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사흘 뒤, 이른 아침.
황성 종탑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종이 울리는 경우는 단 하나.
수도 전역에 알려야 할 만큼 시급한 사태가 발발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종소리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전염병이 퍼진 지 얼마나 됐다고 종까지 울리니 사람들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속속들이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황성에서 나온 관리가 닫힌 성문 앞에서 큰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다!”
황제 케르시우스의 죽음!
황제가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 있던 건 이미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이나 세상을 떠나는 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황성 앞에 모여들었을 때였다.
“오늘 정오, 황제 폐하를 시해한 리비엘 라이칸 후작의 공개 처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리비엘 라이칸 후작이라면 엄청난 크기의 영상을 허공에 띄우고 황실의 오래된 역사를 밝힌 사람이 아니던가?
그가 큰 목소리로 진실을 토로하고 머지않아 2황자가 직접 등장해 황제의 명령이라며 포박한 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어떻게 끌려간 사람이 황제 폐하를 죽인단 말이야?”
“의식도 없는 황제가 명령서를 쓴다는 것도 이상해.”
“진짜 후작의 말대로…… 자작극이라도 벌이는 게 아닐까?”
진실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황제 시해라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처형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했다.
사실 그들이 본 상황만으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반응을 예상한 리비엘은, 여전히 철창 속에 갇힌 채로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끝내 성공했구나……!’
게르펜, 제 심복이 맡은 임무를 잘 완수한 것이다.
이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리비엘이 환희에 젖어 있던 그때, 멀리서 여러 개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빠르게 지우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이 간악한 놈이 기어이……!”
바스토르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분노로 일렁이는 눈으로 리비엘을 노려보았다.
하얗게 질린 주먹이 그가 지금 얼마나 화났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발뺌하지 말라, 라이칸 후작. 그대가 한 짓임을 모르지 않으니.”
“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내가? 대체 무엇을?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태연한 낯빛에 바스토르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저치와는 아무리 얘기한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포박하라. 곧장 사형장으로 끌고 갈 것이다.”
“무고한 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말이 나올까 두려워 끝내 죽이려는 이가 차기 제국을 이끌어갈 황제가 된다니 기가 막히는군. 이 나라의 미래가 실로 염려스러워.”
“입에 재갈 또한 물리도록.”
바스토르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감옥을 나섰다.
그제야 뒤에 서 있던 얼굴들이 보였다.
황실 친위대 기사단장, 호르세 로란트 후작과 그의 두 아들을 비롯한 친위대 기사들이었다.
“아, 로란트 후작.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
“수도 밖에 있었던 건가? 얼굴을 보니 그런듯한데, 잘 모르는 것 같아 말해 주지. 사실 황태자는 지금…….”
퍼억!
그 순간, 리비엘의 얼굴이 사정없이 옆으로 꺾였다.
돌아간 시야는 호르세의 얼굴이 아닌 음습한 감옥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말이 많군. 재갈을 물려라.”
“예, 단장님.”
지금 얘기도 들어 보지 않고 날 친 건가?
하!
리비엘의 잇새로 허탈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으나 켈리언은 개의치 않고 입에 재갈을 채웠다.
“포박해라.”
리비엘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호르세는 일말의 요동도 없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표정만 그러했다.
앙다문 턱의 근육은 단단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아드리아나…….’
마음 같아선 몇십 대를 더 쳐도 모자라지만,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담아 제멋대로 치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켈리언과 엘튼이 리비엘을 포박한 뒤 의자에서 일으켜 세우자 호르세는 기다렸다는 듯 등을 돌렸다.
“사형장으로 간다.”
“존명!”
* * *
얼굴에 갑갑한 두건이 씌워진 리비엘은 감옥에서 끌려 나가고도 한참이나 무릎을 꿇어앉은 채 기다려야만 했다.
입에 재갈을 물려 말도 할 수 없고 무엇 하나 볼 수 없으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대체 뭘 하기에 사형장까지 끌고 와 놓고 시간만 지체하는 건지, 리비엘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으며 분을 삭였다.
시간은 참 느리게도 흘러가서 꿇어앉은 다리에 감각이 사라지고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정오가 되었다.
황성에서 공표한 그 시간이 된 것이다.
어디인지 모를 곳에 갇혀 있던 리비엘은 그제야 기사들에 의해 강제로 일으켜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질질 끌려가는 동안 들리는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바닥에 내팽개쳐진 순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귀청을 뚫고 들어왔다.
“지금부터 리비엘 라이칸 후작의 공개 처형을 시작한다!”
바스토르, 내가 예상한 행동에서 조금도 벗어나질 않는군.
리비엘이 생각하던 그때 얼굴을 가린 두건이 휙 벗겨졌다.
갑작스러운 빛에 일순 눈이 멀었으나 시야는 차츰 돌아왔다.
리비엘은 그제야 모든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프리테 전 가주를 처형한 그 사형장에 자신이 올라와 있었고, 높은 사형대 아래엔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우글우글하게 모여 있었다.
확실히 치료 약이 효과를 보인 듯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인파였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띈 건 왕홀을 들고 황제의 붉은 망토를 두른 바스토르였다.
‘……어디 언제까지 기고만장할지 보자고.”
곧 내 것이 될 테니까.
저놈은 잠시 내걸 맡아 둔 것뿐이니까.
리비엘은 바스토르를 향해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바스토르 또한 어머니가 누누이 말씀하신 그의 눈동자에 깃든 오래된 탐욕을 볼 수 있었다.
실로 독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강한 욕망이었다.
“리비엘 라이칸 후작은 리아누 황비 전하와 그 오라비인 리오넬 라이칸을 독살하고, 그 죄를 로드게리온 프리테에게 뒤집어씌웠을 뿐만 아니라 케르시우스 폰 아이테라 황제 폐하까지 시해한 극악무도한 범죄자이다! 이에 나, 바스토르 폰 아이테라는 리비엘 라이칸 후작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하는 바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웅성거리고 있는데, 바스토르는 리비엘이 한 말에 대한 조금의 해명도 없이 그저 사형을 명했다.
그의 단호한 음성에 사형 집행인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왔을 때였다.
‘지금이다……!’
리비엘은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명, 제 우직한 심복이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크윽!”
“이, 이게 무슨……!”
어디선가 옅은 바람이 불어오며 리비엘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확히는 순식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 사형대의 끝으로 옮겨간 채였다.
그런 리비엘의 뒤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한 남자와 웬 자루가 하나 있었다.
“늦었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리 말하며 남자는 리비엘의 입에 물린 재갈과 공허석이 달린 사슬을 손쉽게 풀어내곤,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아니다, 딱 적절한 때에 왔어.”
손목이 좀 뻐근한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꿇려 있던 다리에도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리비엘은 게르펜의 부축을 받은 채 일어섰다.
“반역이다!”
“황태자 전하를 보호하라!”
“황태자를 보호해? 아둔하기 짝이 없군.”
리비엘은 피식 웃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꽤 당황했을 줄 알았는데 바스토르는 의외로 침착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마력 구속도 풀렸겠다, 리비엘은 보란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이걸 보고도 같은 소리가 나올까?”
그가 손에 들린 마도구를 작동하자 허공 위로 영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영상은 차츰 커져, 사형대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저 사람은…….”
“황태자 전하……?”
호화로운 침실 안, 침대 위엔 간신히 숨만 쉬는 남자가 누워 있었고 누군가 달칵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태양같이 빛나는 찬란한 금발 머리의 남자.
제국에, 그것도 황성에 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은 황태자 바스토르뿐이었다.
“저, 저게 무슨……!”
황태자는 잠시 주변을 살피는가 싶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다름 아닌 작은 병으로 그 안엔 정체 모를 액체가 들어 있었는데 그는 협탁 위 황제가 먹는 약에 그대로 따라 부었다.
제 일을 마친 황태자는 그대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나갔고, 머지않아 궁의 한 명과 함께 돌아왔다.
궁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협탁 위에 놓인 약을 황제에게 조심스레 먹였다.
그리고 불과 몇 분 만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황제의 몸이 격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꺄악……!”
“도, 독이다!”
온몸의 피를 다 쏟아 내는 모습이 저러할까.
실로 잔인한 광경에 사람들이 눈을 가렸다.
궁의와 황태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와중에, 황제는 덮고 있던 이불을 붉은 피로 흠뻑 적시고서야 축 늘어졌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이것이 황태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사경을 헤매는 황제의 명령서를 위조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즉위하기 위해 제 손으로 황제를 죽이고 모른 척하며 황실의 추악한 진실을 밝힌 제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황제 시해는 곧 반역! 당장 처형해도 모자랄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건 제가 아닌 황태자, 바스토르입니다!”
충격으로 동요하는 수백 개의 눈동자가 바스토르를 향했다.
리비엘 또한 자신만만한 얼굴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왜 조금도…… 동요하질 않지?’
상상도 못 한 장면을 본 것치곤 지나치게 침착했다.
리비엘이 눈썹을 살짝 찌푸린 그때, 바스토르의 잇새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피식.
명백한 조소, 비웃음이었다.
“보여 줄 건 그게 다인가?”
“뭐……?”
“그럼 나 또한 보여 주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