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여긴 분명…….’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 속, 아드넬은 멀건 눈으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미 한 차례 와 본 곳이었다.
등에 큰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맬 때 겪어 본, 끝이 없는 길을 걷고 또 걸었던 바로 그 공간이었다.
‘하지만 왜?’
그때야 의식이 없었을 때라지만 지금은 아닌데.
그냥 깜박 선잠이 들었을 뿐인데.
꼭 깨어 있는 것처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어쩌다 다시 이 공간에 들어오게 된 건지 이상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다.
이 공간을 자각하고 머지않아 주변이 점점 일그러지듯 일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뿌옇던 안개는 차츰 사라지며 한 폭의 풍경으로 바뀌었고, 반대로 몸은 안개처럼 흐려졌다.
아드넬이 당황해 반투명하게 바뀌어 가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사이 아무것도 없던 공간은 이상하게 비틀리더니 이내 어느 순간으로 변모했다.
‘……엄마?’
꽤 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어느 방 안이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두 명, 타오르는 화염같이 붉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와 앳된 얼굴의 여자였다.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여자는 달랐다.
기억에서 많이 흐려지긴 했어도 저가 어린 시절 기억하는 엄마의 얼굴이 분명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고생한 흔적도, 잔주름도 찾아볼 수 없는 앳된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 그 사람은 네 신변을 보장하겠노라 말했지만 절대 믿어서는 안 돼.]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게다가 도망이라니, 그리고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두고 혼자 떠난단 말이에요? 저는 싫어요……!]
[아드리아나, 네가 성인이 되던 날 내가 해 준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물론이에요. 어떻게 그 끔찍한 역사를 잊을 수 있겠어요.]
[원래는 우리 또한 그리될 운명이었지. 그동안은 가문의 이름 뒤에 안전히 숨어 있을 수 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우리가 살아남은 것이 비기를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게 무슨……!]
[이 아비는 괜찮다. 저들도 쉬이 나를 어쩌진 못할 게야, 그러나 딱 하나……. 네가 마음에 걸리는구나.]
사내는 그리 말하며 아드리아나를 꼭 껴안았다.
[소중한 내 딸, 귀하디귀한 내 딸아. 이 아비는 너를 정말 많이 사랑했단다. 그러니 부디 살아다오, 모든 죗값은 내가 짊어질 테니 부디 너만은 행복하게 살아다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그러니 제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이것뿐이란다. 난 괜찮을 테니 어서…….]
아드리아나는 사내의 품에 안긴 채 서럽게 눈물을 쏟아 냈다.
어찌나 서럽게도 우는지 보는 이의 마음이 찡해질 정도였다.
그녀가 한바탕 울고 나서야 사내는 낡고 볼품없는 나무 상자를 아드리아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 목걸이만큼은 절대 잃어선 안 된다. 어딘가에 우리처럼 숨어 사는 마녀가 있을지 몰라, 그들이 그녀와 손을 잡고 목걸이까지 사용한다면 저들 마음대로 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게야.]
[……명심하겠어요. 제 목숨과도 같이 지킬게요.]
[그래……. 그러면 되었다. 자, 어서 가거라.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구나.]
사내는 아드리아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얼핏 강경해 보이지만 눈가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웃어 보였다.
괜찮노라, 그리 말하며 사랑하는 딸을 마지막으로 배웅했다.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아껴 주셔서, 지켜 주셔서……감사합니다, 아버지.]
[나 또한 네 아비로 살 수 있어 행복했단다. 이별은 잠깐이니 너무 괴로워 말고, 다시 만나자꾸나.]
아드리아나는 더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온 마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해 보이는 모습을 끝으로 그 장면은 끝이 났다.
‘이게 대체…….’
내가 방금 뭘 본거지?
엄마의 저 앳된 얼굴은 또 뭐고?
어딘가에 숨어 사는 마녀와 손을 잡는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드넬로서는 두 사람의 대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혼란스러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다음 장면이 또다시 구름처럼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호르세, 믿어 줘요……! 우리 아버지는 이번 일과 전혀 관계가 없어요!]
아까 전 보았던 것보다 훨씬 남루한 차림이 된 엄마, 그리고 그녀의 간절한 외침에도 남자는 입술을 짓씹을 뿐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일찍이 아드넬도 보았던 사람, 황실 친위대 기사단장으로 있는 로란트 후작이었다.
[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드리아나, 그대의 아버지가 이미 죄를 시인했어.]
[누군가 아버지를 찾아왔어요, 그 사람이 아버지를 협박한 게 분명해요! 누명을 쓰신 거라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드리아나는 절절하리만큼 간절한 음성으로 외쳤다.
만약 내가 그날 그렇게 떠나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캐물었더라면…….
아드리아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모든 정황이 그대의 가문을 가리키고 있어. 그뿐만 아니라 자백까지 하셨는걸.]
[그것이 진실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어떻게 당신마저!]
[당연히 난 당신의 말을 진심으로 믿지만 죄를 시인한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어, 아드리아나…….]
[……당신이 못하겠다면 좋아요, 내가 어떻게든 아버지를 살리고 말 거예요.]
단호함과 결단이 느껴지는 얼굴로, 아드리아나는 원망을 한껏 담아 호르세를 쳐다보곤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호르세는 그런 그녀를 미처 잡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홀로 남은 그의 넓은 등이 무척이나 작아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 또한 아까처럼 차츰 흐려졌다.
‘역시 우리 엄마를 알고 있었어, 하지만 무슨 사이지?’
말을 편히 하는 걸로 봐선 꽤 친근한 사이 같은데…….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왜 이런 장면이 보이는 건지, 그것들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
아드넬은 돌덩이라도 얹은 양 갑갑하기만 한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엄마를 다시 만난 건 좋지만, 엄마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괴로워…….
‘엄마…….’
그 간절한 바람에 응하듯 일순 공간이 회오리치듯 일그러졌다.
그때도 이렇게 빠져나왔었어, 아드넬이 퍼뜩 떠올리고 휘몰아치는 감각에 몸을 맡긴 순간이었다.
“……허억!”
격한 숨을 들이켜며 번쩍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눈에 익은 가구들, 깜박 잠들었던 침대까지.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하지만 가슴은 여전히 콩닥거렸고, 이마엔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 나와 있었다.
아드넬은 소매로 땀을 훔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본 것들이 정말 단순히 꿈에 불과할까?’
꿈이라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그 대화들도 직접 들은 것처럼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말로, 간단히 치부할 일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너무 강했다.
‘때마침 로란트 후작이 황태자 전하를 대면하고 있어.’
수도에 전염병이 창궐한 후 바스토르는 곧장 호르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당시는 전염병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만약 전염성이 있다면 사람을 통제해야 병이 더 크게 퍼지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르세는 주변 영주들이 지원해 준 병사들과 함께 수도로 통하는 모든 출입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보고를 위해 올라온 참이었다.
‘그에게 물어보면 뭔가 알 수 있을 거야.’
꿈에서 본 장면에 불과하다 보니 어쩌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한때 나를 불러 눈동자 색에 대해 묻기까지 했으니까, 분명 어머니와 아는 사이일 거야.
그리고 엄마는 아까 꿈에서 본 것처럼 어떤 큰 누명을 쓰고 도망치듯 가문을 나왔다고 했어.
아드넬은 생각을 마치고 간단하게 씻은 뒤 곧장 바스토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법사를 불러 새로이 결계를 쳐 놓은 응접실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무슨 일인지 테시우스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어딘가 깊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발만 쳐다보며 걸어오는 그를 발견한 아드넬이 조금 놀라 외쳤다.
“2황자 전하……!”
“……아드넬?”
그제야 고개를 든 테시우스는 잠시간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드넬에게 다가와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오늘도 하르트 공녀와 있을 줄 알았는데.”
“아, 그게……. 로란트 후작님께 긴히 여쭐 것이 있어서요.”
“로란트 후작이라니?”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보다 전하께선 황태자 전하를 뵈러 오신 건가요?”
“……응, 맞아.”
그리 말하는 얼굴이 퍽 심각해 보였다.
이에 아드넬 또한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아, 아니야. 그냥 오늘따라 기분이 저조해서 그래. 그보다 일단 들어가지.”
테시우스는 더 말해 주는 대신 닫힌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안에서 들어오길 허락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성큼 응접실 안에 들어섰다.
대화가 끝나지 않았는지 아드넬이 찾던 호르세 또한 아직 안에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음……? 두 사람 다 어쩐 일이지?”
바스토르가 의문을 담아 쳐다보는 사이, 아드넬을 발견한 호르세의 동공이 가늘게 떨려 왔다.
‘뭔가 아드리아나를 좀 더 닮은 듯한…….’
왜 저 청년만 봤다 하면 그녀가 떠오르는 건지, 왜 자꾸만 가슴에 동요가 이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바스토르가 “아차.” 하며 호르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후작은 아직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