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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36)화 (136/141)

136화

[마녀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사람들이 들고 일어섰다.]

[평민들은 짐승으로 바뀌길 자처해 마녀를 지키고 있다. 감히 마녀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니, 하나도 빠짐없이 몰살시킬 것이다.]

[습격으로 마법사의 1/3이 당했다. 주문의 시전 속도가 너무 느려 근접전엔 방도가 없다.]

[두 번째 전쟁도 마녀의 승리로 끝났다. 생각보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짐승을 변종으로 만드는 연구를 시행하라 명했다. 마녀가 만든 짐승에게 대항하려면 그뿐이다.]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성도 지능도 없는, 살의만 존재하는 괴물이다.]

[길어지는 전쟁으로 민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회유에도 받아들이지 않는 마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

“이, 이게 대체…….”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녀란 하나같이 사특한 존재라 생각했건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이후로 이어진 내용 또한 그러했다.

마수를 민가에 풀어 놓고 온갖 소문을 내어 사람들이 마녀를 사냥하게끔 만들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읽지 못하는 자들은 내용을 이해한 사람에게 물어 전해 들었고, 너 나 할 것 없이 충격으로 입을 벌렸다.

“이것이 우리 엔하시아 대제국의 과거이자 진실입니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쩌렁쩌렁한 음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누가 이리 크게 외치는 건가 싶어 다들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리비엘의 몸이 하늘로 두둥실 떠올라 커다란 영상 옆으로 향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을 때였다.

“저는 라이칸 가문의 차남, 리비엘 라이칸 후작입니다. 그동안 황실을 위해 몸 바쳐 일해 왔으나, 뒤늦게 알게 된 추악한 과거를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문서를 보여 주던 영상은 어느새 리비엘의 얼굴을 크게 확대해 비추었다.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이래도 그의 이목구비를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리비엘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만끽하며 입을 열었다.

“아이테라 황실은 아주 먼 옛날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자라면 주저 없이 처단해 왔습니다. 정작 상대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저들이 두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러했지요. 그건 옛날이 아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단호한 음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일순 정적이 가라앉은 가운데, 리비엘이 질타하듯 손가락으로 황성을 가리키며 외쳤다.

“황태자의 시녀로 있던 마녀가 전염병을 퍼트렸고, 기다렸다는 듯 치료제를 개발해 나누어준다? 과거 5대 황제가 마수를 민가에 풀어 무고한 자들을 해치게 만들고 마녀에게 뒤집어씌운 것처럼, 무척이나 작위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또 고통받고 있지 않느냐며 리비엘이 덧붙였다.

“평민이 없으면 나라도 없고, 황제도 없습니다. 한데 누구보다도 평민의 편에 서야 할 황실이 저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수백 수천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더는 황실의 추악한 작태를 두고 볼 수 없어 저, 리비엘은 목숨을 걸고 과거의 추잡한 역사를 밝히는 것입니다!”

결의에 찬 얼굴은 실로 비장해 보였다.

그의 말마따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기도 했다.

리비엘이 의도한 대로 사람들 또한 술렁이기 시작했다.

“만약 저 문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하지만 마녀가 전염병을 퍼트린 것도 사실이잖아. 그런데 치유 능력이 있다니 그게 가능해?”

“저 사람은 그렇게 오래된 역사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래도 아직까진 의구심이 더 강했다.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수군대며 궁금증을 내비치자 리비엘이 냉큼 덧붙였다.

“한때 제 꿈은 마탑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한 자질도, 실력도 있었지요. 하지만 선대 마탑주가 마녀 숙청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를 보여 준 그날부로 꿈을 포기했습니다. 마탑주란 자리는 끔찍한 황실의 과거를 밝히긴커녕 최선을 다해 묻어 두는 것이었으니까요!”

리비엘은 잠시 숨을 돌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테라 황실은 예전에도 그러했듯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들의 권위를 넘보는 자가 나타나는 순간 또다시 온갖 악독한 짓을 일삼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입니다. 귀족이나 황실 일원이 아닌, 아무런 죄가 없는 평민들이 그 대상이겠지요! 마치 지금처럼!”

어느새 리비엘은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저들의 고통을 백번 이해한다는 듯, 그 고통받는 모습을 도저히 눈 뜨고 지켜보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곧 사람들은 점점 술렁이면서도 곧 납득하기 시작했다.

“그래, 매번 피해를 보는 건 우리 평민이야! 귀족도 황실도 아니라!”

“왜 우리가 자기들 권력 다툼에 휘말려야 하는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얼핏 보면 리비엘의 말에 납득한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혼란을 틈탄 사이 리비엘이 마법을 시전한 탓이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다다르면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도 기록용 마도구처럼 영상을 띄웠듯이,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시 효과가 있군.’

리비엘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한 법이다.

사람을 선동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유려한 언변을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미심쩍은 구석이 많으면 의심하기 마련이라, 리비엘은 오래도록 연구해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냈다.

다름 아닌 현혹술로 이 마법을 사용하면 이성은 살짝 흐려지고, 반대로 감정은 격해진다.

의지가 강한 사람에겐 잘 들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겐 효과가 아주 좋았다.

리비엘은 아무도 모르게 마법을 쓰는 와중에 한 가지 생각 또한 자연스럽게 흘려 넣어 주었다.

‘만약 저 사람이 황제가 된다면…….’

이성은 흔들리고 감정은 배가되는 가운데, 결의에 찬 리비엘의 얼굴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아이테라 황실이 아니라 저렇게 정의로운 사람이 황제가 된다면 훨씬 낫지 않을까?

전염병을 퍼트리고 기다렸다는 듯 약을 나누어주는 황실은 자신들의 잘못을 절대 밝히지 않을 테지만, 저 사람은 다르지 않을까?

대놓고 평민의 편에 서겠다는 저 사람이라면, 우리도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감정을 더욱 부추겼고, 이는 금세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이테라 황실은 제대로 된 해명조차 하지 않아!”

“사람의 목숨을 길가의 돌 보듯 대하는 군주 따윈 필요 없어!”

“정의로운 라이칸 후작이 황제가 되는 게 나아!”

“리비엘 라이칸 후작을 황성으로!”

어느덧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황성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의지가 강해 현혹되지 않은 케르페온 같은 사람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 굳게 닫혀 있던 황성의 문이 열렸다.

“리비엘 라이칸 후작은 내려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라!”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2황자 테시우스였다.

허공 위에 떠 있던 리비엘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곧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모여있던 인파가 반으로 갈라져 길을 내주었다.

그렇게 리비엘이 테시우스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리비엘 라이칸 후작은 리아누 황비와 그 오라비인 리오넬을 독살하고 무고한 전 프리테 가주인 로드게리온 프리테에게 누명을 씌워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든바, 정의를 수호하는 황제. 나, 케르시우스 폰 아이테라의 이름으로 즉시 포박을 명령한다!”

테시우스는 황제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 내용을 고스란히 읊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서 두 명의 기사가 튀어나와 리비엘의 팔을 붙잡았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다. 순순히 따르도록.”

“……보십시오! 이것이 아이테라 황실입니다! 추악한 진실을 밝히고자 하면 사경을 헤매는 황제의 인장을 찍어 가짜 명령서까지 만드는 게 지금의 황실이고, 우리의 군주입니다! 이런 황실을 그대로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입에 재갈을 물려라.”

순순히 따르라는 말에도 리비엘은 제 목소리가 널리 퍼지게끔 마지막까지 발악하듯 외쳤다.

끝내 재갈이 물리고서야 리비엘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간 열렸던 성문 또한 굳게 닫혔다.

어딘가로 끌려가는 리비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 * *

기사들에게 잡힌 리비엘이 도착한 곳은 음습한 지하 감옥이었다.

보기만 해도 서늘함이 느껴지는 두꺼운 철창 너머엔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기사들은 리비엘을 그대로 끌고 가 의자에 앉히곤 팔을 양 뒤로 꺾어 쇠사슬로 고정했다.

그런데도 리비엘은 순순한 태도로 일관했다.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온 테시우스를 조용히 응시했다.

“결국엔 밝혔더군.”

테시우스는 더 이상 그를 한 가족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주저 없이 튀어나온 하대에 리비엘이 피식 실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내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단다, 테시우스.”

“황좌가 그리도 탐이 났나?”

“금을 처발라 만든 의자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내가 바라는 건 황제의 힘, 인장을 하나 찍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세상 가장 높은 자리에서 진창으로 처박을 수 있는 그 힘이다.”

변방 백작가를 수도 중앙 귀족으로 만들고, 능력 하나 없는 사람을 가주로 만들고, 일개 백작가 영애를 제국에서 세 번째로 고귀한 핏줄로 바꾸어 버리는 그 힘.

말 한마디로 사람의 목숨과 신분과 재물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 말도 안 되는 힘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웃어 보이며 처절한 끝을 선물해주 고 싶었다.

제게는 일말의 애정도, 사랑도, 관심도 없었던 아버지란 작자에게.

나 혼자만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노라고,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라이칸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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