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타오위안 국제공항.
깔끔한 내부로 들어선 한국인 여섯 명이 캐리어를 부치고 출국장 앞에 섰다. 한 사람만 빼고 모두 모자를 눌러쓴 채였다.
“저도 부대표님처럼 연차 낼 걸 그랬어요.”
“맞아요. 질리게 오면서도 막상 돌아가려면 아쉽다니까요.”
“어제 그 야시장을 갔어야 했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이 미적거리자 혼자 모자를 쓰지 않은 여자가 씩 웃었다.
“여러분들을 대신해 제가 3일만 더 쉬다 갈게요.”
“네에. 부디 실컷 놀다 오세요.”
출장에 맞춰 휴가를 낸 다봄은 함께 온 팀원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그녀는 이곳 대만에서 3일 더 머무르다 갈 계획이었다.
배웅을 마친 다봄이 공항을 누비며 익숙하게 한 식당 앞을 찾아가 줄을 서니 막 도착한 사람과 떠날 사람이 한데 섞여 모두 같은 메뉴를 먹고 있었다.
그녀도 복잡한 인파 속에서 겨우 주문을 마쳤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우육면이 빠르게 나왔다. 젓가락 대신 핸드폰을 든 그녀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시 10분.
그가 타고 온다던 한국발 항공편이 도착하기까진 20분 정도 남았다. 한 그릇 비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봄이 출장을 마친 곳에서 며칠 더 머무르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팀원들을 배웅한다거나, 일정 중간에 굳이 공항에 와 끼니를 때우는 일은 없었다.
“괜히 여기까지 왔나.”
다봄은 불퉁하니 중얼거리며 면을 집어 올렸다. 긴 젓가락이 입술에 닿기 전이었다.
「괜찮습니다. 일행이 있습니다.」
짧은 중국어에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각국에서 모인 인파가 섞여 시끄러운 와중에도 다봄이 그의 음성을 그냥 흘려보낼 리 없었다.
「같은 걸로 주세요.」
녀석이, 정말 이곳에 왔다.
“나 기다리는 거 아니었어요?”
“응?”
다봄은 멍청하게 되물으며 제 앞에 앉는 녀석을 응시했다.
다봄을 문자 하나로 불러낸 남자.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낯설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봄은 눈앞의 남자가 어색했다.
“공항까지 마중 나와 놓고 왜 먼저 먹어요?”
남자는 놀란 그녀를 보고서도 태연히 제 몫의 식기를 가지런히 놓았다.
다봄은 재차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알려 주었던 도착 예정 시간까진 아직 남아 있었다.
“마침 자리가 났길래 공항에서 표 바꿨어요.”
그녀의 의아함을 풀어주며 남자는 물잔을 채웠다. 당황한 다봄과 달리 그의 모습은 참 정갈하고 담담했다.
다봄은 녀석이 얼마나 공항에 일찍 간 건지, 왜 그런 쓸데없는 소비를 했는지까진 묻지 않았다.
직접 공항까지 왔으면서도, 그가 대만까지 온 이 상황이 겁날 뿐이었다.
“건오야, 너 여기…….”
“누나 보러 왔죠.”
“진짜 오면 어떡해.”
다봄의 미간이 바짝 모였다.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다.
그녀의 찡그린 표정과 탓하는 말투에도 건오는 개의치 않았다.
“누나가 날 피하는데 내가 제정신이겠어요?”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위험해 보여 다봄은 말문이 막혔다. 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빛에 숨도 막힐 지경이었다.
다봄을 뜯어보듯 응시하던 그의 눈길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짓이겨진 다봄의 입술을 보며 건오는 마치 지금, 4월의 하늘이 맑다는 얘길 하듯 잠잠히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고백도 제대로 못 했더라고요.”
선전포고였다.
“나 그거 하려고 왔어요.”
* * *
건오가 대만에 가기까지 약 석 달 전.
TV에 제야의 종을 치는 모습이 비쳤다. 이윽고 뎅 뎅, 종소리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환호가 전파를 탔다.
다봄은 정신없는 화면을 얼마간 응시하다 도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만 보는 거실 TV 옆엔 아직 치우지 않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반짝였다.
거실과 이어진 주방에선 엄마와 아빠, 오빠와 새언니, 그리고 남동생까지 으레 그랬듯 와인을 마시며 밀린 회포를 푸는 중이었다.
다봄도 방금까지 그 가운데 앉아 있었다.
“연다봄, 네 거 다 마신다?”
“그래, 봄아. 얼른 와.”
“아니야. 먼저 마셔.”
그녀는 서른이 되어도 버릇없는 남동생과 다정한 새언니의 부름을 마다하고 거실 통유리에 붙어 자꾸 밖을 내다보았다.
부러 켜 놓은 전등 몇 개가 새카만 정원을 조금이나마 밝히고 있었다.
“네가 거기 서 있다고 그놈이 짠 나타나냐?”
“어두운데 운전하니까 걱정되잖아.”
“친동생인 나도 그렇게 걱정해 주지 그래?”
“넌 건오랑 같이 일하면서 혼자 오냐? 같이 퇴근하자고 했어야지. 건오 융통성 없는 거 알면서.”
연년생 남동생, 하람의 비꼬는 말을 못 들은 척한 다봄은 도리어 그를 나무라며 맞받아쳤다.
하람이 황당해하며 투덜거렸다.
“전 억울해요, 형수님.”
진서가 애매하게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봄은 어수선한 식탁에서 고개를 돌렸다.
하람의 말처럼 그녀는 아직 오지 않은 가족, 건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 전엔 도착할 줄 알았는데 늦어도 너무 늦었다. 설상가상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다봄이 걱정스레 자꾸 창가를 서성이길 한참. 드디어 대문이 열리고 검은색 세단이 들어섰다.
“건오 온 거야?”
“응, 엄마.”
“다행이네. 더 늦었으면 눈 쌓였을 뻔했다.”
엄마, 선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봄은 직접 현관을 열고 나섰다.
진서는 슬리퍼를 신고 쫓아 나간 다봄의 뒷모습을 신기하게 보았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건오, 이 집에서 되게 사랑받고 큰 거 같아요.”
“연다봄이 제일 유난이에요. 어릴 때부터 피 섞인 나랑 형보다 쟤만 싸고돌았다니까요. 저렇게.”
“하람인 친구한테 질투했겠네.”
“질투는 무슨.”
하람이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엄마와 아빠, 형 승훈까지 동시에 막내를 비웃었다.
* * *
집 안에서 하람이 빨개진 얼굴로 항변하고 있을 때, 다봄은 막 차고에서 나오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왜 나왔어요?”
동시에 나온 물음에 다봄이 웃었지만, 건오는 웃지 않았다.
다봄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그는 내리는 눈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급히 그녀 머리 위로 손을 폈다.
“네가 늦어서 그래.”
“기다렸어요?”
“그럼. 다들 너만 기다렸어.”
그중에서도 다봄이 제일 기다렸을 거라는 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시간 전까지 일하다 온 건오는 여전히 슈트 차림에 잘 정돈된 머리를 한 채였다.
미약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다봄 옆에 바짝 선 그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 서둘렀다.
“추워요. 들어가요.”
“그래.”
“다들 취했어요?”
“조금씩?”
“누나도?”
“난 아직.”
“잘됐네요.”
막 현관문을 열던 다봄이 그를 돌아봤다.
씩 입꼬리를 올린 건오가 새카만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나가 같이 마셔 줄 거죠?”
“네가 원한다면.”
다봄은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 * *
새벽까지 건오와 함께 와인을 마신 다봄은 보란 듯이 늦잠을 잤다.
그런 다봄과 그녀 곁에 남은 건오를 제외한 가족들은 1월 1일을 맞아 성당에 갔고, 성당에서 떡국을 먹고 온다 연락 온 덕에 그녀는 느지막이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다봄은 건오가 아침 겸 점심으로 내온 떡국을 먹으며 태블릿만 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건오는 다봄이 먹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자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아, 미안.”
다봄이 머쓱하게 웃으며 물컵에 손을 뻗었다. 건오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바빠요?”
“새해부터 일이 좀 복잡하게 돼서.”
정초부터 날아든 연락에 속이 타던 다봄이 마른입을 축였다.
“무슨 일인데요?”
“이번 해 모델로 계약하려고 했던 배우가 음주운전을 했다네. 지금 경찰 조사받고 있다고 난리야. 도장 찍은 거 무르고 새 모델 뽑아야 하는데, 나는 당장 제주 출장이 잡혀 있어서.”
다봄이 한숨을 내쉬고는 물컵을 내려놨다. 액정이 잠기며 그녀가 보던 태블릿 화면에서 벚꽃 로고가 사라졌다.
어느새 커피를 내린 건오가 그녀 앞으로 잔을 밀어줬다.
“아버지는 뭐라고 하세요?”
“봄 시즌 시작 전까지 잘 해결하자고. 얼른 대체할 모델 찾으라는 소리지.”
세 남매의 아버지 주혁은 국내만 700호점에 달하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늘봄>의 대표다.
그리고 다봄은 대학생 때부터 <늘봄>에서 일을 배웠다.
주혁은 제 딸이 입사한 후부터 항상 인수인계하듯 다봄을 가르쳤고, 그녀도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혁이 낸 과제를 완수하듯 일했다.
현재 4호점까지 오픈한 중국과 곧 1호점 오픈을 앞둔 대만에서의 브랜드 관리 역시 온전히 다봄의 몫이었다.
“촬영 전이라 그렇게 큰일은 아니야. 귀찮은 일이라 그렇지.”
잠깐 건오 앞에서 푸념한 다봄은 징징거리던 말을 수습하고 화제를 돌렸다.
“참. 건오야, 우리 이따 저녁 미사 가는 거 말인데, 내가 그때 바쁠 것 같아.”
“그래요?”
“응. 그러니까 난 다음에 갈게.”
건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 온도처럼 그는 미지근하게 반응했다.
“어머니 몰래 카페 가서 시간 때우려고요?”
“…….”
건오는 그녀를 너무 잘 알았다.
정곡을 찔린 다봄은 우물쭈물 물었다.
“엄마한테 이를 거야?”
그가 예상한 대로 저녁 미사는 자체 생략하고 카페에 갈 계획이었던 다봄은 그의 눈치를 보았다.
미사 땡땡이치던 모습을 건오에게만 몇 번이나 들켰던 게 화근이었다.
“저도 같이 가요.”
그런데 건오가 다봄의 예상과는 딴판인 제안을 했다. 그녀가 이마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어딜?”
“누나 가려는 곳이요. 카페든 어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