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33)화 (133/141)

133화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파르치가 죽어 가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알라니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스토르에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니? 라이칸 후작이 마법을 쓴다니, 거기에 마녀 숙청은 또 뭐고?”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바스토르가 손을 뻗었다.

그는 이제 꽤 주름진 알라니아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 말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어머니. 천천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바스토르는 간결하지만 상세하게, 빠른 듯하지만 조곤조곤히 과거의 일을 읊어 주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말하는 바스토르의 모습에 아파르치는 말문을 잃었고, 알라니아는 경악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러…… 그러니까……. 마녀가 다 사라진 것이 실은 황실에서……. 아아…….”

이젠 어지럽기까지 하다는 듯 알라니아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바스토르에게 기대었다.

무너지듯 비틀거리는 어머니의 몸을 받쳐 안으며 바스토르가 우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라이칸 후작은……. 그 사실을 밝히려 하고 있습니다.”

“뭐, 뭐? 기어코, 기어코 그 인간이……!”

지금 하는 것들을 모두 멈추지 않으면 아드넬이 마녀라는 것을 밝히겠다 협박했노라고.

그게 아니라면 황실의 역사를 밝히겠다 말했노라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알라니아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녀는 곧장 몸을 곧추세우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드넬이 마녀라는 걸 밝혀야 해.”

“어머니……!”

“약을 나누어주다가 멈추면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겠느냐? 황태자가 저들 목숨을 쥐락펴락한다는 얘기가 또 돌지 않겠니? 그리고 그 역사를 밝히면? 황실의 권위는 물론이고 이를 뒤받쳐주는 마법사들의 명성까지 바닥을 치고 말 게다. 하지만 아드넬의 정체를 밝히면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모든 것이 끝나.”

바스토르가 경악해 소리쳤으나 알라니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이에 테시우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알라니아를 노려보았고, 아드넬은 고개를 수그린 채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렴, 마녀가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는 비기를 사용할 줄 안다면 그거야말로 큰일 아니겠니? 만약 아드넬이 살아남아 라이칸 후작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아드넬의 능력을 빌미로 네 자리를 위협한다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지킬 테니.”

그때 테시우스가 차디찬 음성으로 말하자 알라니아가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아드넬의 정체를 밝히지 않겠다?”

“진실은 언제고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 추악한 과거를 또다시 죄 없는 사람의 피로 덮을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너도 알고 있지 않니?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뿐더러 심하면 반역까지 이어질 수 있어. 이 고귀한 피를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자 책무다.”

“일이 이렇게 되고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 마녀가 퍼트린 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건 타인의 희생으로 간신히 병을 피해 가신 황후 폐하께서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뭐, 뭐야?”

“애당초 고귀한 피라는 것도 존재치 않습니다. 초대 황제는 그저 힘을 가진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제국령을 선포했고 스스로 황제라 칭제한 것뿐, 그 또한 칼로 찌르면 죽는 건 매한가지인 똑같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테시우스!”

“이 자리에 모셔서 이야기해 드린 것은 진실을 알려드리기 위함이지, 황후 폐하께 어떤 조언을 얻고자 함이 아닙니다. 전 절대, 아드넬의 정체를 밝히지 않을 겁니다.”

테시우스는 그리 말하며 옆에 앉은 아드넬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리비엘이 세레나와 손을 잡고 병을 퍼트렸다면 아드넬은 그 병을 치료하고자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제 몸도 다 낫지 않았으면서, 한시라도 빨리 약을 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던 사람.

만약 아드넬이 없었더라면 누구 하나 회복된 사람도, 다시 얼굴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도 없었을 터다.

근데 그런 아드넬을 사지로 몰아가라고?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걸 그냥 두고 보라고?

절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만큼은 결코 용납 못 해.

결의에 찬 눈동자에 알라니아가 “허!” 하며 허탈한 소리를 내었으나, 바스토르는 테시우스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늦게나마 과거를 알게 되었지만 알게 된 이상 그 일을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저 또한 더는 다른 이를 희생양으로 삼아 진실을 묻어 두고 싶지 않습니다.”

“바스토르, 어찌 너마저……!”

“언제나 황실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노라 하셨지요. 하지만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진정한 군주는 나라와 백성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황실의 권위, 위엄, 그런 것은 사람의 목숨과 감히 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반역이라도 일어나면! 당장 사형대로 끌려가도 좋다는 말이냐?”

“백성의 고혈을 짜 그간 이다지도 부유하고 안온하게 살아왔는데, 조금 일찍 끝난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지요.”

당장이라도 윽박지를 것 같은 알라니아의 손을 더욱 세게 잡으며 바스토르가 말했다.

“저는 사람들을 치료할 것입니다. 제게 돌을 던지고 수없이 손가락질하더라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테시우스가 진실은 언제고 드러나기 마련이라 했지요, 저 또한 그 말에 동의합니다. 분명 백성들도 언젠가는 알아줄 겁니다.”

“죽은 뒤에 밝혀지는 진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안 된다, 바스토르. 이 어미는 네가 위험한 길을 걷길 절대 원치 않아……!”

“어머니. 어머니께서 그리도 절 생각하시는 마음만큼이나 테시우스 또한 아드넬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알라니아는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 당연한 그 사실을 때론 너무 쉽게 잊곤 한다.

바스토르를 위해 수도 없이 다짐했던, 지켜 주고자 하는 그 마음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테시우스 또한 절대 안 된다고 외치는 저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아드넬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 염려하시는 게 무엇인지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해서 저는……. 황실을 지지하고자 합니다.”

“뭐……?”

“제 짐작대로라면 라이칸 후작은 저의 정체보단 역사를 밝히려 들 것입니다. 그가 세레나와 손을 잡은 사람이라면 비기 또한 가지고 있을 소지가 다분합니다. 실제로 세레나가 2황자 전하의 저주를 풀어 드렸으니까요. 하지만 세레나는 죽었고, 그런 상황에서 저까지 죽으면 비기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를 약점으로 2황자 전하를 위협할 수도 없게 되지요.”

그래, 생각해 보니 그렇다.

리비엘이 말한 ‘지금 하는 일을 멈추어라.’라는 것은 바스토르의 입지를 다시 끌어내리려는 목적으로 보였으니까.

만약 바스토르가 황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연히 테시우스가 물려받게 될 텐데, 이미 한 차례 2황자를 협박한 그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 조카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까지 일을 벌였을까?

‘오히려 날 이용해 2황자 전하를 휘두르려 들겠지.’

정말 최후의 보루가 아닌 이상 마녀라는 걸 밝히진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테시우스를 동요하게 만들고 협박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해서 아드넬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분명 황실의 역사를 밝힐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나서 마녀라는 사실을 제 입으로 말하려 합니다.”

사실 마녀는 무고했다, 라는 소리가 퍼졌을 때 역으로 내가 마녀라고 밝힌다면?

전염병 치료제를 만든 게 바로 나였고, 그 치유력을 보여 준다면?

적어도 테시우스가 걱정하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일은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드넬은 그때 한 가지 얘기를 덧붙일 생각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무고함을 증명하며 앞으로도 계속 황실을 지지하고 충성을 바치겠다 맹세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무척 동요할 텐데.”

“물론 처음에는 그렇겠지요. 그러니 대비 또한 필요합니다.”

“대비라면 어떤?”

“황제 폐하께 도움을 구할 생각입니다. 잠시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해 주는 약 제조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사용하면 잠깐 의식이 돌아오실 거예요.”

“이후엔?”

“약간의 도박이긴 하지만…….”

아드넬은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리비엘이 엄마의 아버지를 협박해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들었다면, 리아누 황비와 그 오라비인 리오넬을 죽인 것도 가족에 대한 일말의 정도 없는 리비엘일 거라고.

황제 케르시우스의 분노는 프리테 가문의 몰살로 이어졌지만 타오르는 복수심이 사그라든 뒤 남은 건 오직 공허함 뿐이었다.

그런데 만약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실제 범인이 따로 있었다면?

케르시우스는 죄책감 때문에라도 다시금 일어날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으니 더더욱 힘을 내겠지.

그리고 라이칸 후작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솔직하게 털어놓을지도 몰랐다.

“저는 황제 폐하께 라이칸 후작의 포박령을 내려 달라 부탁드릴 생각입니다.”

물론 그에게는 리비엘이 진짜 범인이라고, 미처 확인하지 못한 얘기를 해야겠지만.

난데없는 포박령에 리비엘은 분명 당황할 터다.

하지만 그다음은…….

‘상황이 아주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겠지.’

진실을 밝히려 드는데 때마침 포박령이 떨어졌다?

또다시 황실에서 감추려 들고자 저를 잡으려 한다고 당당히 소리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어쩌면 순순히 잡혀 줄지도 모르지.

그때를 이용하는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민심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형을 거행하라 명하시면 절대 가만히 있진 않을 거예요. 분명 지금껏 숨겨 온 마력으로 저항할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때부터가 중요합니다.”

아드넬은 목소리를 낮추어 여러 가지 짐작과 그에 대한 방도를 설명했다.

머지않아 네 사람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럼 일단 기다려 보자고. 라이칸 후작이 움직일 때까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