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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39)화 (139/141)

139화

바스토르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깊게 눌러쓴 로브로 얼굴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리비엘처럼 마도구 하나를 든 채였다.

그 위로 손을 올리자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찬가지로 영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영상 속에 있는 사람은…….

‘……게르펜?’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지금 리비엘의 뒤에 서 있는 사내.

게르펜이었다.

게르펜 또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와중에도 영상은 계속 재생되었다.

어느 복도에서, 침실에서, 창고에서.

그는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지길 반복했다.

아무도 없는 창고에선 분명 모습이 보였는데 마도구를 사용하면 모습이 사라졌고, 그 상태로 복도를 활보했다.

복도를 지나는 누구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고 영상 속에서도 그는 사라진 채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황제의 침실에 도달했을 때.

궁의가 황제가 먹을 약을 준비하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저건!’

리비엘의 몸이 동요로 잠시 들썩였다.

영상 속에서, 모습을 감췄던 게르펜은 마법을 해제하곤 황제의 침실에 들어온 뒤 저가 준 기록용 마도구를 책장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곤 마찬가지로 저가 준 다른 마도구를 사용해 모습을 바꾸었다.

머리색, 눈동자, 복장, 모든 것이 황태자의 모습을 닮아 갔다.

그 상태로 잠시 방을 나섰다가 들어왔고, 보란 듯이 주변을 살피더니 품속에 있는 약병을 꺼내 황제의 약에 탔다.

다음으로 이어진 장면은 이미 사람들이 본 것과 동일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황제가 숨을 거두고 난 뒤, 책장 위에 있던 마도구가 혼자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모습을 감춘 게르펜이 가져갔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마도구는 지금 리비엘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나 또한 방비를 단단히 했지.”

그리 말하는 바스토르의 얼굴은 분노, 원망 그 자체였다.

잠시 후 마도구에선 다른 영상이 재생되었다.

음습하고 어두운 지하 감옥, 그곳에 갇힌 리비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철창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간수가 갑자기 쓰러지며 누군가에게 부축이라도 받듯 소리 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그때, 아무것도 없던 영상 속에 게르펜이 나타났다.

[게르펜……?]

[예, 폐하.]

놀랍게도 게르펜은 당당하게 리비엘을 ‘폐하’라 칭하고 있었다.

리비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마녀를 찾았습니다.]

[아아……!]

[확실히 잡아 두었을 테지?]

[예, 사형대 근처에 있는 오두막에 가둬 두었습니다. 때가 왔을 때 곧장 데려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뜬금없이 ‘마녀’ 얘기가 나오더니 리비엘은 게르펜을 크게 칭찬하며 말했다.

[그럼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지. 침실 위치는 파악했나?]

그 물음에 게르펜은 궁의와 황태자가 오는 시간도 확인해 두었노라 답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리비엘의 입가 위로 비릿한 미소가 걸리며, 그가 낮게 읊조렸다.

[……리아누와 리오넬이 걸어간 길을 케르시우스 또한 걸어가겠군. 내 마음이 실로 기쁘구나.]

명백한 반역 도모의 현장이었다.

리비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게르펜의 핏빛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케르시우스를 처리하고 나면 아드넬만 감시하고 있거라, 바스토르는 분명 나를 사형대로 끌고 갈 것이야. 내가 신호를 보내기 전까진 몸을 숨기도록.]

[존명!]

그 말을 끝으로 게르펜의 모습은 다시 스르륵 사라졌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두 사람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며 바스토르가 말했다.

“아직 갖지도 못한 승리감에 도취된 꼴이라니, 한심하군. 그대가 생각하기에도 일이 너무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나?”

그리 말하는 음성엔 조소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제의 명을 받고 대역 죄인을 가둬 둔 지하 감옥에 간수가 그렇게나 없고, 심지어 졸기까지 한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순탄해도 너무 순탄하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리비엘은 그게 저가 만든 뛰어난 마도구 덕분이라 생각했다.

기척을 완벽히 숨길 수 있는 게르펜이 제 마도구로 모습까지 감췄는데 어느 누가 눈치챌 수 있겠냐고.

아직은 단순히 가둬 두고 제때 잠들지도 못하게 감시할 뿐이니 간수가 많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고.

그리 생각한 게 실수였다.

“하지만 나도 황제 폐하를 시해한 건 미처 예상치 못했어. 그저 인장을 찾거나, 인질로 잡거나 할 줄 알고 마도구를 설치해 둔 거였는데…….”

바스토르는 분노로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짓눌린 입술에서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아버지였다.

나의 자질을 믿고 신뢰해 주던 아버지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황제 대리라는 권한까지 일임해 나라를 맡기셨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돌아가시기 전, 제국을 제대로 통치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 하나뿐이라 생각했다.

일찍이 황태자비를 들여야 했으나 미룬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배워야지만 아버지에게 당당히 보여 드릴 수 있을 테니까.

경합 같은 사사로운 일에 시간을 빼앗기기엔 아버지의 남은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으니까.

그런데 그 귀한 시간마저 앗아갔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 리비엘의 야욕 때문에.

그의 욕심 때문에.

“어, 어떻게…….”

리비엘은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버버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완벽한 극본을 써 내려갔고, 완벽한 배우들이 완벽하게 연기해 냈다고 자신했는데.

그게 모두 내 착각이었다고?

제 눈으로 보고도 쉬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예상하고 마도구를 설치한 거지?

대체 언제부터?

리비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그때였다.

“아드넬이 그대의 예상을 꿰뚫어 본 덕이다.”

그러니까 케르시우스를 깨우기 전에, 알라니아가 아드넬을 희생양으로 삼자 말하던 그날이었다.

‘제 짐작대로라면 라이칸 후작은 저의 정체보단 역사를 밝히려 들 것입니다.’

세레나와 손을 잡았다면 비기 또한 가지고 있을 터인데 저까지 죽으면 비기를 잃게 되고, 저를 약점으로 테시우스를 위협할 수도 없게 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추측.

더불어 이미 2황자를 한 차례 협박한 그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 조카를 황제로 만들려 한 건 아닐 거라는 짐작.

그래서 아드넬은 그가 황실의 역사를 밝히는 순간, 자기가 마녀라고 밝힐 작정이었다.

오히려 황태자는 무고하며 앞으로도 황실을 지지하고 충성을 바치겠다 맹세할 참이었다.

다만 때가 조금 어긋났다.

황제를 깨우는 약을 만드는 데 걸리는 며칠의 시간, 그사이 움직일 거라 생각한 리비엘은 생각 외로 잠잠했고 포박령을 받고서 바로 다음 날 진실을 밝혔다.

그래서 아드넬이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테시우스가 황제의 명령서를 들고 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또 다른 짐작은 들어맞았다.

진실을 밝히는데 때마침 포박령이 떨어졌으니 더 큰소리를 치며 되레 당당하게 잡혀 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역시나 리비엘은 순순히 잡혔고, 아드넬은 그때를 이용하자고 말했다.

진실을 알게 된 황제가 리비엘을 살려 둘 리가 없으니 사형을 거행하라 명할 것이라고, 그때가 되면 분명 지금까지 숨겨 온 마력으로 저항할 거라고.

그러니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두자고.

“제일 먼저 자기를 잡으려 들거라 했지. 아드넬이 제 손아귀에 있는 것만으로도 테시우스의 약점을 잡는 게 될 테니까.”

아드넬은 자처해서 잡혀 주겠다고 말했다.

제 손에 확실한 패가 있다고 생각해야 움직이는 신중한 사람이니 저라는 패를 직접 손에 쥐여 주겠다고.

의심을 살 수 있으니 한동안은 조용히 있다가, 식사하기엔 무척 늦은 시간에 사용인을 시켜 서재에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 잡히겠노라 말했다.

“그 전에 우선 황성 곳곳에 기록용 마도구를 설치해 달라 했지. 보는 눈이 적어진 만큼 마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증거를 기록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대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테시우스에게 문서의 존재를 알릴 때 리비엘은 영상을 띄워 보여 주었다.

마치 보란 듯이, 당당하고 태연한 얼굴로.

테시우스가 그때 리비엘의 반응을 설명하자 아드넬은 ‘어쩌면 그걸 즐기는 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혹시 모르니 마도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더욱 강하게 권유한 이유였다.

과연, 리비엘은 마녀 숙청의 역사를 밝힐 때도 영상을 띄워 보여 주었다.

마찬가지로 보란 듯이.

모두의 눈으로 증거를 확인하라는 듯.

아드넬의 생각이 맞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작당하는 것까지 모두 기록할 수 있었지. 황제 시해 자작극까지 꾸밀 줄은 몰랐지만.”

“…….”

리비엘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초췌한 얼굴 위로 절망이 떠올랐다.

명백한 실패였다.

‘이제…… 이제 어찌해야 하지……?’

사형대 아래에서 저를 쳐다보는 수백 개의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반역 도모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는데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변명의 여지도 없을 만큼 명확한 증거였다.

그토록 갈망하고 원하던 힘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여기서 황태자를, 테시우스를 죽인들 황좌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마녀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정작 그 마녀는 억울한 희생양이었노라 밝힌 건 바로 그 자신이었으니까.

이제 와 황실의 과거를 운운한들 사람들이 들고 일어설 것도 아니었다.

분위기는, 흐름은, 완전히 황태자에게로 기울었다.

‘실패다.’

리비엘은 게르펜에게 살짝 눈짓하며 신호를 보냈다.

그가 금세 눈치채고 자루를 어깨 위에 둘러멘 순간이었다.

콰득!

“……어?”

리비엘도, 게르펜도, 허망한 얼굴로 손바닥에 남은 잔재를 응시했다.

순간 이동 마도구.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그것이었는데, 전혀 발동되지 않았다.

“선대 마탑주의 마력을 진작 뛰어넘었다지. 해서 나도 준비했네.”

그때 바스토르의 등 뒤에서, 마도구를 손에 들고 영상을 재생한 남자가 로브를 벗었다.

다름 아닌 아파르치로 그는 여태 마도구를 다루는 척하며 다른 것을 하고 있었다.

마법 차단 결계.

그 어떤 마도구도, 마법도 사용할 수 없는 결계를 만든 것이다.

“이곳에 숨어 있는 마법사들이 힘을 모아 만든 것이니 그대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깰 수 없을 거야. 혼자의 마력으론 마탑주를 능가해도 수십에 비할 바는 못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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