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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41)화 (141/141)

141화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리비엘의 악행이 고스란히 기록된 증거들은 모두 하나의 문서가 되어 수도 곳곳에 공고로 붙었고, 모든 진실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리비엘이 케르페온과 작당해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고 사람들을 선동한 것 또한 드러났다.

덕분에 바스토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으나, 테시우스가 선뜻 그의 일을 분담해 맡았다.

그사이 제국에 퍼진 전염병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클리프가 대신 공급한 백신 덕에 약간의 우두 증세만 보이고 천연두를 피해 갈 수 있던 것이다.

증상이 심각하던 수도의 사람들은 아드넬 만든 약들 덕분에 상태가 호전되어 대부분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흉터 치료제를 쓰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게 리비엘이 처형당한 지 일주일째가 되던 날, 황제 케르시우스의 장례식과 황태자 바스토르의 즉위식이 동시에 열렸다.

아무리 그래도 날을 달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바스토르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지금 같은 때에 고통받는 제국민의 고혈로 채워진 국고를 낭비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장례는 조용하게, 알라니아를 비롯한 황실 일원의 참석만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그건 즉위식도 비슷했다.

성문을 개방한 본성 앞은 즉위식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빼곡했다.

그들이 바스토르의 등장을 기대하며 고개를 치켜든 채 올려다보던 그때였다.

“바스토르 폰 아이테라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어디선가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조용히 가라앉은 순간 본성의 연회홀과 이어지는 거대한 문이 열렸다.

당연히 알현실이 있는 3층에서 나타날 줄 알았는데 바스토르는 모두가 편하고 또 가까이서 볼 수 있는 1층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새하얀 예복 위로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붉은 털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오른손엔 주먹만 한 루비가 박힌 왕홀이 있었다.

사실 겉모습만 보자면 두 공녀의 축하 연회와 그리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의 머리 위엔 황제의 관이 씌워져 있었다.

백금과 황금을 녹여 만든 관에 온갖 진귀한 보석들로 장식한 황제의 관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호화로웠으며, 황제의 권위를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더는 황제 대리가 아닌 진정한 황제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모든 제국민은 들으라!”

그때 바스토르가 장내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단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나 좌중을 압도하는 음성은 태어나길 황제로 태어난 듯 위엄이 흘러넘쳤다.

“그동안 제국에 찾아온 불행이 그들에게 어떠한 고통을 안겨 주었는지 나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악행의 주범은 죄인 리비엘이 마녀 세레나와 손을 잡고 벌인 일이었다! 하나 그가 제 입으로 밝혔듯, 본디 마녀는 사특한 존재가 아니다. 또한 과거 황실이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 또한 사실이다.”

바스토르는 리비엘이 밝힌 과거의 역사를 인정하며 덧붙였다.

“이에 나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다! 더는 마녀를 억압하지 않을 것이며, 마녀의 피를 이어받은 자라면 누구든 나를 찾아오라! 먼 선조들이 받은 탄압과 현재의 그들이 받은 고통까지 보상할 것이다, 또한!”

바스토르의 보랏빛 눈동자가 다시 한번 사람들을 둘러보며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사악한 마녀가 퍼트린 전염병으로 고통받은 이들 모두! 완전히 치유될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에 비할 바는 못 되겠으나 최선을 다해 보상할 것이다! 누구든 무상으로 약을 받을 수 있고, 곯은 배를 채울 수 있으며, 편히 잠잘 곳과 더 나아가 완전히 회복되면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자리까지도 마련해 줄 것이다! 이는 나, 황제 바스토르 폰 아이테라의 이름으로 공표하는 바이다!”

크게 울려 퍼지는 음성에 사람들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고통받았던 만큼 보상과 지원이 절박한 이들도 차고 넘치게 많았다.

한데 황실에서, 황제가 책임지고 치료는 물론 의식주와 일자리까지 해결해 준다니!

이것만큼 반가운 소식이 없었다.

“아울러 혼란스러운 중에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선동하고 헛소문을 퍼트린 하르트 공작을 비롯한 잔당은 엄히 처벌할 것이며, 죄인 리비엘이 수많은 악행을 저지름에도 방관하던 라이칸 가문은 작위와 영지를 회수할 것이다! 그리고!”

바스토르는 잠시 숨을 돌리곤 입을 열었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로드게리온 프리테의 가문과 작위, 영지를 비롯한 모든 자격을 복권한다!”

아드넬의 어머니, 아드리아나의 평생을 따라다니던 ‘반역자의 딸’이라는 꼬리표 또한 사라진다는 얘기였다.

바스토르는 무덤도 비석도 없이 한데 모여 묻힌 시신들 또한 다시 수습하여 비를 세울 것이라 덧붙였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원한을 온전히 달래줄 순 없겠지만 마침내 편히 잠들 수는 있겠지.

‘아드리아나, 당신이 이곳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바스토르의 뒤에 서 있던 호르세는 문득 기뻐하는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상상했다.

웃을 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그녀의 얼굴이 오늘따라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바스토르는 목을 가다듬고는 한 명 한 명에게 눈을 맞추듯 수많은 얼굴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대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바이다. 누구보다 완벽해야 할 지도자의 부족함으로 무고한 제국민이 고통받았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여 나는 보다 완벽해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그대들에게 안온함과 평화를 안겨 줄 것이다! 더 이상 불행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 황제 바스토르가 제국을 그리 만들 것이다!”

그 쩌렁쩌렁한 음성에 답하듯, 머지않아 곳곳에서 환호와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만세!”

“제국의 하늘을 빛내는 태양께 영광을!”

“엔하시아 제국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모두가 그의 즉위를 환영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제야 바스토르의 입가 위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엄숙하고 진지한 아버지의 즉위식과는 다르지만 제국민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황제로 인정받는, 진정한 즉위식을 치른 것 같았다.

바스토르는 이후로도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연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의 기쁨까지도 온전히 함께하며.

* * *

그로부터 한 달 뒤, 율리시아의 침실을 나선 아드넬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테시우스였다.

“2황자 전하.”

“이런, 이젠 대공 전하라 불러야지.”

“아차, 입에 배어서…….”

“둘이 있을 땐 테시우스라고 하고.”

한 달 새에 한층 더 능글맞아진 그는 아드넬의 손에 깍지를 끼며 웃어 보였다.

즉위식이 끝나고 바스토르는 테시우스에게 대공 작위와 함께 새로이 이끌어 나갈 영지를 내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황성에 남아 있는 이유는 아드넬이 율리시아의 치료가 끝나기 전까진 머물고 싶다고 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였지? 딱히 접점도 없던 것 같은데.’

바스토르는 케르페온 공작을 엄히 처벌할 것이라 공표했으나 그 딸인 율리시아를 황후로 선택했다.

듣기로는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들러 얼굴을 보고 간다는데.

테시우스가 궁금하다는 듯 내려보며 물었다.

“공녀는 좀 괜찮은가?”

“네, 많이 나아지셨어요. 그래도 흉터 치료제는 계속 사용해야 하니까……. 가기 전에 화장품을 만들어 드리고 가려고요.”

화장품은 누군가의 얼굴을 아름답게 가꿔 주기도 하지만 때론 누군가의 콤플렉스를 감춰 주기도 한다.

그래서 아드넬은 율리시아만을 위한, 그녀에게 딱 맞는 화장품을 잔뜩 만들어 주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바스토…… 아니, 황제 폐하가 하르트 공녀한테 빠진 이유?”

“달리 이유랄 게 있나요. 황제 폐하께선 그저 하르트 공녀의 진실된 모습을 보셨을 뿐이에요.”

근래 율리시아의 얼굴은 복사꽃처럼 발갛게 물들어 그 미색을 잔뜩 꽃피우는 중이었다.

이에 아드넬도 궁금해 물어보니, 부끄러워하면서도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황제 폐하께서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 여인이라시더군요.’

처음엔 향기에 관심이 동했고, 그다음엔 미소에 반했고, 그다음에 보았을 땐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부족한 사랑은 저가 대신 채워 줄 테니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쉬어 가는 안식처가 되어 주면 어떻겠냐고, 그리 말했더란다.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야.’

아드넬은 예전에 바스토르가 했던 부끄러운 언행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한편 테시우스는 그런 아드넬을 살피면서도 어딘가 긴장한 기색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곤 괜스레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모나는? 끝내 따라오겠다던가?”

“네. 워낙 강경해서…….”

얼마 전 모나는 아드넬에게 자기도 따라가 모시고 싶다며 간곡히 청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이 수도에 있어 아드넬은 되도록 남으라는 식으로 권했는데 모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 아드넬 님을 따라갈 거예요. 그곳이 어디든지요!’

‘하지만 가족이 많이 그리울 텐데…….’

‘휴가를 모아 한 번씩 보고 오면 되지요. 제국을 떠나는 것도 아닌걸요, 그리고…….’

모나는 힐끔 옆에 선 필립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아드넬 님도 필립과 함께 있으면 좋으시잖아요.’

모나의 지극한 간호 덕에 무사히 병을 이겨 낸 필립의 얼굴 반쪽엔 꽤 진한 흉터가 남아 있었으나 차츰 사라져 가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연인이 되었고, 필립은 모나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사실 아드넬도 필립까지 사라지면 너무 허전할 것 같긴 했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준 건 제이든과 필립 두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제이든은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지만.

아드넬의 얼굴 위로 일순 슬픔이 어리자 테시우스 또한 조금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 잿더미가 제이든이었을 테지.’

저주가 휩쓴 순간, 자기 대신 아드넬을 감싸 준 사람.

목숨을 바쳐 그녀를 지키고 스러진 사람.

그건 아드넬도 테시우스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 힘은 대체 뭐였을까?’

리비엘이 마법진을 그렸을 때, 원래 계획은 아드넬이 신호를 주면 마법 결계를 잠시 없애고 순간 이동 마도구로 리비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게르펜이라는 변수가 생겼고 아드넬은 미처 주머니에 넣어 둔 마도구를 부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아드넬에게서 리비엘을 밀쳐내고 마법의 발동까지 방해했다.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만큼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생각하는 중에도 열심히 걸음을 놀리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별궁에 도착해 있었다.

‘드디어…….’

테시우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침내 때가 온 것이다.

“저, 아드넬. 잠시 산책하고 들어갈까?”

“전 좋아요.”

다행히 긍정의 답이 떨어졌다.

테시우스는 아드넬과 함께 후원의 정자로 향했다.

그녀가 8년 전의 테오를 만나고, 황자였던 테시우스를 만난 정자.

때마침 저녁노을도 아름답게 내려앉고 있었다.

“아드넬.”

“……테시우스.”

주홍빛 노을을 등진 얼굴을 바라보는 찬란한 바닷빛 눈동자에 애정이 어렸다.

아드넬이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자, 테시우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냉큼 옆에 달라붙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왜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지?’

그런데 맞잡은 손이 퍽 축축했다.

어딘가 잔뜩 긴장하기라도 한 것처럼…….

“……저기 있잖아, 아드넬.”

“말씀하세요.”

“음음, 사실 우리가 같이 가자고 말만 두루뭉술하게 한 감이 없지 않아 있잖아? 그래서 말인데…….”

그 순간 여전히 손을 붙잡은 채로 테시우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거 설마, 내가 상상하는 그건가?

이렇게 갑자기?

아드넬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크게 벌어진 순간 테시우스가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그의 넓은 손바닥 위엔 노을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반지가 올려져 있었다.

“다소 갑작스럽겠지만, 너와 내가 서로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이곳에서 꼭 말하고 싶었어.”

“테, 테시우스…….”

“정식으로 청혼하고 싶어. 아드넬, 나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해 주겠어?”

바람이 불었다.

한창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도, 흔들리는 나뭇잎의 노래조차 감미롭게 느껴지는 순간.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를 올려다보는 테시우스는 잔뜩 긴장한 채였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당신을 거절할 수 있을까.’

온 마음을 다해 날 사랑해 주는 사람,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마주하고 비로소 행복해질 자격을 얻은 우리 둘.

분홍빛 입술이 반달처럼 부드러이 휘었다.

“물론이에요.”

“아아……!”

기쁨 어린 탄성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테시우스가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제야 온전히 내 사람이 된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채워 주는 이 사람을, 비로소.

테시우스는 껴안았던 몸을 놓아주기가 무섭게 냉큼 아드넬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젠 무르고 싶어도 못 물러.”

“알고 있어요.”

“응, 사실 안 놔줄 건데 그냥 말해 봤어.”

그리 말하는 얼굴 위로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눈을 감고, 동시에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얼굴 사이로 따스한 노을빛이 내려앉았다.

그런 두 사람을 축하하듯 바람이 잠시 불었다가 조용히 스러졌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요?’

‘행복하게 살자. 뭐든 네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그래, 우리는 행복할 테니까.

함께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으니까.

‘사랑해요, 테시우스.’

‘나도 사랑해, 아드넬. 오직 너만을 영원히.’

[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본편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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