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그때 테시우스의 등 뒤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바스토르였다.
“솔직하게 말하도록,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의 진상을 소상히 고백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하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허탈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듯,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굳이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아도 표정에서 드러났다.
“내 목숨이 너에게 달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쇠사슬은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공허석으로 만들었거든.”
확실히,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걸 보니 허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뭐라고?
리비엘은 피식 소리를 내며 조소했다.
“난 무고한 자들을 위해 진실을 밝혔을 뿐이다.”
“전 프리테 가주를 협박해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들었지. 형도, 여동생도, 제 손으로 죽여 놓고 가증스럽게도.”
“어떻게 내 손으로 한 가족을 죽일 수 있단 말이냐?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황태자라 그런가.”
“말 돌리지 말도록. 세레나와 손을 잡고 전염병을 퍼트린 것도, 사냥터에 마수를 풀어 놓은 것도 모두 그대가 한 짓 아닌가!”
“그 시녀가 마녀라는 걸 내가 어찌 알고서? 안다면 오래도록 곁에 둔 황태자, 네가 알겠지. 그리고 마수라니? 애초에 마수를 만들어 낸 건 황실 아니었나? 한데 내가 무슨 수로?”
리비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스토르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무엇 하나 제 죄를 시인하는 게 없었다.
정녕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온갖 끔찍한 짓을 다 벌였으면서도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는 뻔뻔한 얼굴에 바스토르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끝내 인정하지 않겠다, 이건가?”
“내가 한 일이 아닌데 어떻게 인정을 한단 말이냐?”
“……그래, 정 그렇다면야.”
바스토르는 그대로 등을 돌려 간수에게 말했다.
“사흘 밤낮 동안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 주지 마라. 교대로 지켜보며 편히 잠도 들게 하지 말라.”
“예, 전하!”
등 뒤로 치졸하기 짝이 없는 처사라며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바스토로는 깔끔히 무시한 채 테시우스와 함께 지하 감옥을 나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곧장 철창의 문이 굳게 잠겼다.
‘이건 예상 밖의 처분인데.’
한편 리비엘은 속으로 생각하며 서늘한 낯빛으로 문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선 간수를 쳐다보았다.
지하 감옥으로 끌려오는 건 진작 예상했다.
하지만 사흘 밤낮 동안 물 한 모금 주지 말라는 처분이 떨어질 줄은 몰랐다.
당연히 온갖 잔인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 낼 줄 알았는데, 사실 조금 아쉬웠다.
‘명장면을 놓쳤어.’
아드리아나가 들고 도망친 목걸이를 찾아다니던 수년간 리비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특히 다양한 마법과 마도구를 연구해 왔는데,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투명화 마법을 적용한 마도구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 들키지 않을 수 있을뿐더러 그 상태로 마도구도 사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리비엘은 지하 감옥으로 끌려온 뒤, 브로치로 둔갑한 마도구로 황태자의 잔인한 처사를 모두 기록할 생각이었다.
인정하지 않아도 진범이라 확신하는 걸 보면 분명 사형대로 끌고 갈 것이고, 사람들이 이를 구경하러 몰려왔을 때 자신이 당한 고문을 낱낱이 보여 줄 생각이었다.
거짓 자백을 하라며 고문을 하더니 끝까지 죄를 시인하지 않자 일단 죽이고 보려 하지 않냐며, 이것이 황태자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 입에 댈 수 없는 고문이라니.
이래서는 딱히 모질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장면을 기록할 수가 없었다.
‘아쉽긴 하지만……. 또 모르는 거니까, 일단 사흘 뒤에 어찌 나올지 지켜봐야겠군.’
이미 게르펜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가 준 마도구로 단단히 방비했으니 누구도 그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조금 힘들더라도 잠자코 기다리면 될 터였다.
어디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고.
리비엘의 입가 위로 독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 게르펜은 리비엘이 준 마도구로 모습을 감춘 채 황성 안을 활보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용인이 세레나가 퍼트린 병으로 죽거나 앓아누운 덕에 아주 수월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리비엘이 내린 명령은 하나, 아드넬을 찾는 것!
‘그 마녀만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는 비기를 사용할 수 있을뿐더러 2황자의 가장 큰 약점을 잡는 셈이니 인질로서도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 아드넬은 꼭꼭 숨은 채 머리털 한 가닥 보여 주지 않았다.
물론 게르펜은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온 황궁을 쥐잡듯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낼 참이었다.
그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것일까.
이날 늦은 밤, 게르펜은 마침내 아드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밀실이었구나……!’
한 사용인이 식사를 가지고 황태자의 개인 서재에 들어가기에 따라간 것인데, 그녀가 음식을 서재에 두고 자리를 뜬 뒤 머지않아 드르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장이 옆으로 밀려났다.
묵직한 책장이 밀려나면서 나타난 건 어딘가로 통하는 작은 문과 아드넬이었다.
여기에 꽁꽁 감춰 뒀으니 여태 찾질 못했지, 게르펜이 생각하며 조심히 주변을 살폈다.
아드넬만 밀실에 있었는지 주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따로 없었다.
게르펜은 숨을 죽인 채 적당한 때를 노리다가 아드넬이 접시가 올라간 트레이를 두 손으로 잡은 순간 바람처럼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흐읍……!”
“쉿, 조용히.”
시리도록 차가운 음성이 아드넬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옆구리에선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뾰족한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졌다.
긴장감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음에도 달달 떠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 게르펜은 입을 틀어막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소리를 지른다면 이 자리에서 죽여 주지. 내 말, 알아들었나?”
아드넬은 그에게 붙잡힌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르펜은 그제야 입을 막은 손을 내렸다.
허언이 아니라는 걸 알아들었는지 아드넬은 두려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음에도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얼굴을 가린 복면 너머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게르펜은 곧장 아드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양손을 포박했다.
그리곤 마찬가지로 투명화 마법이 적용된 마도구를 사용해 자신과 같이 모습을 감췄다.
이제 안전한 곳에 아드넬을 가둬 두고 제 주군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대업이 머지않았다……!’
게르펜은 기쁜 마음으로 아드넬을 어깨 위에 둘러멘 채 황태자의 서재를 나섰다.
곧장 황성을 나온 그는 금세 작은 오두막에 다다랐다.
다름 아닌 사형대 근처에 있는 곳으로, 한때는 사슬이나 단두대의 칼날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으나 새로이 창고를 지으며 지금은 누구도 찾지 않는 버려진 오두막이 되었다.
일찍이 봐 둔 곳인지라 게르펜은 능숙하게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아드넬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말도록.”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진 채였으나 하관을 가린 복면 위로 서늘하게 빛나는 핏빛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아드넬은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을 듣고서야 게르펜은 오두막을 나서 문을 굳게 잠갔다.
입에 물린 재갈에도 마법이 걸려 있어 소리가 새어 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저리 가냘픈 여인의 몸으론 문을 부수고 도망칠 수도 없고.
자물쇠를 단단히 채운 게르펜이 다시 향한 곳은 황성 지하 감옥이었다.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간수들을 지나쳐 감옥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이틀 새에 핼쑥해진 리비엘의 얼굴이 대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이런 곳에 있으실 분이 아닌데, 감히 이따위 대접을 받게 하다니!
게르펜은 차오르는 분노를 담아 리비엘을 감시하던 간수의 목을 쳐 소리 낼 틈도 없이 기절시켰다.
쓰러지는 몸을 받아 비스듬히 앉히자, 리비엘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게르펜……?”
“예, 폐하.”
물기 없이 마른 음성에 다시금 분노가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보단 이성이 앞서야 할 때라, 게르펜이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마녀를 찾았습니다.”
“아아……!”
그제야 지친 얼굴에 살짝 생기가 돌았다.
대업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준비가 마침내 끝난 것이다.
리비엘은 기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잡아 두었을 테지?”
“예, 사형대 근처에 있는 오두막에 가둬 두었습니다. 때가 왔을 때 곧장 데려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잘했다. 아주 큰일을 해 주었어.”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기뻐하는 주군의 모습에 뿌듯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지. 침실 위치는 파악했나?”
“예. 궁의와 황태자가 오는 시간도 확인해 두었습니다.”
“그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황태자에게 완벽히 뒤집어씌울 수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게르펜이 고개를 숙여 보이자 리비엘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수십 년 전부터 갈망해 오던 그 힘을, 권력을 이 두 손으로 움켜쥐는 때가 머지않은 것이다.
“……리아누와 리오넬이 걸어간 길을 케르시우스 또한 걸어가겠군. 내 마음이 실로 기쁘구나.”
리비엘은 진심을 담아 웃어 보이며 덧붙였다.
“케르시우스를 처리하고 나면 아드넬만 감시하고 있거라, 바스토르는 분명 나를 사형대로 끌고 갈 것이야. 내가 신호를 보내기 전까진 몸을 숨기도록.”
“존명!”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게르펜은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결심으로 답해 보이고는 왔을 때처럼 모습을 감춘 채 감옥을 나섰다.
리비엘이 갇혀 있는 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지상에 나 있는 입구에 다다르기까지, 아무도 그가 왔다 간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