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그리고 아드리아나는……. 나와 다시 재회하고 3개월이 된 어느 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정확히는 너를 갖고서.”
아드리아나를 빼닮은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본래 머리 색도 나와 같은 밀빛이었을 테지.”
“……맞습니다.”
“너는 아드리아나의 눈동자와 나의 머리칼을 나누어 가졌구나.”
그리 말하며 호르세는 어딘가 아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저 말은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를 의미하고 있었다.
‘내 아버지…….’
엄마는 아버지에 대해 딱히 말해 준 게 없었다.
누명을 쓴 탓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남아 있다가는 아버지에게 큰 해가 갈까 봐, 라는 말 말고는 이렇다 할 외모의 특징조차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 아드넬은 훗날 살롱을 세우면 엄마의 이름으로 지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지만 혹시나 엄마를 기억하고 찾아올까 싶어서.
엄마는 언제나 사랑을 넘치게 주었지만, 넘치던 사랑은 오히려 엄마가 떠난 후 가족에 대한 공허함과 크나큰 그리움으로 돌아왔다.
내게도 든든한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드넬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호르세가 제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마냥 기쁜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고 그냥, 간질거린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던 호르세는 곧 고개를 돌려 바스토르를 응시했다.
“이건 제 짐작일 뿐입니다만……. 라이칸 후작이 아드리아나가 말했던 ‘남자’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라이칸 후작의 과거사를 들어보니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습니다. 리아누 황비 전하가 승하하시고 머지않아 리오넬 또한 독살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둘과 아무런 접점이 없던 전 프리테 가주님은 자신이 독살범이라 자백했지요.”
아드넬이 본 장면에서 전 프리테 가주는 엄마에게 자세한 상황은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게 정말 협박을 받은 것이라면?
“전 프리테 가주님은 아드리아나를 무척 사랑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목숨이 위협당하자 딸을 지키기 위해 받아들이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드리아나도 아버지를 끔찍이 생각했으니 자신을 걱정한 나머지 도망치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숨기신 것 같고요.”
어쩌다 리비엘이 마녀 숙청의 역사가 기록된 문서를 손에 넣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이미 본모습을 드러냈다.
명백한 무언가를 향해 강한 탐욕을 드러냈고, 테시우스를 협박하기까지 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심증은 충분했다.
“문제는 마탑주와 황후 폐하의 반발입니다. 라이칸 후작의 말대로라면…….”
그는 지금 하는 일들을 모두 멈추라 했다.
바닥으로 떨어졌던 황태자의 명성을 다시 높이고 사람을 치료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아드넬이 마녀라는 것을 폭로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것이라 했다.
설령 아드넬에 관해 알려지더라도 어떻게든 그 인식을 바꾸어 놓겠다 말하니 그럼 반대로 황실의 추악한 과거를 밝힌다 했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게끔 길을 다 막아 버린 것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만 그 영향은 생각보다 클 거야.’
마녀 숙청과 황실의 욕심은 언뜻 보면 평민들에게 그리 큰 타격을 주지 않을 것 같지만, 깊게 파고들어 보면 다르다.
황실에선 저들에게 대적하는 것이 두려워 무고한 사람들을 산채로 불태워 죽였을 뿐만 아니라 민가에 마수까지 풀어 선동했다.
즉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수백 수천이 죽는 것쯤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지금, 전염병이 창궐했다.
사람들은 아직도 황태자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2황자를 해치고 마녀와 손을 잡아 병을 퍼트렸다는 의구심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실의 과거가 드러난다면?
치료 약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고자 하는 것도 허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과거와 같은 역사가 반복된다며 저들의 목숨 따윈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는 황실을 향해 반기를 들 터였다.
염려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그러한 과거를 밝힌 라이칸 후작을 추대할지도 모릅니다.”
리비엘은 테시우스에게 ‘진실을 밝히는 영웅에 대한 찬사’라는 말을 했다.
그 영웅이라 함은 바로 자기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여러모로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건 평민이었다.
하지만 리비엘이 그런 평민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진실을 밝혔다 말하면?
황실의 과거와 현재의 소문이 합쳐지면서 사람들이 들고일어날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절대 허락지 않으실 거다.”
황실의 위엄과 권위를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현 마탑주 또한 마침내 그러쥔 마법사의 높은 입지를 잃고 싶지 않을 터였다.
더구나 마탑주는 황실 일원도 몰랐던 과거의 기록을 대대로 물려받아 진작 알고 있음에도 밝히지 않았다.
그 추악한 과거의 진실이 밝혀진다면 그의 권위가 얼마나 바닥을 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단 마탑주를 불러 얘기를 들어 보도록 하지. 리비엘의 말만 듣고 믿을 수는 없으니.”
* * *
이날 늦은 밤, 아파르치는 간만에 마탑을 벗어나 황성으로 향하게 되었다.
‘갑자기 왜 이 늙은이를 부르시는 건지.’
지금 수도에 퍼진 병은 마법사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대뜸 도움을 구하더니, 얼마 전에는 어떤 강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을 남부에서 대량으로 들여왔다.
딱 거기까지였다, 황태자가 알려 준 것은.
그리곤 난데없는 치료 약을 개발했다며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마라이 병은 마녀와 함께 사라졌다.
그 말인즉슨 치료할 수 있는 건 마녀뿐이라는 소리다.
인위적으로 퍼트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마녀는 이미 죽었다고 했다.
그러면 치료 약을 만든 건…….
‘아니, 아니야. 설마 정체를 감춘 마녀가 한 명 더 있으려고.’
아파르치는 가슴 한쪽에 차오르는 불안을 애써 외면하며 황태자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윽고 도착한 그곳엔 바스토르와 테시우스, 황후 알라니아와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제국의 하늘을 수호하는 고귀한 검이자 방패이시며, 제국의 땅을 비추는 지고한 별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아파르치.”
바스토르는 무덤덤한 얼굴로 비어 있는 자리를 권했다.
아직까지는 자신을 부른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알라니아가 조금은 불만 어린, 또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왜 우리를 부른 거니?”
마탑주는 알라니아의 신뢰를 깨나 받고 있어, 알라니아는 굳이 예를 차릴 것 없이 편히 말했다.
바스토르도 그에 응하듯 답했다.
“마탑주, 그리고 어머니께도 드릴 이야기가 있어 이리 와 주시길 청하였습니다.”
바스토르는 그리 말하며 테시우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뒤를 이어 테시우스가 말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혹 리비엘 라이칸 후작이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가?”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오자 아파르치가 잔뜩 주름진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리며 놀란 기색을 띠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리비엘이 한때 마법 아카데미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차기 마탑주로 내정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마법에 두각을 보이는 귀족가 자제야 퍽 흔했을뿐더러 말 그대로 내정이었을 뿐, 공표된 것도 아닌 데다 리비엘이 여기저기에 자기 얘기를 하고 다니는 유형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형이 생을 달리한 뒤 자연스레 가주직을 물려받았고 이후로도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파르치는 돌아가신 스승님이 죽기 직전 못내 안타까워하던 것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했다.
‘그 녀석이 내 자리를 물려받았어야 했는데……. 그 능력이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으니…….’
당시 리비엘은 이 길은 제 길이 아닌 것 같다며 마탑주의 자리를 거절했다고 했다.
그렇게 공석은 자연스레 2인자였던 아파르치에게 돌아왔다.
한때는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것에게 밀려났다는, 끝까지 리비엘을 찾는 스승님의 모습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마법에 완전히 손을 뗀 건지 가문의 일에만 몰두하기에 어느 순간부턴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 리비엘에 대한 얘기가 나오다니.
아파르치가 되묻자 테시우스가 답했다.
“라이칸 후작이 찾아왔었다. 마도구도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도 어떤 장면을 보여 주더군.”
이상하게도 테시우스는 그를 외숙이라 부르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들 앞에선 늘 외숙이라 부르던 그였는데,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생각하는 찰나였다.
“그는 현 마탑주가 아닌 자신이 마녀 숙청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를, 무려 원본을 가지고 있다 말했다.”
“어, 어떻게…….”
일순 아파르치의 주름진 노안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 기록은 저 또한 일찍이 보았다.
스승님이 자리를 물려주면서 누구에게도 보여 줘선 안 된다 했던 그 기록은 끔찍하고도 악랄한 과거의 잔상이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모두 끝난 지 오래라 그리 생각했고 마녀에 관한 것만큼은 결코 밝힐 수 없다 다짐했다.
이 기록을 보유하고 알고 있는 이상, 그게 밝혀지는 순간 지금껏 마탑이 쌓아 올린 수많은 명성은 바닥을 치게 될 테니까.
그런데 리비엘이 그 문서를, 심지어 원본을 가지고 있다고?
“저, 절대 아닙니다……! 만약 제가 가지고 있는 문서가 복제된 것이라면 진작 눈치를 챘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그…… 그건…….”
생각해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만약 리비엘이 돌아가신 스승님과 자신을 뛰어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면…….
‘복제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와중에 테시우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복제된 것’이라니, 그 말인즉슨 실제로 그 문서가 있다는 소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