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이후로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라이칸 후작은 꽤 잠잠했는데, 아무래도 어떤 선택을 내릴 건지 지켜보는 듯했다.
당연하지만 바스토르는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테시우스도, 아드넬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저항이 조금 있긴 했다.
알라니아는 아들의 간절한 청에 끝내 손을 들었지만, 마탑주 아파르치만은 절대 안 되노라 결의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마법사의 힘은 곧 황실의 권력입니다! 한데 마법사의 명성과 권위가 떨어지면 어찌 되겠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말은 아니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마탑주들은 진실을 알고도 오히려 더 깊숙이 감추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저들의 입지를 위해 지금껏 숨겨 왔으니 몰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감추려는 것이나, 바스토르는 강경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 아파르치. 당장이 아니더라도 라이칸 후작은 결국 역사를 밝히게 될 거야.”
그는 단순한 귀족이 아니었으니까.
후작가라는 단단한 뒷배와 더불어 현 마탑주를 뛰어넘는 마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번 일을 잘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다음엔?
결국엔 마탑까지 삼키려 들겠지.
바스토르의 선택에 아파르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로 아드넬은 백신 생산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제일 먼저 약을 받았던 연금술사와 대장장이들의 상태가 호전된 덕이었다.
연금술사는 테시우스가 직접 타 영지로 내려가 데려온 우두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우두균을 추출했고 그동안 대장장이들은 아드넬이 설명해 준 ‘주삿바늘’을 구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수십 번의 시도 끝에 모두 완성되었다.
마침내 제국에도 ‘백신’이라는 것이 탄생한 것이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최우선으로, 그다음엔 만드는 대로 수도와 가까운 영지민들에게 나누어줘야 합니다.”
백신은 어디까지나 예방의 목적이기 때문에 아드넬을 비롯한 모나, 테시우스 등 천연두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이 맞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도 또 한 번 잡음이 일었다.
“소의 고름을 몸에 넣으라니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알라니아는 더러운 오물이라도 본 양 길길이 날뛰며 거부했다.
손에 종기가 생길 수도 있다는 부작용을 설명했을 땐 더욱 난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마라이 병에 걸리고 싶으시다면 그리하십시오.”
바스토르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하며 알라니아가 보는 앞에서 백신을 맞았다.
동물이 걸리는 병을 자처해 맞는다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도 꺼림칙했지만, 마라이 병에 걸리는 것보단 백만 배는 나았다.
더구나 그 우두라는 병은 치사율도 0%에 수렴하고, 자칫 흉터가 남을 수 있지만 이 또한 아드넬이 만든 약을 쓰면 차츰 옅어질 터였다.
얼굴이 망가지고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매는 것에 비하면야.
결국 알라니아도 진저리를 치면서도 백신을 맞았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연금술 공방에서 제조된 백신은 만들어지는 족족 수도와 인접한 타 영지로 가게 되었는데 클리프가 자처해 그 일을 맡았다.
제국 전역에 카리아 상회 분점이 있으니 그곳을 통해 백신을 보다 빠르게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소가 걸리는 병이라며 사람들이 꺼려할 것을 대비해, 수도의 참상을 마도구로 기록하여 백신과 함께 내려보냈다.
아직 수도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사람이래도 누구든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탄식을 내뱉을 광경이었다.
아마 본 사람이라면 너도나도 두려움에 백신을 맞으려 할 터였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마침내 리비엘도 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배다른 형제지만 고집 하나는 제 아비를 똑 닮았군.”
리비엘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잖아도 요 며칠 새에 케르페온이 잔뜩 흔들어 놓은 민심이 다시 황실로 기울고 있다며 난리를 쳐 대서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던 참인데.
끝내 두 황자는 저의 관대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옆에 서 있던 리비엘의 심복, 게르펜이 묻자 리비엘은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아드넬을 잡아야지.”
“그 마녀 말입니까?”
“원래는 바스토르를 끌어내리고 테시우스를 추대할 생각이었다. 그것만큼 순탄한 길이 없으니까. 한데 그의 정인이 마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겠느냐? 황제로 올리긴커녕 둘 다 폐위되겠지. 아드넬의 정체를 밝히겠다는 건 그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고자 함이었다.”
테시우스에게 있어 아드넬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얼마나 큰 약점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려고.
만약 본래 계획대로였다면 아드넬을 제 손아귀에 두고 테시우스를 황제로 올렸을 것이다.
이후론 느리지만 꾸준히 몸에 퍼지는 독을 먹이고, 아드넬을 인질로 삼아 제게 섭정을 맡기겠다는 유서를 쓰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리고 마탑까지 집어삼켜 섭정에서 황제로 당당히 올라가려 했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저들이 끝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기울어진 민심을 다시 바로잡아야겠지.”
황실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건 잊힌 역사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피해자로 둔갑시킨 테시우스 또한 말이 많아질 테지.
그러니 이전의 계획은 버려야 했다.
마지막 방도는 하나, 사람들에게 추악한 과거를 보여 주고 황실에 반기를 들게 하는 것.
그리고 아드넬의 능력과 그의 마력으로 마탑을 집어삼킨 뒤 스스로 황좌에 오르는 것뿐이다.
명백한 반역이라 일부러 순탄한 방법을 쓰려던 건데 이젠 어쩔 수 없었다.
‘테시우스를 만났을 때 이미 각오는 했다.’
다만 황성에 있는 아드넬을 어떻게 산 채로 잡아 오느냐가 관건이었다.
“내가 준 마도구들은?”
“모두 챙겼습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할 거다. 바로 내일, 대업을 이룰 것이다.”
단호한 목소리에 게르펜의 붉은 눈동자 위로 감격이 차올랐다.
드디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주군께서 이 나라의 진정한 황제가 되는 것이다!
게르펜은 가슴 위로 주먹을 올리며 온 마음을 다해 외쳤다.
“존명!”
* * *
한편 그 시각, 아드넬은 초조한 얼굴로 황제 케르시우스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칸 후작의 포박령은 황제 대리로 있는 바스토르의 권한으로도 얼마든지 내릴 수 있지만, 굳이 황제를 통해 명령을 내리려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진짜 범인을 잡고 싶으실 테니까.’
그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죗값을 짊어져야 하니까.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가 정인을 잃은 분노로 이 땅에서 지운 목숨이 몇 개던가, 그 무게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터다.
그런데 일말의 사죄도 죄책감도 없이 편안히 세상을 뜨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아드넬은 그렇게 생각했다.
“……쿨럭!”
그때 죽은 듯이 침상에 누워 있던 케르시우스가 마른기침을 하며 몸을 떨었다.
궁의가 급하게 그의 등을 받쳐 세우고 미지근한 물을 먹이자 오래도록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위로 올라갔다.
“……리……아누…….”
“…….”
비로소 제 목소리가 나오게 되자마자 케르시우스가 내뱉은 말은 죽은 정인의 이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라니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지만 참으로 무정하다는 듯……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그대로 몸을 돌려 황제의 침실을 나섰다.
“정신이 드십니까, 폐하.”
“리……아누는…….”
“리아누 황비 전하는 오래전 돌아가셨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 아아……. 그랬지……그랬어…….”
의식이 없는 동안 그는 어떤 기억 속을 헤매고 다녔던 걸까.
수척한 얼굴 위로 사무치는 그리움과 허탈함이 떠올랐다.
“……너희는…….”
뒤늦게 케르시우스의 금안 위로 저를 쳐다보는 인영이 비쳤다.
황태자 바스토르, 그리고 리아누가 남기고 간 테시우스였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게.”
“예, 전하.”
바스토르의 축객령에 궁의는 빠르게 침실을 나갔다.
탁하며 문이 닫히자 바스토르는 궁의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으며 케르시우스를 응시했다.
“폐하께 간곡히 청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너는 이미 내 대리로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으냐.”
“리아누 황비 전하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 순간, 리아누라는 이름에 간신히 반만 뜨고 있던 눈이 확 벌어졌다.
“리, 리아누가……! 쿨럭!”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급히 말하려니 기침이 차오른 듯, 케르시우스는 몸을 굽히며 울컥 핏덩어리를 토해 냈다.
그러나 그는 기침이 멎자마자 다시 몸을 일으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아누가, 살아 있는 거냐? 그녀가 아직……!”
“……아닙니다. 리아누 황비 전하께선 돌아가셨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시신을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잠시나마 희망이 어렸던 눈동자의 빛이 꺼져 들어갔다.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기에,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몸 상태로 오매불망 그 사람만을 찾는 걸까.
‘만약 내가 죽었더라면 전하께서도 저런 모습이셨을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욱신거릴 정도인데, 케르시우스의 모습 위로 테시우스가 겹쳐 보이니 더욱 마음이 아파 왔다.
나라면 절대 그러길 원치 않았을 텐데.
아드넬이 생각하던 중, 바스토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리아누 황비 전하의 독살범을 찾았습니다.”
“……날 놀리려는 것이냐.”
그 순간 케르시우스의 낯빛이 바뀌며 매서운 눈초리가 바스토르를 향했다.
리아누가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죽었다는 걸 재차 알려 줬으면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독살범을 찾았다니 놀리는 게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할 리 없는 것이다.
그 생각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바스토르가 덧붙였다.
“폐하께서 사형대로 보내신 전 프리테 가주는……. 진범이 아닙니다.”
“뭐……?”
“황비 전하의 진짜 독살범은 가짜 범인을 내세운, 리비엘 라이칸 후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