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그 말대로였다.
아파르치도, 선대 마탑주도, 그들의 마력은 진작 뛰어넘었으나 수십의 힘이 합쳐진 마력으로 그려진 마법진은 제힘만으로는 부족했다.
게르펜이 마력을 구속하는 공허석을 풀었을 때 힘이 돌아오기에 설마하니 결계를 쳤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충격을 받아 몸에 힘이 빠진 게 아니었어.’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영상에 온 신경이 가 있을 때 결계를 친 것이다.
빌어먹을!
리비엘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으며 휙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아직 하나가 남았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자루로, 저 안에 아드넬이 있었다.
리비엘은 애써 태연한 척 웃어 보이며 말했다.
“게르펜. 아드넬을 꺼내라.”
“존명!”
와중에도 게르펜은 충직한 심복 그 자체였다.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태도로, 자루의 입구를 풀었다.
자루를 내리자 입에 재갈이 물린 채 포박된 아드넬의 모습이 드러났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와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아드넬…….’
정말로, 네 계획대로 될까?
바스토르가 염려로 주먹을 꽉 쥔 그때였다.
“……나, 나를 놓아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아드넬을 내 길동무로 삼을 것이다.”
리비엘은 동요하는 중에도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아직은, 기회가 있어.
아드넬만 있으면 돼.
마녀의 힘으로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고, 그걸 이용해 반역을 일으키면 돼.
원래 계획이 그거였잖아.
목걸이가 없어서 못 했을 뿐, 한 차례 능력을 증폭한 아드넬은 목걸이 없이도 충분히 비기를 사용할 수 있어.
살아남기만 한다면.
이 자리를 무사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기회는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내가 가진 능력은 이미 차고 넘치도록 충분하니까.
게르펜이 아드넬을 잡아 일으키자 리비엘은 기다렸다는 듯 아드넬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 손으로 휘어잡았다.
“결계를 풀어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
“아드넬은 테시우스의 정인이지, 케르시우스의 피를 이어받은 그가 아드넬을 잃으면 어찌 될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나?”
확실히, 그럴 테지.
아버지가 그러했듯 테시우스도 아드넬을 잃은 슬픔에 마음의 병으로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 갈지도 모르지.
하지만…….
“황제 폐하께선 속수무책으로 당하셨지만, 테시우스는 달라.”
“무, 무슨……!”
“……피하십시오!”
크아앙!
어디선가 짐승의 거친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순식간에 뒤로 몸이 팍 하며 밀려났다.
그 찰나의 순간, 리비엘의 앞을 막고 선 게르펜의 교차된 두 팔 위로 진한 상처가 새겨졌다.
“크윽……!”
혼자였다면 갑작스러운 급습이어도 피했을 테지만, 리비엘을 지키기 위해 앞을 가로막은 순간 주어진 시간은 끝이 났다.
짐승의 거대한 발톱에 사정없이 찢겨 나간 팔뚝은 하얀 뼈가 드러날 만치 깊게 팬 채였다.
주륵 하고 흘러내린 핏줄기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크르르…….”
어지간한 성인 장정을 뛰어넘는 크기의 흑표범이 낮게 울었다.
흉흉하게 반짝이는 금안은 사냥터에 나타났을 때와 같이 흐리지도, 빛을 잃지도 않았다.
가늘게 좁아진 눈동자는 단 하나, 아드넬의 머리를 움켜쥔 사람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테시우스.”
리비엘 또한 갑자기 등장한 테시우스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 비기는 분명 내 집에…….
“우리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네.”
리비엘을 감금하고 게르펜이 황성을 활보하는 동안, 바스토르와 테시우스는 리비엘의 명의로 된 모든 저택을 수색했다.
그리고 수도 외곽에 있는 작은 오두막을 발견했다.
겉보기엔 허름하기 짝이 없으나 내부엔 지하가 있었고, 겹겹이 이중 마법을 쳐 놓은 그곳엔 그동안 그가 저지른 모든 일의 증거와 세레나에게 보여 주었던 비기 또한 존재했다.
‘마법사는 갑작스러운 급습에 취약하고, 사냥터에 끌려가기 전 마주했던 리비엘의 심복은 제 주군을 지킬 테니 분명 허점이 생길 거야. 그 순간을 노리기엔 짐승의 모습이 훨씬 유리해.’
테시우스는 그 비기를 사용해 자신을 짐승으로 바꾸어 달라 부탁했다.
그가 처음으로 자처해 짐승으로 바뀐 것이다.
‘모든 것을 차단했다.’
마법 결계로 리비엘의 능력을 구속했고, 게르펜은 저 팔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눈으로 보기에도 출혈량이 상당한데 저대로 두었다간 싸우긴커녕 그 자리에서 쓰러질 테니.
“이만 포기해라, 리비엘. 그대가 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
앞에는 바스토르와 그의 기사들이, 뒤에는 한때 제 조카였던 짐승이 막아서고 있다.
두 발을 올리고 선 이곳엔 마법 결계가 쳐져 있어 마도구도, 마법도 아무것도 사용할 수가 없다.
‘정말…… 이대로 허무하게 끝이라고……?’
내가 어떻게 해 왔는데, 어떻게 버텼는데……!
발목을 붙잡고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는 듯한 진득한 패배감이 역겨웠다.
하지만 정말로, 이젠 방법이 없었다.
리비엘이 부들부들 몸을 떨던 그때였다.
“……당신을 모실 수 있던 건 제 일생의 영광이었습니다.”
“게르펜……?”
“부디 살아남아, 원하시던 바를 이루시길.”
그 말을 끝으로, 게르펜이 순식간에 몸을 틀어 바스토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정확히는 그의 뒤에 있는 아파르치를 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 있는 건 오직 테시우스, 그리고 붙잡을 수 있는 것도 테시우스였다.
“크릉!”
테시우스가 크게 도약해 게르펜의 등 뒤로 앞발을 강하게 휘둘렀다.
길게 뻗은 발톱 끝으로 살가죽이 찢어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게르펜은 멈추지 않고 팔을 뻗었다.
앞으로 뻗은 손엔 칼이 쥐어져 있었고 그 순간 호르세가 아파르치의 로브를 잡고 뒤로 재빨리 잡아당겼다.
“허억……!”
쿠당탕.
일순 소란이 일었다.
아파르치는 뒤로 나동그라지진 않았으나 테시우스의 일격에 고스란히 등을 내어 준 게르펜의 몸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즉사였다.
하지만 닿지도 않을 공격을, 그것도 왜 아파르치에게?
테시우스가 생각하던 그때였다.
“저, 저기……!”
“안 돼!”
아드넬을 붙잡고 선 리비엘의 발밑으로 붉은 형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게르펜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글자처럼 모습을 갖추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게르펜, 네 희생은 잊지 않으마.’
왜 마탑주를 향해 달려드나 했더니, 덕분에 완벽하던 결계에 빈틈이 생겼다.
리비엘은 자신에게 남은 모든 힘을 그러모아 순간 이동 마법진을 그렸다.
‘안 돼, 아드넬!’
상황을 파악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임에도 마법진은 찰나 사이에 완성되었다.
테시우스가 다급히 몸을 돌렸으나 완성된 마법진은 번쩍하는 붉은 빛을 뿜어내었다.
“기다려라, 내 이날을 잊지 않고 반드시 돌아올 테니……!”
“크아앙!!”
어떻게든 잡아야 해.
여기서 놓칠 수는 없어.
제발, 제발……!
테시우스의 몸이 또 한 번 도약했다.
아까와 달리 휘두르는 앞발은 발톱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낚아채려는 듯.
정확히 아드넬을 향해 뻗고 있었다.
리비엘과 함께 그녀의 몸이 차츰 흐려지던 그때였다.
콰앙!
“크아악!”
큰 폭발음과 함께 훙 하고 폭풍처럼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흙먼지를 몰고 온 바람이 시야를 가리며 사람들의 몸을 뒤로 밀어내었다.
어떤 충격이 가해진 것처럼, 누가 밀친 것도 아닌데 바닥에 나동그라진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쿨럭……! 아드, 아드넬……!”
뿌연 흙먼지에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바스토르가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급히 아드넬을 찾았다.
설마 놓친 건가?
엄습한 불안감에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 묵직한 무언가가 발끝에 닿았다.
커다랗고 육중한 짐승의 몸통.
그리고 그 안에 안긴 아드넬이었다.
“테시우스!”
바스토르는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몸에 상처를 입은 건 아닌 듯 테시우스는 끔벅끔벅하며 눈을 떴다.
그리곤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서 아드넬의 안색을 살폈다.
“어서 재갈을 풀고 리비엘을 찾아라!”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호르세는 진작 그들을 지나쳐 리비엘이 있던 곳으로 달려간 상태였다.
“……리비엘.”
“이, 이게 어떻게, 말도 안 돼……!”
“포박하라.”
뒤따라온 호르세의 두 아들이 리비엘의 양팔을 붙잡고 공허석이 달린 사슬로 꽁꽁 동여맸다.
리비엘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분명, 분명 성공이었는데……!’
결계에 빈틈이 생긴 순간, 아직 생명력으로 박동하는 게르펜의 피까지 빌려 발동한 마법진은 성공이었다.
실제로 테시우스의 앞발이 아드넬의 흐려진 옆구리를 통과하는 걸 봤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성공하기 직전에 무언가가 방해했어……!’
어디선가 불어온 강한 바람이 리비엘과 아드넬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건 마력도 무엇도 아니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힘은 아드넬을 놓치게 만들고, 마법진의 발동까지 엉망으로 망가트린 뒤 사라졌다.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런 힘이 있을 리가, 대체 어디서 그런 게…….”
리비엘은 연신 말도 안 된다는 말만 중얼거리며 충격 어린 얼굴로 바스토르의 앞에 끌려왔다.
그사이 재갈과 포박에서 풀려난 아드넬은 테시우스에게 안기듯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둘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온 바스토르의 차가운 눈동자가 꿇어앉은 리비엘을 내려보았다.
몰아친 바람은 어느새 사라졌고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마침내 다가온 그의 마지막 순간을 사람들에게 선명히 보여 주었다.
“그대가 저지른 더러운 죄악은 더 이상 내 입에 올리지 않겠다.”
바스토르는 고개를 돌려 테시우스와 아드넬을 쳐다보았다.
“테시우스.”
“…….”
테시우스는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바로 리비엘의 끝을 저가 마무리 짓게 해 달라는 것.
아드넬이 테시우스의 몸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서 뻗어 나온 기묘한 힘이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휘감았고, 잠시 후 테시우스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무감정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 나와 리비엘의 앞에 섰다.
호르세가 자신의 검을 테시우스에게 건네준 그때였다.
“테, 테시우스……!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잖니, 내가 잠시 길을 잘못 들긴 했지만 한때는 진정으로 네가 안타까워……!”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그리 비웃던 ‘가족’을 운운할 만큼 절박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테시우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외숙이 가족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이러지 못했을 테지요.”
“그, 그래! 이건 다 내 아버지와 가족들 때문에……!”
“하지만 선택의 대가는 책임져야 하는 법입니다.”
스릉.
서늘하게 빛나는 차가운 칼날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테, 테시우……!”
서걱.
투둑…….
데구루루 굴러가는 머리통을 따라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것이 누군가의 발에 부딪혀 멈추고서야 테시우스는 말했다.
“지금까지 쌓아 온 죗값을 부디 영원히, 치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