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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26)화 (126/141)

126화

율리시아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가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소식에 바스토르는 무척 기뻐했다.

그와 더불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낸 테시우스를 크게 칭찬했다.

설마하니 천연두 치료 약을 어느덧 평민들에게 친숙해진 ‘마르타’와 연관 지어 생각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건 그 브랜드를 만든 장본인인 아드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테시우스는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도 멋쩍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사실상 도박이었는걸. 하르트 공녀가 제안을 수락했기에 가능한 일이지, 내가 한 건 딱히 없어.”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신 게 대단한 일인걸요. 진작 말씀해 주셔도 됐을 텐데…….”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기껏 희망 품게 만들어 놓고 실패하면 실망감만 배가 될 테니까, 두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어.”

내 남자지만 참 세심하기도 하지, 아드넬은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테시우스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몸도 좋고 얼굴도 빼어난데 배려심도 넘치고 어디 하나 모자란 곳이 없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더없이 예뻐 보여, 아드넬이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이제 다시 시작해 보자고요! 하르트 공녀님은 제가 맡을 테니 두 분 전하께선 마도구를 구해 주시고 수도의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설치해 주세요.”

“기록용 마도구는 황성에 있으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수고해 줘, 아드넬.”

“물론입니다. 맡겨 두세요.”

율리시아의 과거사를 듣기 전에도 아드넬은 그녀를 보노라면 어딘가 마음 한쪽이 늘 짠했다.

그토록 간절히 빌면서도 속사정을 털어놓지 못하던 그때도, 물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고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하물며 진실을 들은 지금은 어떻겠는가,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안쓰럽기 그지없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챙겨 주고 싶고 정성껏 보살펴 주고 싶었다.

물론 그러려면 제 건강도 중요했다.

병에 옮지 않도록 방비를 단단히 하고 깨끗한 물수건과 치료 약 등을 챙긴 아드넬은 곧장 율리시아의 침실 옆에 있는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곤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약을 먹여 주고, 흉터 치료제를 거리낌 없이 발라 주고, 먹기 편하도록 묽고 부드러운 죽까지 끓여 챙겨 주었다.

그 모습은 모두 마도구에 기록되어 하루의 시간 차를 두고 황성 입구 앞에 고스란히 송출되었다.

주로 재판할 때 사용되는 마도구인지라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끔 영상 또한 무척이나 크게 재생되었는데, 갑작스러운 마도구의 등장에 자연스레 이목이 끌렸다.

“저게 뭐지?”

“누구를 간호하는 듯한데…….”

“지금 먹이는 건 뭐야? 어떻게 저런 색이 나오지?”

찰랑이는 황금빛 액체는 척 보기에도 무척 신비로웠다.

딱 한 스푼씩만, 그것도 시간에 맞춰 먹는 걸 보면 무슨 약인듯한데 색만 보더라도 굉장히 귀해 보이다 보니 어딘가 전설 속에 나오는 만병통치약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개중에는 율리시아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 저 머리색은……!”

“하르트 공녀님 아니야?”

“확실해! 얼굴에 발진이 생기긴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야.”

간호받는 사람이 그 귀족파 공녀였다는 소식은 맨 처음 발발했던 소문처럼 금세 퍼져 나갔다.

여기에 기록용 마도구는 장면뿐만 아니라 음성까지 기록하기 때문에, 율리시아와 아드넬의 대화 또한 널리 울려 퍼졌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공녀님?]

[아주 편해졌어요. 열이 가라앉아서인지 더는 머리도 아프지 않고, 몸에 생긴 농포도 차츰 사라지고 있고요.]

[딱 적당한 때에 사용하신 덕입니다. 농포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깊은 흉터로 자리 잡기 때문에 그 전에 사용해야지만 가장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데, 확실히 차도를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배려 덕분이지요. 저는 아직 거동이 어려우니 아실라 님께서 대신 감사의 말씀을 전해 주세요.]

[예, 공녀님.]

어딘가 작위적인 분위기가 나는, 하지만 일상적인 얘기를 하듯 편안한 대화였다.

그리고 이 대화는 확실한 파란을 몰고 왔다.

“확실히 더 심해지진 않는 것 같은데?”

“오히려 전보다 나아진 것 같아.”

“처음 봤을 때보다 혈색도 훨씬 나아지셨어.”

“그런데 황태자라니? 그 사람이 만든 약을 썼다는 거야?”

“그게 문제가 아냐, 아실라라잖아! 그 카리아 상회를 통해 평민에게 저렴하게 화장품을 공급하겠다던!”

“그 신기한 연고를 만들던 사람 말이지?”

이러한 변화를 그냥 두고 볼 아드넬이 아니었다.

테시우스가 권한 대로, 아드넬은 클리프의 도움을 받아 카리아 상회에서 ‘마르타’라는 이름으로 치료제를 무료로 나누어 주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율리시아가 치료받는 동안 클리프도 꾸준히 약을 먹으며 차도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클리프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카리아 상회 본점으로 향해, 마차에 한가득 싣고 온 치료 약을 대놓고 나눠 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꺼리는 기색 또한 있었다.

아직까진 바스토르에 대한 반감이 큰 탓이었다.

그러나 마도구가 보여 주는, 실제로 율리시아가 나아지는 모습과 더불어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아드넬의 말이 사람들에게 조급함을 불어 넣었다.

‘지금 제국엔 저 약 말고는 다른 치료제가 없어.’

‘미심쩍다고 계속 안 쓰다가 흉하게 얼굴이 일그러지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는데…….’

‘그 공녀님도 쓰는 건데 괜찮지 않을까?’

‘황태자는 몰라도 카리아 상회라면 믿을 만하긴 해.’

처음엔 머뭇거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말 효과가 있겠지요?”

“사람을 조종하거나 그런 약은 아닙니까?”

“꾸준히 쓰면 흉터가 사라진다는 게 정말인가요?”

절박하기에 원성도 컸지만 그 분노만큼이나 간절한 게 치료제였다.

클리프는 당당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지금 제 얼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 또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기절하듯 잠이 들고 깨길 반복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기력도 많이 회복되었을뿐더러 몸에 생긴 발진도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흉터로 자리 잡기 전에만 사용하면 본래 얼굴을 되찾을 수 있어 꾸준히 바르는 중인데 실제로 농포가 차츰 옅어지는 중이고요.”

“하지만 황태자가 만든 약이라는데…….”

“근래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는 건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의 시녀로 있던 마녀가 정체를 숨기고 벌인 일입니다, 전하와는 일절 관계가 없을뿐더러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누구보다 먼저 치료 약을 개발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일부러 공녀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그렇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인데.”

역시나 아직까진 완전한 신뢰를 얻기 어려웠다.

그러나 클리프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사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대 강요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그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뿐입니다. 병을 치료하고 싶은 분은 약을 사용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있으시면 되는 겁니다.”

“……나, 나는 써야겠어! 이 얼굴로 평생 살고 싶진 않다고……!”

그때 인파 속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증상이 심각했는데, 맨 처음 전염병이 퍼졌을 때 별궁에 있던 사람처럼 얼굴이 농포로 뒤덮여 피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같은 병에 걸렸으나 상대적으로 증상이 덜한 사람조차 보고 얼굴을 찡그릴 만큼 흉측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클리프는 주저 없이 그의 손에 약병을 쥐여 주며 당부했다.

“하루만 늦어도 흉터로 자리 잡았을 텐데 딱 적기에 찾아오셨습니다. 얼굴을 잃고 싶지 않다면 이 연고를 꾸준히 바르셔야 합니다. 너무 많이 바르지도, 또 적게 바르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병의 진행을 멈추고 치료하는 약입니다. 하루 세 번, 한 스푼씩 드시면 됩니다.”

“지, 진짜로 효과가 있겠죠?”

“하르트 공녀님과 저, 그리고 옆에 있는 제 심복 또한 이 약을 먹고 차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대형 상회의 주인이 무려 보증까지 한다니 남자의 눈동자에 희망이 어렸다.

그는 두 개의 치료제를 소중히 품에 안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외치기 시작했다.

“나도 줘요!”

“우리 애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어, 저 약이라도 쓰지 않으면……!”

“하루에 세 번만 먹으면 된다는 거죠?”

몰려든 인파가 상당했지만 로한이 익숙하게 그들을 제지하면서도 한 사람씩 줄을 지어 서게 만들었다.

저마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클리프의 설명을 들으며 약을 받았고, 희망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소식은 소문을 낸 장본인인 리비엘과 케르페온의 귀에도 빠르게 들어갔다.

“그 멍청한 것이 결국……!”

병에 걸렸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치료제가 없는 병이었다.

그건 비상 소집 회의에서 황태자가 자기 입으로 한 말이었다.

모두가 그 말을 믿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율리시아, 네가 끝내 나를 거스르는구나.’

치사율이 높긴 하지만 전해 들은 바론 아주 심각한 상태도 아니라고 했다.

어차피 약도 없는 병이라니 늘 그랬듯 방치했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케르페온이 분노로 부득 이를 가는 사이, 리비엘 또한 심란함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치료 약이라니, 그걸 만들 만한 사람이라면 분명…….’

아드넬.

테시우스가 홀딱 빠져 있는 요망한 계집.

세레나처럼 정체를 숨기고 있는 마녀였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그년이 마녀라는 걸 밝힐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랬다가는…….’

황태자를 끌어내리고 빈자리에 테시우스를 추대하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고 만다.

지금 바스토르에 대한 소문처럼 테시우스 또한 마녀와 손을 잡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완전히 홀려 버렸다 알려질 테니.

반대로 밝히지 않으면 일부러 소문까지 낸 일이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민심은 다시 황태자에게 기울 것이고, 순조롭게 황좌에서 끌어내릴 수가 없다.

‘……결국 그때가 왔는가.’

언젠가 진실을 밝힐 때가 오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일렀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마침내 결단을 내릴 순간이 온 것이다.

리비엘은 황성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오늘, 테시우스를 직접 만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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