주인공들이 침대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다봄은 짐짓 당황했다.
‘아니야, 지금은 안 되는데.’
성능 좋은 스피커를 통해 요란한 침 소리와 신음이 사방에서 들렸다. 적나라한 배우들의 혀가 큰 화면에 클로즈업되더니 남자와 여자가 헐벗기 시작했다.
화면 상단의 15세 문구가 19세로 바뀌었다.
다봄은 맥주 캔을 든 손 그대로 굳어 눈만 굴렸다.
하필이면 건오였다. 승훈도 아니고 하람도 아니고, 건오였다.
-더 해 줘.
-이렇게?
-으응, 더…….
더는 안 되겠다.
다봄은 맥주 캔을 내려놓고 주변을 더듬었다.
“이거 찾아요?”
소파에 기대 있던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자 그 위에 앉아 있던 건오가 리모컨을 들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봄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재생됐다.
‘난 누나 친동생이 아니에요.’
미쳤어, 연다봄.
‘잘 봐요. 내 눈, 코, 입.’
정신 차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우린 닮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어요.’
다봄이 어지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건오가 그새 더 뜨거워진 드라마를 보란 듯 힐끗거렸다.
“재밌긴 하네요.”
그 말에 다봄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그의 손에서 리모컨을 낚아채 얼른 TV를 껐다.
“참. 어디서 잘래?”
다봄은 당황이라곤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을 돌렸다. 그래봤자 붉어진 낯빛이 여전했다.
건오는 다봄이 가리킨 빈방 세 개를 눈으로 둘러보곤 턱을 까딱였다.
그가 망설이지도 않고 선택한 곳은 지금 앉아 있는 소파였다.
“여기? 바닥이 불편해서 그래?”
“사무실 소파에서 많이 자 버릇해서 여기가 편해요. 드라마 안 볼 거면 먼저 씻을게요.”
건오가 셔츠 단추를 풀더니 와이셔츠를 벗었다. 그러고는 안에 입었던 반팔까지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어딜 봐도 누나와 다르잖아요.’
끝난 줄 알았던 녀석의 음성이 또다시 울렸다.
건오가 들어간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다봄은 식탁 위 남은 와인을 털어 마셨다. 그러곤 쫓기듯 방 안 욕실로 들어갔다.
제정신이 아닌 거다. 너무 피곤해서, 그래서 잠시 회까닥한 거다.
다봄은 온 힘을 다해 혼란을 누르고 환청처럼 들리던 그의 말까지 함께 씻어 내듯 물을 맞으며 씻었다. 그런 뒤엔 제가 가진 가장 두꺼운 이불을 거실로 가져갔다.
건오가 다봄이 든 이불을 보곤 곤란하단 듯 중얼거렸다.
“더울 것 같은데.”
“너 반팔이야. 그냥 덮어.”
그렇게 말하는 다봄은 상당히 비장했다.
거실에서 재우는 것도 마음이 좋지 않은데 이렇게라도 따뜻하게 해 줘야 했다.
그러자 다음으론 건오의 젖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고갤 저으며 그 곁에 다가섰다.
“머리는 말리고 자야지.”
다봄의 손가락이 건오의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20년 넘게 그를 걱정하는 데서 나온 당연하고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채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조금씩 튀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 그녀의 손길을 받게 된 건오의 이마가 살짝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