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리비엘은 “제가 직접 두 분 전하를 뵙고 오겠습니다.” 하며 빠르게 자리를 뜨고는, 케르페온의 저택을 나서 황성으로 향했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황성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전염병이 막 발발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문 앞을 지키는 근위병도 한 명이나마 있었고 사용인들도 얼굴에 복면을 쓴 채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병에 걸린 다른 동료들을 간호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 사람들이 황성 밖으로 나간다면…….’
황태자가 개발했다는 그 치료제에 신뢰가 더욱 크게 실리겠지.
사실 저들이 아니더라도 이미 수도 사람들이 대거 약을 받아 갔으니 조만간 사실화될 일이기도 했다.
마음이 조급했다.
케르페온은 마부를 재촉해 마차를 좀 더 빠르게 몰게 하고는 본성 앞에 도착하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테시우스를 만나야 해!’
리비엘은 테시우스의 성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겉으로는 강인하고 단단한 듯 보이지만 속은 여리디여린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젖 한번 물지 못한 아이는 어미의 손길과 사랑을 언제나 갈구해 왔고, 가슴 한쪽의 결핍은 이복형이 내민 온기를 생명줄처럼 붙잡게 만들었다.
설마하니 바스토르가 푸른 피가 흐를 것 같은 차가운 황후의 시선을 피해 제 이복동생을 진심으로 챙길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피로 이어진 가족인 건 바스토르뿐만 아니라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이라. 그래, 가족이지.’
문득 리비엘의 얼굴 위로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으나, 그는 금세 미소를 지우고 걸음을 재게 놀렸다.
지나가는 사용인을 불러 세워 테시우스의 행방을 찾던 리비엘은 머지않아 그가 서재에 있음을 전해 듣고 빠르게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2황자 전하, 리비엘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건지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이 사달이 벌어지기 전까진 손에 꼽을 정도로 왕래가 적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돌려보낼 이유도 없었다.
안에서 들어올 것을 허락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리비엘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꽤 넓은 서재는 주인의 성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고요한 분위기가 겉으로는 생글 웃으면서도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바스토르를 보여 주는 듯해 리비엘은 잠깐 미간을 좁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지우고 테시우스에게 다가갔다.
책장에 기대어 선 채 책을 읽던 테시우스는 가까워진 인기척에 턱 하고 책을 덮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또 보는군요, 외숙.”
“하하…….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이어지다 보니 마음에 근심 또한 많아져서 말입니다.”
리비엘은 태연하게 답하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히 무예를 갈고 닦진 않았지만, 주변에 인기척은 달리 느껴지지 않았다.
이를 확인하고서야 리비엘이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실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만큼 결코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되는 이야기라 여기서 말을 꺼내도 될지…….”
사뭇 심각한 표정에 테시우스는 잠깐 침묵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서재는 바스토르의 밀실과 이어져 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아드넬은 진작 율리시아의 침실 옆으로 거처를 옮겼고, 바스토르는 친위대 기사단장인 로란트 후작을 불러들여 수도 밖의 상황을 전해 듣는 중이었다.
“이곳엔 우리 둘뿐이니 편히 말해도 됩니다, 외숙.”
“전하께서 그러시다면…….”
리비엘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며 창가 앞에 마련된 책상으로 그를 이끌었다.
테시우스가 먼저 착석하자 리비엘 또한 뒤이어 앉았다.
그러나 리비엘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크게 놀란 건 바로 다음이었다.
무려 리비엘이, 테시우스 앞에서 대놓고 한쪽 다리를 꼬며 앉았기 때문이었다.
“……외숙?”
“아, 우리 둘뿐이니 좀 편히 해도 되지 않겠느냐.”
대놓고 하는 건 그 건방진 태도만이 아니었다.
리비엘은 씨익 웃어 보이며 무려 하대까지 하고 있었다.
이를 들은 테시우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글쎄다, 네가 한 일에 비하면 내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터인데.”
“뭐……?”
“너희 두 이복형제와 그 마녀의 계략 덕분에 내가 아주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어.”
그 순간 테시우스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마녀……!’
아니, 아닐 거야.
세레나도 마녀였으니까, 아드넬을 콕 집어 지칭하는 게 아니야.
지레 겁먹을 필요 없어 하고 생각하는 찰나 리비엘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아드넬 말이다, 여태 남자인 척 사람들을 속여 온 그 요망한 년.”
네 희망을 산산조각 내 주겠다는 듯, 말을 내뱉는 얼굴에 거만함이 가득했다.
실제로도 테시우스의 가슴은 또 한 번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동요를 감추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면서도 마치 짓씹듯 내뱉었다.
“무슨 말인지……하나도 이해하지 못 하겠군요.”
“이런, 바보같이 모른 척하며 시간이라도 끌 셈이냐? 부질없다. 아드넬이 마녀라는 건 짐작을 바탕으로 한 말이 아니니까. 그저 사실일 뿐이지.”
과연 제 말마따나 단순한 짐작을 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테시우스가 끝내 부득 이를 악물자 리비엘도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며 낯빛을 굳혔다.
“지금 벌이는 일들을 모두 멈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아드넬이 마녀라는 걸 만천하에 알려 주마.”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다른 귀족파는 몰라도 외숙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뭐라고? 어째서?”
“아무리 라이칸 가가 귀족파에 속해 있다지만 외숙의 누이가 곧 제 어머니시고 또 총애받던 황비 전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러나 테시우스의 말에 리비엘은 별 같잖은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차가운 음성으로 답했다.
누이?
가족?
그까짓 게 뭐라고?
테시우스는 몰라도 자신에게 그딴 건 하등 쓸모없는 것에 불과했다.
굳이 따지자면 쓸모없는 게 아니라 경멸스러움에 가까웠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같은 편에 서야 하느냐? 무슨 일을 하든 도와 주고 지지해 줘야 하느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면 달리 누구를 믿을 것이며 온 마음으로 믿어 준단 말입니까?”
“가족이 아니어도 그러한 사람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리비엘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아까 꺼낸 얘기를 재차 언급했다.
“그래서, 내 말을 따르겠느냐?”
“……절대 안 됩니다. 아드넬을 사지로 몰아갈 수는 없습니다.”
테시우스는 강경한 목소리로 말하며 죽일 듯이 리비엘을 노려보았다.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 아드넬이 마녀라는 걸 밝히면 아드넬은 세레나가 저지른 죄까지 모두 뒤집어쓰고 말 것이다.
치료 약을 만든 장본인이나 사람들은 그 진실을 믿지 않을 것이며, 병이 낫는다고 해서 고통받은 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이 소중한 이를 잃었다.
태어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아기를 잃은 엄마, 아픈 아내를 지극히 간호하던 남편, 평생 제 뒷바라지만 해 온 어머니를 보살피던 효심 어린 자식까지.
병은 그들을 잃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남은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지독하게도 괴롭히고 있었다.
그 고통이 씻은 듯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아드넬의 정체를 밝힌단 말인가.
테시우스가 절대 안 된다는 듯 답하자 리비엘은 쯧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돈푼 쥐여 주면 당장이라도 덥석 안겨 드는 여자가 수두룩한데 어쩌다 그런 것에게 홀렸는지 한심하기 그지없구나.”
“아드넬이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한 마디만 더 꺼내면 그 입을 완전히 찢어 줄 테니.”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살벌한 협박을 내뱉는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그러나 리비엘은 여전히 태연했다.
여전히, 한심하다는 얼굴이었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않겠느냐? 더 큰 사달을 만들고 싶은 거라면 그리하고.”
“대체 무슨 짓을 꾸미려는 거야.”
“글쎄다……. 따지자면, 진실을 밝히는 영웅에 대한 찬사라고나 할까?”
알쏭달쏭한 얘기에 테시우스가 눈썹을 치켜들자 리비엘이 그에 응하듯 답했다.
“어쩌다 마녀가 숙청되었는지는 알고 있느냐?”
“그야 사악한 주술을 부리고 마수를 조종한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리 알고 있으면 안 되지. 이미 아드넬의 능력을 보지 않았니, 그것이 능력을 사용해 치료 약을 만드는 것도.”
심지어 리비엘은 아드넬이 치료 약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도, 마녀의 능력이 치유에 가깝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말로, 짐작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아는 것이었다.
테시우스가 두 눈을 크게 뜨자 리비엘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어찌 알았는지 퍽 궁금한 눈치군. 물론 말해 줄 생각은 없다만.”
“……당신 말대로 세간에 알려진 마녀의 인식과 실상은 전혀 달라. 만약 당신이 아드넬의 정체를 밝힌다면…….”
이제 더는 방법이 없었다.
테시우스는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 또한 최선을 다해, 마녀에 대한 인식을 바꿀 거야. 결코 아드넬을 죽게 두지 않아.”
“그래 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원래 내가 하려던 일이었는 걸.”
“그건 또 무슨…….”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한다. 마녀에 대한 오래 묵은 진실을 밝히는 순간, 네가 가진 고귀한 핏줄은 추악하게 더럽혀질 테니까.”
오래된 역사이나 리비엘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 증거도 손에 쥔 지 오래였다.
테시우스가 분기로 몸을 살짝 떨자 리비엘은 잠시간 “흐음…….” 하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너무 답답하게 만드는 것도 능사는 아니지. 마녀에 대한 진실을 정녕 듣고 싶다면 어디 한번 부탁해 보거라.”
생글생글 웃는 낯짝에 당장이라도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지만, 리비엘의 계획을 아주 일부라도 알아야지만 대비를 할 수 있었다.
테시우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부탁……합니다, 외숙.”
“그래, 그리 고분고분한 태도로 나와야지. 자, 그럼 말해 주마. 아주,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