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3/72)

03.

건오가 인상을 쓰자 눈썹을 모은 하람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연다봄 출장 끝나는 날이 오늘이던가? 네가 데리러 간다고 했지?”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어.”

“표정 관리 잘해라.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지만.”

하람이 젓가락을 들어 휘휘 젓고는 빈 도시락을 정리했다.

아홉 살 때부터 함께 살게 된 건오의 감정을 알아차린 게 중학생 때니, 늦다면 늦은 편이었다.

거슬리던 건오의 상태나 행동의 이유를 알고 난 후엔 별생각이 다 들었는데, 지금은 그저 저놈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네 것도 줄까?”

하람은 건오의 사무실에서 제 몫의 커피를 내렸다. 건오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밥 다 먹었으면 그만 나가.”

“진하게 탔다.”

축객령에도 하람은 개의치 않았다.

새카만 커피 두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 잔을 내려다보던 건오는 하루에 커피만 몇 잔을 마시며 일하는 다봄이 떠올랐다.

“커피 앞에 두고 고사 지내? 뭘 그렇게 봐?”

하람의 핀잔은 건오에게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단숨에 다봄으로 머릿속이 꽉 찬 건오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통보했다.

“난 4시 넘어 나가 볼 거니까 뒤 좀 부탁해.”

“여기 분위기 생각하면 더 빨리 나가도 돼.”

하람이 커피를 음미하며 받아치자, 그제야 건오도 커피 잔을 들었다.

하람이 미리 말한 것처럼 아주 진했다. 그는 빈속이었지만 점심을 이대로 때울 생각이었다.

“네가 지나치게 건강한 건 알고 있다만, 그래도 밥은 챙겨 먹어.”

친구를 잘 아는 하람은 건오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툭 던진 말속엔 건오의 고질적 버릇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 * *

건오가 국내선 입국장을 빠져나온 다봄을 발견하곤 훌쩍 다가갔다. 주변을 둘러보던 다봄은 캐리어가 당겨지는 느낌에 고갤 돌렸다.

“줘요.”

“벌써 왔네. 고마워.”

그는 당연하게 다봄의 캐리어를 가져갔고, 그녀는 자연스레 제 짐을 맡겼다.

“전 여기서부터 따로 갈게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다봄과 함께 출장을 다녀온 팀원들은 그녀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눈은 건오를 힐끗거리느라 바빴다.

다봄이 그들의 궁금해하는 시선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니 건오도 그저 묵례만 했다.

“가자.”

건오의 팔을 파고드는 다봄의 손길이 무척 친밀했다.

정작 그녀는 의식하지도 못한 스킨십인데 건오나 지켜보던 팀원들이 대신 흠칫했다.

그러나 다봄은 끝내 그들의 표정을 모르는 채 건오와 걸음을 옮겼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

차에 올라타자마자 다봄이 물었다.

그는 현재 시각을 확인하곤 엇비슷한 시간을 불렀다.

“여섯 시쯤에요.”

“얼마 안 됐네? 다행이다.”

다봄이 안도하자마자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뚫어지게 보는 다봄 옆에서 그는 시동을 걸었다.

다봄과 지한이 연애하던 약 2년 동안 건오와 하람은 사법연수원에 있었다.

열아홉에 대학교에 입학해 졸업하기도 전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건오와 하람은 바로 연수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건오는 다봄을 피했다. 그로선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건 고역이었고,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다.

건오는 오랜만에 그때의 인내심을 끌어모아 꾸역꾸역 전방만 주시했다. 한참 울리다 만 다봄의 핸드폰이 신경 쓰였지만 뻣뻣하게 운전만 했다.

“너 안 피곤해?”

“별걱정을. 누나는 괜찮아요?”

“나도 뭐.”

때마침 그녀 핸드폰이 또 반짝였다. 어쩌지 못한 건오의 눈길이 돌아갔다.

다봄은 액정에 뜬 문자를 확인하더니 무릎 위 가방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차창 밖을 보며 한숨을 참았다.

“저녁 뭐 먹을까요?”

건오는 다봄의 기류가 변한 걸 예민하게 느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러나 기다려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누나.”

건오는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던 다봄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응, 뭐라고?”

그녀가 되묻자 기어이 그의 표정이 굳었다. 입매가 비틀어지려 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건오는 다봄 곁에서만큼은 멀쩡해야 했다.

“저녁이요.”

그가 짧게 답했다.

“저녁. 그래. 저녁은…….”

“…….”

“너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그녀는 다정했지만 건오는 심사가 뒤틀렸다.

그들은 동네에 다다를 때까지 말이 없었다. 다봄은 핸드폰을 자꾸 확인하느라 대화가 없는 줄도 몰랐다.

어느새 다봄이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누나.”

다봄은 퍼뜩 놀랐다. 익숙한 경비원이 그에게 신분증을 요구하고 있었다. 등록되지 않은 차량이 들어와서 확인하는 중이었다.

“아, 미안해. 여기요.”

다봄이 집 주소가 적힌 주민등록증을 건넸다. 서둘러 정신을 차린 그녀가 돌아오는 길을 떠올려 봤지만 생각나는 거라곤 침묵뿐이었다.

마치 오늘 건오를 기사처럼 부려 먹은 기분이었다.

“차량 등록해 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다봄은 건오의 눈치를 봤다.

특별히 잘못이라고 부를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녀석의 서늘한 인상이 두드러졌다.

“고마워, 건오야.”

건오가 시동을 끄자마자 다봄이 냉큼 말했다.

그녀 시선을 애써 무시하던 건오의 기세가 형편없이 꺾였다.

그의 눈매가 풀어진 것도, 입매가 느슨해진 것도 아니지만 다봄은 본능적으로 달라진 녀석의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짐만 갖다 놓고 밥 먹으러 가요.”

건오가 그녀의 캐리어를 챙기며 지하 현관을 가리켰다.

다봄은 제가 끌겠다 했지만 그는 다시 한번 입구를 턱짓할 뿐이었다.

“여기로 이사하고선 한 번도 안 와 봤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다봄이 47층을 눌렀다. 이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네.”

“진작 이사 올걸 그랬어. 회사랑 엄청 가까워.”

“앞집은 없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47층엔 문이 하나뿐이었다.

다봄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녀의 익살스러운 손짓에 그는 집주인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 42층부터 47층은 층마다 집이 하나야.”

건오를 뒤따라 들어온 다봄은 가장 먼저 창문을 열었다.

환기는 필요했지만, 정기적으로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 덕에 내부 상태는 매우 깨끗했다. 그녀가 자신 있게 건오부터 집으로 들인 이유였다.

“여기예요?”

건오가 제일 안쪽 큰 방을 가리켰다.

층 전체를 쓰는지라 웬만한 가정집 두 채는 합쳐 놓은 크기더라도 그는 다봄의 공간을 한 번에 찾아냈다. 그녀 냄새가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이었다.

“어어. 근데 거기 햇빛이 너무 들어.”

다봄은 아무 위화감 없이 제 사적인 공간을 보여 줬다. 지금은 햇빛 대신 야경이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고기 사 줄게, 건오야. 고기 먹으러 가자!”

캐리어를 대충 던져 놓은 다봄은 건오를 재촉했다. 집 구경할 시간은 주지 않았다.

그녀는 뒤늦게 건오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너 배고프겠다.”

“차 가져가요?”

“아니. 회사 뒤에 있는 식당이라 금방이야.”

다봄이 그를 끌고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한데 건오가 그녀를 막아 세우곤 고개를 내렸다.

“슬리퍼 말고 운동화 신어요.”

“에이, 괜찮아. 안 추워.”

“안 돼요. 1월이에요.”

이럴 때의 그는 참 단호했다. 더 말해 봤자 소용없는 걸 아는 다봄은 구시렁거리면서도 신발을 바꿔 신었다.

다봄의 조용한 신발 소리와 건오의 딱딱한 구두 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바뀌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보던 다봄이 고개를 돌려 건오를 바라봤다.

“왜요?”

“으응. 아냐.”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다 해도 역시 하람과 건오는 달랐다.

다봄은 옆에 선 건오를 하람으로 바꿔 상상해 봤다. 애초에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연하람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누나를 데리러 공항에 올 리도 없거니와, 그놈은 이 시간까지 허기를 참고 기다려 줄 애가 아니었다.

“구두 안 불편해?”

그 생각을 하니 더욱 미안해진 다봄은 건오의 옷차림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그는 아직 넥타이까지 맨 상태였다. 저 신발만이라도 바꿔 주고 싶었지만 다봄의 집엔 여성용밖에 없었다.

“익숙해서 괜찮아요.”

“집에 남자 게 없어서 뭘 빌려주지도 못하겠네.”

“다행이에요.”

“뭐가?”

“그냥.”

건오의 싱거운 대답을 따라 다봄도 싱겁게 키득 웃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늘봄> 본사와 다봄의 집 사이의 거리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회사 근처를 속속들이 아는 그녀는 제가 아는 맛있는 식당에서 건오를 마음껏 먹였다.

“벌써 다 먹었어요?”

정작 건오는 다봄을 더 먹이려다 거절당했다.

느리게 먹는 그녀를 알기에 더 시키고 싶었건만, 다봄이 마지막 고기를 씹으며 손을 내젓자 그로서도 어쩔 수 없이 집게를 내려놨다.

대신 다봄은 고기를 삼키자마자 건오는 다른 걸 제안했다.

“그럼 과일이라도 사 가요.”

“왜? 내가 덜 먹은 것 같아?”

“네. 근처에 마트 있죠?”

건오가 일어서 카운터로 향하자, 다봄이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고 후다닥 따라 일어섰다.

운동화 밑창이 끌리는 소리가 다급하게 났다.

“너 또 계산하려고 그랬지?”

승자는 다봄이었다.

카운터 직원에게 무사히 카드를 건넨 다봄이 지갑을 도로 넣는 건오를 보며 미간을 모았다.

“너 왜 자꾸 돈을 쓰려고 해? 얼마 전엔 엄마한테 통장도 드렸다며.”

“이제까지 키워 주셨잖아요.”

그는 식당 문을 밀어 젖히고 그녀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다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먼저 문을 나섰다.

“그게 언제 적 얘기야?”

가로등 불빛이 다봄과 건오를 비췄다. 뚱한 그녀 낯이 자세히 보였다.

건오는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에게 어떤 것도 받지 않으려 했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차를 산 뒤론 운전을 대신했고, 얼마 전까지 밥값도 내지 못했다. 거기다 엄마에게 통장까지 드렸단 얘길 전해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나마 커피나 고기라도 사 줄 수 있는 지금이 나아진 정도였다.

“누나야말로 계속 날 애 취급하는 건 아니고?”

건오는 불편한 속내를 완곡히 표현했다.

다봄이 한숨처럼 말했다.

“애 취급이 아니라,”

그녀는 이제껏 제가 받은 걸 갚아 나가려는 건오의 행동에 서운했다.

“네가 우릴 남처럼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하람과는 다르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에게 건오는 동생이고 가족이었다. 진서도 처음부터 그를 다봄의 가족으로 인지했다.

그게 건오에 대한 그들의 정의였다.

“누나.”

건오가 단지 내 마트 쪽으로 걷던 걸음을 멈췄다. 그는 눈썹을 매만지며 복잡한 속내를 눌렀다.

다봄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는 건오도 잘 안다. 알면서도 그 마음이 마냥 기쁘진 않다.

“난 누나 친동생이 아니에요.”

그는 꽉 눌린 음성으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남이 아니라는 다봄에게 건오는 남이란 사실을 일깨웠다.

“하지만.”

“친동생과 다름없는 동생이라고 하려고요?”

반박하려던 다봄의 눈썹 끝이 내려갔다.

그녀는 건오의 이런 반응이 자신 때문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갑자기 웬 사춘기 같은 소린가 싶어 당황스럽기만 할 뿐이다.

“에이, 연하람을 어디다 비교해.”

건오의 손목을 잡은 다봄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가로등 불빛을 벗어난 그가 그녀를 집요하게 내려다봤다.

마주한 그의 시선이 너무 깊어, 다봄은 무심코 그를 피할 뻔했다. 그런데 그전에 건오가 허릴 숙였다.

“잘 봐요. 내 눈, 코, 입.”

하람이 다봄을 이름으로 부르기에, 건오는 꼬박꼬박 누나라 불렀다.

하람이 다봄에게 말을 놓아서, 건오는 언제나 높임말을 썼다.

그는 그녀에게 연하람과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다.

“우린 닮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어요.”

그의 이마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 다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건오야.”

“어딜 봐도 누나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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