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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29)화 (129/141)

129화

선대 라이칸 백작은 지금과 다르게 일개 지방 영주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는 슬하에 자식 셋이 있었다.

장남 리오넬, 차남 리비엘, 독녀 리아누였다.

선대 백작은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단순히 장남이라는 이유로, 그는 리오넬이 태어나자마자 라이칸 백작가의 차기 가주로 내정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후계자의 자리와 아버지의 관심을 독식하고 자란 리오넬은 뒤이어 태어난 리비엘을 저보다 한참 아래로 보곤 했다.

나이 차이가 꽤 있다 보니 마음에 안 들면 한 번씩 두들겨 팼고, 제 어린 동생은 그럴수록 위축되어 감히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리오넬은 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

제아무리 망나니짓을 해도 한때의 방황이라며 금세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 다독여 주는 아버지만큼 믿음직한 존재가 없었다.

반면 리비엘은 백작가에서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 안쓰럽게 생각해 챙겨 줄라치면 리오넬이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두들겨 패고 쫓아내기 일쑤이니 어느 누구도 그에게 따듯한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선대 백작도 이를 방관했다.

어차피 가문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건 장남뿐이었고, 이도 저도 아닌 차남은 대부분 당연하다는 듯 마법 아카데미로 보냈다.

졸업하면 마탑에 들어가 가문의 이름을 잃게 될 아들은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 리아누가 태어났다.

참으로 예쁘고, 착하고, 화사한 봄꽃 같은 아이였다.

리비엘에겐 그리도 못되게 굴던 리오넬은 사근사근하고 예쁜 짓만 골라 하는 첫 여동생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리아누를 끔찍이도 여겼다.

그건 선대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답고 다정한 아가씨를 백작 저의 모든 사용인이 사랑했고, 그녀가 따스한 햇살처럼 사랑받으며 무럭무럭 클 때 리비엘은 아카데미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마법에 큰 두각을 보였다.

마탑주가 직접 찾아와 만난 뒤 내심 차기 마탑주로 점찍을 만큼, 타고난 마력도 강대했거니와 술식을 응용하는 머리도 뛰어났다.

성과를 낼수록 아카데미 내에서 리비엘의 입지는 높아졌다.

백작 저에선 늘 위축되어 있던 리비엘도 그곳에서만큼은 꽤 큰 자존감을 품을 수 있었다.

딱, 그곳에서만.

“어떤 성과를 내도 기뻐하지 않으셨지. 당연히 1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무엇을 보여 준들 성에 찰까.”

마탑에 들어가면 가문의 이름을 버리고 황실 소속 마법사로서 살아가야 한다.

마탑주가 되어도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

가문에겐 하등 도움도 안 되는 차남의 성과 따위를 그 보수적인 아버지가 칭찬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막내는 달랐다.

사교계 데뷔를 위해 수도로 올라간 리아누는 데뷔탕트에 참석한, 당시 황태자였던 케르시우스의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첫눈에 리아누에게 반해 버린 케르시우스는 리아누의 사랑을 갈구하며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수많은 재화는 물론이요, 일부러 공을 독차지할 기회까지 주어 라이칸 백작가를 무려 후작가로까지 높여 주었다.

평생을 지방 영주로 있던 선대 백작이 크게 기뻐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더 이상 지방 영주가 아닌 수도 중앙 귀족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그동안 실컷 놀기만 하던 리오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후작의 자리까지 얻어 냈고, 케르시우스의 부단한 노력에 끝내 마음의 문을 연 리아누는 황비가 되었다.

“그때 내가 아비라는 사람에게 들은 말이 무엇인지 아느냐? 지금껏 보인 성과를 칭찬하는 것이 아닌, 훗날 마탑주가 되어 리아누에게 힘을 실어 주란 소리였다.”

황후의 견제가 심할 터이니 오라비인 네가 힘이 되어 주라고.

황실의 힘은 마탑에서 나오니 네가 리아누의 든든한 뒷배가 될 것이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모든 면에서 내 능력이 훨씬 출중한데 둘째라는 이유로 가문을 이어받을 수도 없었다. 한데 망나니 같은 형에게 밀려난 것도 모자라 동생의 뒷바라지까지 하라고? 가족이라면 응당 그 불공평함까지 받아들여야 하느냐?”

리비엘의 분노는 머지않아 황제에게로 이어졌다.

황제의 사랑, 그것 하나 때문에.

무엇 하나 뛰어난 것 없는 인간은 후작이 되고 얼굴 빼곤 볼 것 없던 동생은 황비가 되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건 제아무리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마법사가 되어도 그들의 머리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휘두를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오직 황제, 그 자리에 오른 자만이 가질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제게 한 횡포를 고스란히 돌려주려면 그 자리에 올라야지만 가능했다.

“때마침 리아누가 임신하고, 난 그 기록을 보게 되었지.”

처음엔 때를 노렸다.

제 혼자 힘으론 어려우니 순순히 마탑주가 되고 이후를 도모할 생각이었다.

그때 우연히 마녀 숙청의 역사가 적힌 기록을 보게 되었다.

선대 마탑주가 언젠가 흘러가듯 ‘훗날 네가 마탑주가 되면 보여 줄 것이 있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이를 기억하고 강대한 마력으로 봉인된 문서를 몰래 찾아본 것이다.

선대 마탑주와 현 마탑주조차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당시 리비엘은 진작 마탑주의 마력을 뛰어넘은 상태였으나 훗날을 위해 일부러 감추고 있었는데, 덕분에 수월하게 봉인을 풀고 그 문서를 복제해 원본을 챙겨 올 수 있었다.

‘한데 문서에 설마하니 반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줄은.’

마녀의 핏줄에 반응하는 반지는 남은 마녀를 찾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반지만 있다면, 마녀를 이용해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는 비기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때문에 리비엘은 이 길은 제 길이 아닌 것 같다며 차기 마탑주의 자리를 거절했다.

마탑주라는 자리에 묶여 버리면 은밀히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리비엘은 손쉽게 그 반지를 만들어 냈고, 프리테 가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귀족이라는 신분 뒤에 숨어 지금까지 숨어 있던 마녀의 잔당.

그들은 아직까지도 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마치 하늘이 제게 기회를 주는 것처럼,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리비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리아누를 독살했다.

딱히 애정도 없는 여동생이라 그런지 죄책감도 없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리아누는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고,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은 리오넬과 차기 황제가 될지 모를 황자의 어미를 잃은 아버지는 길길이 날뛰었다.

이때 리비엘은 혼란을 틈타 형 리오넬 또한 같은 독으로 죽인 뒤, 대리인을 보내 프리테 가주에게 이 두 사람의 독살범이라 자백하라 말했다.

신분과 가문 뒤에 숨어 마녀의 핏줄을 지켜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차피 모두 죽은 목숨이나, 비기를 넘기면 딸만은 살려 주겠다는 협박에 하나뿐인 외동딸을 끔찍이 여기던 프리테 가주는 결국 자신이 독살범이라는 거짓 자백을 고했다.

정인을 잃은 케르시우스는 그날로 프리테 가문의 핏줄과 역사를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으나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모조품 목걸이만 남긴 채, 죽은 프리테 가주의 딸이 진짜 목걸이를 들고 도망친 것이다.

리비엘은 본래 그녀를 이용해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어 반역을 일으킬 생각이었으나 마녀도, 목걸이도 없는데 비기를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에 오랜 시간을 들여 수소문한 끝에 새로운 마녀와 목걸이의 행방을 찾았고, 그러다 세레나를 찾았다.

하지만 목걸이가 없으면 능력의 증폭이 불가능했고 세레나는 프리테 가의 도망친 딸보다 힘이 부족했다.

이후로 당연하다는 듯 이어진 기다림의 연속.

그렇게 수많은 나날이 지났다.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왔다.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고, 그 시간 동안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인간적인 마음은 차츰 마모되어 끝내 복수심과 야욕만이 남았다.

목표는 오직 황제라는 자리 하나, 그리고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것뿐이었다.

두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은 고통을 충분히 느끼도록 지금까지 살려 두었으나 그걸로는 모자랐다.

저가 어린 시절 부당하게 받아야 했던 몰매와 억압, 방치와 방관이라는 학대의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했다.

그래야 타산이 맞지 않겠는가.

리비엘은 충격으로 떨리는 테시우스의 동공을 응시했다.

‘너는 꿈에도 모를 테지.’

한 번도 본 적 없으나 그리워 마지않는 어머니를 죽인 장본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물론 이러한 진실까지 다 밝힐 생각은 없었다.

리비엘은 여전히 ‘가족이라면 응당 그 불공평함까지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말에 머물러 있는 테시우스에게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끝이다. 하니 현명히 판단하거라, 황실의 권위가 추락하는 순간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될 테니.”

다름 아닌 나, 리비엘이.

처음에야 다소 잡음이 있을 테지만 늘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더럽혀진 황실의 핏줄 따위를 운운할 가능성도 물론 있으나 애초에 고귀한 피라는 건 없다.

스스로를 황제라 칭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엔하시아 대제국의 초대 황제가 그랬듯이.

‘일단 아드넬부터 빠른 시일 내에 잡아 와야겠어.’

아드넬은 테시우스의 가장 큰 약점이자 리비엘에겐 아주 유용한 무기였다.

그녀만 있으면 얼마든지 테시우스를 협박할 수 있고, 언제든지 짐승으로 바꿀 수 있었다.

어차피 리비엘이 바라는 건 황제라는 이름이 아닌 그가 부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고, 꼭 황좌에 앉아야지만 황제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테시우스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우는 것쯤이야.’

리비엘은 생각하며 충격에 잠긴 테시우스를 두고 홀연히 자리를 떴다.

꽤 느릿한 발걸음에도 그는 리비엘을 잡지 못했다.

잡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머리가 복잡하고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지금껏 벌어진 모든 일의 배후가 외숙이었다니.’

세레나와 손을 잡았노라 제 입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한 얘기만으로도 심증은 충분했다.

그는 아드넬의 정체는 물론이고 과거의 감춰진 진실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곤 아드넬이 마녀라는 것을 밝히거나 잊힌 역사를 밝히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도가 없어…….’

한 가지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고 궁지에 몰리게 된다.

끝나지 않는 굴레 속에 갇힌 기분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테시우스는 고통스럽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시각, 고통스러운 건 아드넬도 마찬가지였다.

난생처음 보는 기억 속에 갇혀 버린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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