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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31)화 (131/141)

131화

바스토르는 미안함을 살짝 담아 아드넬을 쳐다보곤 다시 호르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실 아드넬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네.”

“예? 그 무슨…….”

일전에 아드넬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일부만 공유해 준 터라 호르세는 아드넬이 남장 중이란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것 외에도 바스토르는 그간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전염병의 치료 약을 만든 사람이 아드넬이라는 것이나, 그녀의 동업자로 있는 카리아 상회의 주인이 대신 약을 나눠주고 있다는 것 등 그가 수도 밖에 있을 때 전해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상황이 꽤 나아진 편이야. 마도구로 하르트 공녀의 상태를 보여 준 것도 한몫했지.”

그러나 바스토르의 말에 테시우스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리비엘을 만나기 전엔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상상 이상의 이야기를 들은 지금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한 건 아드넬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지…….’

꿈에서 엄마와 당신을 봤는데 무슨 사이냐고?

왜 나한테 눈동자 색에 관해 물었었냐고?

게다가 엄마가 쓴 누명에 대해선 아드넬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보니, 자칫 죄인으로 몰리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도 들었다.

테시우스야 자신을 믿어 줄 테지만 다른 두 사람의 반응까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바스토르가 퍽 심각한 표정의 둘을 발견하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둘 다 얼굴이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 그게…….”

사실 얘기하려고 찾아온 건 맞다.

아드넬의 목숨과 황실의 권위, 둘 중 하나를 두고 선택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로란트 후작까지 있다 보니 테시우스는 조금 머뭇거렸다.

이를 알아챈 호르세가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전하.”

“아, 안 돼요……!”

그러나 이번엔 아드넬이 막아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꿈은 분명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제가 긴히 여쭐 것이 있어서…….”

“내게…… 말이냐?”

“예.”

단호한 대답에 호르세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 청년, 아니.

남자인 줄로만 알았던 아가씨가 제게 물어볼 게 달리 뭐가 있다고?

더군다나 한동안 수도 밖을 돌아다닌 탓에 별관에서 보았을 때 이후로 이렇다 할 접점도 딱히 없었다.

궁금한 건 호르세뿐만이 아닌 듯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 또한 아드넬에게 향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자리에서 모두들 얘기하지. 로란트 후작은 믿을 만한 사람이네.”

사실 지난번 일 이후로 마탑주에게까지 소상히 알리지 않을 만큼 경계심이 곤두선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바스토르는 호르세를 믿었다.

그가 지금껏 보여 준 충심 어린 모습들이 있었고, 또 여러 가지 사건이 있을 때 자신의 명령으로 줄곧 자리를 비우고 있었으니까.

테시우스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를 믿는 바스토르의 선택을 자신 또한 믿기로 했다.

아드넬이 뒤따라 앉자 테시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오늘……. 외숙이 찾아왔어.”

“라이칸 후작이? 갑자기 무슨 일로?”

“나한테 할 말이 있다더군. 아주 중요한 얘기라기에 응했는데, 그때 외숙이…….”

당시를 다시 곱씹어보니 가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 감정은 리비엘이 보여 준 건방진 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믿었던 외숙의 배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테시우스는 애써 분노를 삭이며 리비엘이 해 준 이야기를 천천히 늘어놓았다.

마녀 숙청의 역사를 설명할 땐 누구보다도 아드넬이 가장 크게 놀랐고, 그다음에 이어진 리비엘의 짤막한 과거사엔 잠깐 안타까움 어린 눈을 하긴 했으나 결론에 다다르자 기가 막힌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걸 멈추지 않으면 아드넬이 마녀라는 걸 밝히든지, 황실의 과거를 밝히든지 하겠다는 건가?”

“맞아.”

“하……!”

바스토르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소리를 내었다.

지금껏 꽤 조용히 있어서, 더군다나 리아누 황비의 독살범을 잡은 사람이라서 용의선상에 두지 않았을 뿐인데.

인제 보니 가족에 대한 정은커녕 황실에 대한 충성심도 없었다.

오히려 끌어내리려고 하고 있지.

“이제야 모든 게 들어맞는군.”

여태 벌어진 일들의 주동자는 리비엘이 분명했다.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잊힌 과거의 진실과 역사뿐만 아니라, 지금 테시우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약점으로 잡아 흔들려 하고 있으니.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늘 덤덤한 눈동자 속에 무슨 탐욕이 깃들어 있다는 건지 보고도 납득되지 않아 제발 그만하라 소리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라니아는 진작 리비엘의 속내까지 들여다본 것이다.

어쩌면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사람이라 서로 알아본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그녀가 한 수 앞을 내다봤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진작 그 말을 믿었더라면 지금 같은 일은…….

‘아니야, 그땐 심증조차 없는걸. 과거로 돌아간들 결과는 같았을 거야.’

바스토르는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아드넬 너는, 하려던 얘기가 무엇이지?”

“아, 그게…….”

아드넬은 저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어오는 바스토르를 쳐다보았다가 호르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흠칫하며 몸을 살짝 떠는 것같이 보였다.

아드넬은 잠깐의 고민 끝에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실은……. 오늘 잠깐 선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장면들을 보았어요.”

앳된 모습의 엄마를 떠나보내던 붉은 머리칼의 사내가 어떤 ‘남자’를 운운하며 목걸이를 지켜야 한다 말했고, 그다음엔…….

“로란트 후작님이 나오셨습니다.”

“내가 나왔다고?”

“정확히는 제 어머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드넬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말했다.

“어머니께선 후작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호르세, 믿어 줘요……! 우리 아버지는 이번 일과 전혀 관계가 없어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간절한 외침.

그러나 아드넬이 그 대목을 입 밖으로 내자 호르세의 푸른 눈동자가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저 말은, 분명 아드리아나가 떠나기 전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라고…….’

아드넬은 엄마가 누군가 아버지를 찾아왔고 그 사람이 아버지를 협박한 것이라 말했다며 덧붙였다.

전부 다 그날 아드리아나가 했던 말이었다.

호르세가 말문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아드넬은 살짝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저희 어머니와 무슨 관계셨는지……. 물론 꿈에 불과하긴 하지만 일전에 제게 눈동자 색에 관해 물어보신 적도 있고 하셔서…….”

“난……. 나는…….”

하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켈리언이 어딘가 엘튼을 닮은 듯하다는 말을 했을 때도 동요하긴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아드넬은 아드리아나를 엄마라고 말했다.

아드넬은 아드리아나의 찬란한 바닷빛 눈동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리고 염색한 지 오래 지나 물이 빠진 머리에선 얼핏 자신의 밀색 머리칼도 보였다.

‘3개월…….’

아버지의 강요로 다른 여자와 혼인했지만 아드리아나를 잊을 수 없어 다시 찾았다.

앞으론 절대 당신을 놓치지 않을 거라, 어떻게든 당신만큼은 지켜 주겠노라 약속했지만 아드리아나와 재회한 지 3개월이 된 어느 날 그녀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을 위해 떠난 것이었다.

반역자의 딸이 낳은 황실 기사단장의 사생아라는 오점을 주고 싶지 않아서.

동시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아드넬은, 눈앞에 있는 저 아이는.

내 딸이었다.

“아드리아나는…….”

호르세가 마침내 말문을 열자 아드넬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벌어졌다.

말하지도 않은 엄마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심장이 쿵쾅거리며 크게 박동하는 순간, 호르세가 덧붙였다.

“그녀는 내 정인이었다.”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놀라기로는 바스토르와 테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대에겐…….”

“벨라는……. 아버지의 강요로 성사된 혼인 상대였을 뿐, 제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아드리아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은 역사에서 사라진 가문, 프리테 가의 외동딸이었습니다.”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국에서 부모의 죄는 곧 자식의 죄였다.

그 연좌제의 대표적인 예가 지금은 앓아누운 황제의 악명으로, 리아누 황비의 죽음에 관여한 가문과 그 핏줄을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 버린 일이었다.

그런데 그 가문이 엄마의 가문이었다고?

그럼 2황자 전하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범인이…….

“…….”

테시우스는 어느새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설마하니 아드넬과 어머니의 죽음이 이렇게 연관될 줄은 상상도 못 한 탓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테시우스는 정신을 차리고 아드넬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는 괜찮아, 아드넬.”

“하지만…….”

“누명일 뿐이라는 건 알고 있어. 네가 꿈에서 본 그 장면은 분명 진실 같으니까.”

호르세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녀가 꿈에서 본 장면은 실제로 로란트 후작이 겪은 일이었다.

어떻게 아드넬이 과거의 일을 꿈에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의 어머니는 언제나 결백을 주장했다.

그에 응하듯 호르세가 덧붙였다.

“제가 봐 온 전 프리테 가주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독살범이라 이미 시인한 상황이라, 아드리아나의 말을 믿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확실히, 당시 논란이 좀 있긴 했지.”

청렴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이라, 바스토르 또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 호르세가 아드넬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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