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건오와 다봄은 아무도 없는 집을 나섰다. 아침까지 내린 눈으로 세상이 새하얬다.
“미끄럽다. 조심해, 건오야.”
저를 따라 미사를 빠지겠다는 건오에게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던 그녀는 기어이 성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여느 때보다 느린 다봄의 보폭에 맞춰 걷던 건오가 문득 정적을 깼다.
“제주도에서 언제 와요?”
“수요일.”
대답하는 다봄의 입술 사이로 입김이 퍼졌다. 오늘따라 집에서 10분 거리 성당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데리러 가도 돼요?”
“응?”
건오 스스로 생각해도 뜬금없긴 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목도리를 고쳐 주었다. 다봄은 가만히 물었다.
“너 안 바빠?”
“다음 주는 중요한 일 없어요. 올해는 수임도 줄일 거고.”
“연하람 없이 너만 온다고?”
“네.”
“왜?”
그녀의 질문에 건오는 딱히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그럴듯한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보고 싶다는 것 외엔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시간이 남아서?”
“정말?”
건오는 다봄에게만 보이는 착한 미소를 입술에 걸쳤다. 꼭 그게 대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입매를 유지하고 있으니, 다봄이 재차 확인했다.
“진짜 온다고? 나 회사 사람들이랑 택시 타면 돼.”
“그 사람들끼리 타라고 해요. 직원들도 상사 있으면 불편할걸.”
그게 또 맞는 말이라 다봄은 입을 다물었다. 갈 때부터 올 때까지 함께 움직이기로 하긴 했다만, 사실 그녀도 팀원들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다봄이 대꾸가 없자 건오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럼 데리러 가는 걸로 알게요. 잊지 마요.”
“음, 그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봄은 건오의 의도를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 * *
미사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미리 고해성사를 마친 다봄은 건오 옆으로 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그는 그저 그런 다봄만 조용히 바라보았다.
미사 시작 전, 그녀가 속삭여 물었다.
“너는 고해성사 안 봐?”
건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 죄가 많아서, 나중에 할게요.”
다봄은 뭐야, 하면서 웃고는 신부님 입장 전 성호를 그었다.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날은 물론, 입양 후 양부모란 인간들이 성당에 끌고 갈 적에도 그에게 신앙 따윈 없었다.
그러나 어린 건오가 다봄을 처음 만난 순간, 아이는 신은 없어도 천사는 존재하는 줄 알았다.
‘저기, 초콜릿 먹을래?’
건오는 아직도 그날의 다봄이 선명했다.
* * *
다봄은 오랜만에 온 만큼 집중해 미사를 보았고, 건오는 열심히 다봄을 지켜봤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내리감은 그녀의 눈꺼풀을.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면 다봄은 배시시 웃었다. 그럴 때마다 건오는 모은 두 손에 힘을 줬다.
약 50분에 걸친 미사가 끝나고 저녁까지 함께 먹은 그들은 다시 고즈넉한 주택 단지를 가로질렀다.
그 길을 따라 외진 곳으로 걷다 보면 2층 주택이 나온다.
주택의 높은 담장 아래를 지나 막 마당에 들어선 다봄은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후회하고 있었다.
“차 가지고 다녀올 걸 그랬나?”
“어머니께 혼나려고요?”
“네가 그러겠다고 하면 뭐라고 안 하실 거야.”
“꼬드기는 거예요?”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던 그들과 담배를 물고 나온 승훈이 마주쳤다. 승훈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내리고 다봄과 건오를 번갈아 응시했다.
“미사?”
“응.”
“저녁은.”
“건오랑 먹었지.”
건조하게 물어본 승훈이 턱짓으로 집 안을 가리켰다.
“추워. 들어가.”
“오빠도 하나만 피우고 들어와.”
슬쩍 잔소리를 던진 다봄이 먼저 현관으로 들어섰다.
건오도 그녀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진서랑 어머니가 또 쟤 소개팅 얘기하던데.”
승훈이 담배를 도로 들어 올리며 건오에게 언질을 줬다.
마침 안에서 진서와 선하의 호들갑스러운 닦달이 들렸다. 선하는 작년부터 딸의 연애와 결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건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저도 들어가 볼게요.”
문이 급하게 닫혔다. 담배를 문 승훈이 라이터를 달칵거리며 다봄과 건오가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건오는 문을 닫고도 자신의 뒤통수에 승훈의 시선이 닿는 듯했지만, 그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누구요? 누구한테 번호를 줬다고요?”
건오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질겁한 다봄의 외침이 2층 쪽에서 들렸다. 그는 모든 동작을 멈췄다.
큰 소리에 1층 거실에서 과일을 먹던 주혁이 고개를 들었고, 그 옆 소파에 누워 있던 하람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든 그러려니, 무심하게,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는 다봄이 이렇게 목소릴 높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모녀 가운데 낀 진서도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그걸 왜 엄마 멋대로……!”
화가 난 다봄을 마주한 선하는 핸드폰을 쥔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승훈의 후배가 다봄에게 관심을 보인단 며느리 말에 별생각 없이 바로 번호를 주라고 했다가 이 사달이 났다.
“아니, 다봄이 너도 서지한 선수 알잖아. 진서가 그러는데 잘생기고 인성도 괜찮대. 막 국대도 은퇴했다니 잘됐다 싶었지.”
“제가 소개팅 같은 거 안 한다고 했잖아요.”
“번호 정도야 뭐 어떠니…….”
선하가 말을 늘어트렸다. 그녀는 제 딸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래층에선 하람과 주혁이 올라가 봐야 하는 건 아닌지 눈길을 주고받았다. 선하만큼이나 그들 역시 다봄의 모습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때 다봄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액정 위에 뜬 11자리 번호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쨌든 알겠어요. 저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올게요.”
다봄은 계속되는 벨 소리를 무음으로 돌리고 수신을 거부했다.
“지금?”
“다봄아.”
선하와 진서가 차례로 그녀를 불렀지만, 다봄은 지체하지 않고 자릴 벗어났다.
주혁과 하람, 그리고 여전히 현관 앞에 우뚝 서 있던 건오의 눈길이 1층으로 내려오는 그녀를 좇았다.
다봄의 핸드폰이 다시 반짝거리던 때, 그녀가 현관에 선 건오를 스쳐 지나갔다. 큰 소리를 내며 문이 여닫혔다.
“아예 나갈 모양인데?”
어느새 창가에 선 하람이 커튼을 젖혔다.
선하와 진서도 다봄을 따라 다급히 내려왔지만, 그녀는 벌써 차에 올라타곤 대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머리를 쓸어넘긴 건오가 다봄이 사라진 곳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 * *
무작정 집을 나온 다봄은 근처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조수석에 던져 놓은 핸드폰이 몇 번째 울리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숫자들을 보자마자 잊은 줄 알았던 번호가 떠올라 버렸다.
어쩌자고 기억하고 있는지.
다봄이 핸들에 이마를 갖다 댔다.
“나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자조 섞인 한탄과 함께 벨 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다봄은 몇 번을 망설이다 통화를 연결했다.
“…….”
-……연다봄?
먼저 걸어놓고는 막상 받을 줄은 몰랐던지, 상대방 음성이 떨렸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녀의 어딘가도 떨렸다.
다봄은 차마 가다듬지 못한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응, 나야.”
-진짜구나. 진짜 봄이구나.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헤어진 첫사랑이 뭐라고 손바닥에 땀까지 찼다.
다봄은 술렁이는 마음이 들킬까, 섣불리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상대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잘 지냈어?
“응, 오빠는?”
-나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 호칭에 다봄도 놀라고 상대방도 놀랐다. 아차 싶었지만 한발 늦은 후회였다.
감추고 싶었던 서로의 긴장감이 핸드폰 너머로 전해졌다. 다봄은 손을 연신 쥐었다 폈다.
“진서 언니한테 뭘 어떻게 한 거야?”
-네가 궁금해서. 그래서,
“그래서. 처음 보는 척 소개해 달라 했어?”
-보고 싶었거든.
그는 그 말만큼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다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몰아붙이려던 그녀의 기세가 뚝 끊어졌다.
다봄의 동요를 눈치챈 상대는 어떻게든 기회를 잡고 싶은지 바로 물었다.
-얼굴 한번 볼래, 봄아?
남자의 목소리가 점차 잠겨 들었다.
다봄이 차창을 열었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밀어냈다.
“싫어. 봐 봤자 뭐가 좋다고.”
-네 사진 보는데 우리 만나던 때랑 변한 게 없더라.
그럼에도 남자는 굴하지 않았다. 당연하게 ‘우리’라 칭하며 과거를 얘기했다.
그럴수록 다봄의 모든 세포가 그를 기억해 냈다. 고작 1분 남짓한 통화였는데도 말이다.
“난 아냐. 언제 어디서 오빠 소식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아.”
-봄아, 난…….
“이런 연락 불편해. 끊을게.”
피해 버렸다. 매정하게 대한 것치고 그녀의 시선은 한동안 핸드폰에만 머물렀다.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다가는, 눈 한 번 깜빡이면 이 남자 앞에 서 있을 것 같았다.
“미쳤어.”
무려 5년 만에 들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뒤늦게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쓸데없는 그리움까지 몰려왔다.
그날 다봄은 밤늦게 집에 돌아갔다. 가족들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녀를 맞이했다.
* * *
설 연휴가 지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온 가족들이 각자의 삶으로 복귀한 지 며칠이 지났다.
건오 탓에 일월 법률사무소의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그의 사무실이 더욱 칙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웃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 눈 좀 어떻게 하면 안 되겠냐?”
단체 주문한 도시락을 들고 건오의 사무실로 들어선 하람이 블라인드를 올렸다. 조명에만 의지해 생활하던 공간에 드디어 채광이 들어찼다.
“시끄럽게 할 거면 그냥 꺼져.”
건오는 가족들 앞에서와 사뭇 다른 모습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피곤함이 가득한 친구의 꼴에 혀를 찬 하람이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하람의 도시락이 비워질 때까지 건오는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
얼마 전, 혼란스러운 얼굴로 집을 나가던 다봄의 모습이 잊히질 않는 탓에 그는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걔들 헤어진 게 5년 전이다, 5년. 설마 다시 만나겠어?”
하람의 무신경한 발언이 끝나기도 전에 건오는 낮게 욕설을 짓씹었다.
이중적인 건오의 모습에 익숙한 하람은 차라리 이편이 편했다.
“근데 형수님까지 통해서 연락한 걸 보니 작정한 것 같기도 하고.”
곧장 건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는 하람을 노려봤다.
과거 스물넷부터 스물다섯까지의 다봄은 유난히 밝았고 에너지가 가득했다. 모든 행동과 표정에 사랑스러움이 가득해 누구라도 ‘연애하고 있구나.’, ‘사랑하고 있구나.’ 짐작할 정도였다.
그 변화는 보통 제삼자가 가장 빠르게 알아차렸다. 다봄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연애를 눈치채고 있었다.
“광고 봤어? 걘 늙지도 않는지 그대로더라.”
하지만 그 상대가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 서지한인 걸 알고 있는 이들은 건오와 하람밖에 없었다.
지한의 직속 선배인 승훈조차 몰랐고, 당사자인 다봄도 건오와 하람에게 들킨 걸 모르고 있었다.
그들도 지난날, 룸 식당에서 연예부 기자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사실이었다. 그때 건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을 제대로 맛봤다.
다행히 <수영 금메달리스트 서지한, A 커피 전문점 대표 자녀와 열애 중>이란 기사는 지한 쪽에서 막아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하긴, 넌 TV도 안 봐서 모르겠다.”
“…….”
“궁금하면 보여 줄까?”
“됐어.”
건오도 서지한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때는 이렇게 생긴 눈코입이 연다봄 취향인가 싶어 잊을 만하면 들여다봤다.
그 얼굴이 생각나자마자 건오의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