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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25)화 (125/141)

125화

“전부터 아드넬 님께는 못난 모습만 보이는 듯하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공녀님.”

“2황자 전하께는 말씀을 드렸지만……. 아드넬 님께 꼭 드리고픈 이야기가 있어 청을 드렸어요.”

“편히 말씀하십시오.”

율리시아는 잠시간 숨을 돌리더니 그녀 특유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사내라면 일단 거부감부터 느껴졌는데, 아드넬 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무척이나 편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던 청년.

남자 특유의 거만함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대화를 나누노라면 되레 배려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친하지도 않은 아드넬을 우연히 만난 순간 저도 모르게 붙잡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고, 율리시아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무리한 부탁에도 아드넬 님께선……. 끝내 절 도와주셨지요.”

그때 율리시아가 베개 밑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작은 종잇조각 하나를 꺼냈다.

얼마나 많이 만졌는지 모서리가 닳고 구겨진 자국이 명확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위에 쓰인 글귀는, 아드넬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문구였다.

[……이렇게밖에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더는 아파 눈물 흘리시는 일이 없길 바라며.]

“그 짧은 글귀가 뭐라고 그토록 큰 위안으로 돌아오는지 저도 알 수 없었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제게 누구도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공녀님…….”

“율리시아. 편히 율리시아라 불러 줘요.”

그리 말하며 웃는 얼굴이 어쩐지 무척 아프고, 쓰려 보였다.

비록 하관은 손수건에 다 가려진 채지만 아드넬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예, 율리시아 님.”

“……어머니는 저를 낳으시고서부터 몸이 많이 약해지셨어요. 나름대로 어머니를 사랑하신 아버지는 그 잘못을 저에게로 돌리셨죠. 물론 그러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처음엔 방치였다.

케르페온은 율리시아에게 일절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 대신 젖을 물려 준 유모는 젖을 떼자마자 저택에서 나갔고, 전담 하녀의 배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별도의 지시도 없는데 저들이 주제넘게 나서서 할 리가.

그렇게 율리시아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혼자 커야만 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 기억엔 침실을 청소하러 들어왔다가 나가거나, 눈앞에 음식 그릇을 내려놓고 나중에 치우는 하녀들밖에 없었다.

“그 흔한 놀이 친구도 갖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늘상 말씀하셨거든요, 제 수준에 맞는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은 황제파인 디아나 공녀뿐인데 적과 사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 외엔 모두 자기 아래인데 어디 아랫것과 친분을 맺느냐면서요.”

불행은 그때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인 불행은 그보다 후에 찾아왔다.

어느 정도 머리가 자랐을 즈음,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미색이 빛을 발하던 때.

나름 사춘기라는 게 찾아왔을 시기에 율리시아는 난생처음 반항이라는 것을 해 보았다.

그 반항이라는 것도 매일같이 듣는 귀족파의 입지에 관한 이야기에 넌더리가 난 나머지 황태자와 꼭 혼인해야만 하느냐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케르페온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마찬가지로 한마디를 했다.

‘따라와라.’

율리시아가 아버지를 따라간 곳은 창문 하나 없는 창고였다.

그곳에서 그는 작은 촛불 하나만을 켠 채, 손에 채찍을 쥐었다.

‘엎드려.’

‘아, 아버지…….’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잘못,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말을……!’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채찍을 휘둘렀다.

이미 여러 차례 매질해 본 것처럼 익숙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곳만을 정확하게 노리며, 사납게 등을 후려치는 그 감각은 아프기도 무척 아팠지만 두려움에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케르페온은 율리시아가 살을 파고드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마저 용납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입 밖으로 소리를 낸다면 입에 재갈을 물려 주마.’

‘흑……. 흐흡…….’

율리시아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 잔인한 매질이 끝날 때까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억겁과도 같은 긴 시간이 흐르고서야, 케르페온은 기진해 쓰러진 율리시아를 그대로 방에 두고 나갔다.

그리곤 저택에 상주하는 의사를 불러 치료하게끔 했다.

케르페온이 기밀 유지 조건으로 엄청난 액수의 봉급을 주며 데리고 있는 의사는 약간의 치료 마법을 쓸 줄 알아, 등에 남은 상처는 흉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율리시아는 치료를 받고서도 그 창고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누구든, 제발 꺼내 주세요! 숨이 막혀서, 도저히……!’

빛이라곤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것이 전부.

아무리 간절히 도움을 요청해도 찾아오는 건 단 한 명, 케르페온 뿐이었다.

‘엎드려.’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 다시는, 절대 거역하지 않고 뭐든지 시키는 대로 따를게요! 그러니 제발……!’

‘두 번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빌어도 케르페온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채찍으로 매질을 하고, 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만들고, 창고에 가둬 두었다.

율리시아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길게 느껴졌던 그 나날이 끝난 건 창문 하나 없는 방에 감금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그녀가 케르페온의 말에 일말의 대답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구걸도,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지도 않게 되었을 때였다.

그제야 케르페온은 만족스럽다는 듯 한 마디를 남기고 문을 활짝 열어 둔 채 나갔다.

‘드디어 말 잘 듣는 개가 되었군.’

말 잘 듣는 개.

하라면 하고, 발을 핥으라면 핥는.

아비라는 사람에게 나란 존재가 어느 정도 위치인지 자각한 건 그때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어요. 제가 커갈수록, 어머니를 닮아갈수록 어머니는 몸이 더 나빠지셨다는 것을.”

어쩌면 아버지는 어미의 목숨을 갉아먹으며 자라는 딸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생명을 야금야금 훔쳐 가는 걸로도 모자라 감히 제게 반항까지 하니 이참에 길들여야겠다 마음먹은 걸지도.

그날로 율리시아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가 바라는 완벽한 딸이 되었다.

한 치의 오점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이란 단어가 자신 그 자체가 되도록.

그리고 황성에 들어왔다.

“……처음엔 잠잠했는데 황후 폐하께서 체스터 공녀를 아끼시니, 그 소식을 듣고 곧장 저를 찾아오셨어요.”

율리시아가 우연히 아드넬을 마주치고 제발 도와달라 부탁을 청한 전날이었다.

케르페온은 특유의 무감정한 얼굴로 율리시아를 빤히 응시하더니 거세게 뺨을 후려쳤다.

‘미련한 것.’

‘…….’

‘가진 거라곤 외모밖에 없는 것이 그마저도 제대로 활용을 못 하니 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작정하고 찾아온 듯 의사까지 대동한 채였다.

의사가 부어오른 뺨을 가라앉히자 케르페온은 율리시아의 손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손목이 부러질 듯한 강한 악력에도 율리시아는 신음을 흘리는 대신 대신 고개만 푹 수그릴 뿐이었다.

‘어떻게든 황태자를 네 것으로 만들어. 만약 황후의 관을 쓰지 못한다면 그날로 네 알량한 목숨도 끝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하도록.’

딸에게 내뱉는 말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시리고도 차가운 음성은 그가 떠나고도 연신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건 손목에 선명히 남은 푸른 멍 자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 더운 여름날 손목까지 내려오는 드레스를…….’

아드넬은 분노로 입술을 짓이기며 애써 욕지기를 참았다.

짐승에게도 그리 모진 매질은 하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사람에게, 그것도 제 딸에게 그런 극악한 짓을 하다니 듣고도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더욱 가슴이 아픈 건 그 지독한 과거사를 덤덤하기 그지없게 말하는 율리시아의 얼굴이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두 그런 제 사정을 알고 있어요. 태어나고 자란 집이지만 아버지에게 외면받는 딸은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더군요.”

누구도 진정으로 그녀를 따르지 않고, 보필하지 않았다.

아비에게 매질 당하는 딸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거니와 자칫하면 함께 싸잡혀 맞을지도 모른다 생각했기에.

그래서 율리시아는 자신을 따르는 하녀 한 명 데려오지 못했고, 황성에 들어왔을 때 케르페온이 급히 붙여 준 시녀들과는 친해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주면 또 매질을 당할까 툭하면 물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병까지 걸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죠, 제가 가진 건 반반한 얼굴 하나뿐이라고. 하지만 그마저도 잃은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요.”

“아닙니다, 공녀……. 아니, 율리시아 님. 이리 살아 계시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한때는 그리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려고요. 난 지금 살아 있으니까, 더욱 열심히 살아볼 거라고 다짐했어요.”

율리시아는 아드넬을 응시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사실 아드넬을 불러 달라 청한 건 약간의 충동에 가까웠다.

이러한 내 속사정을 누구든, 단 한 명만이라도 들어 줬으면 하는 오래된 바람을 아드넬이라면 들어 줄 것 같아서.

이기심이라 욕해도 좋고, 별거 아니라 치부해도 좋으니 딱 한 번만.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기만 했던 간절한 바람을 잠시나마 꺼내어 단 한 번만이라도, 욕심부리고 싶었다.

“2황자 전하께서 나가시기 전 제게 하신 말씀이 있어요. 아드넬 님께서 카리아 상회를 통해 ‘마르타’라는 이름으로 저렴한 화장품을 공급하셨다고요.”

“예, 맞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으면 한다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러길 바라요.”

아드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율리시아가 결단 어린 얼굴로 말했다.

“아드넬 님께서 만드신 약을 제가 먹을 테니 그 모습을 마도구로 기록해 대대적으로 홍보해 주세요. 병의 진행이 멈추고 새살이 돋으며 흉터가 사라지는 것까지 모두 다 기록해 마찬가지로 카리아 상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 주세요.”

“……아!”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황제파의 입지를 위해 귀족파 공녀까지 해쳤다는 등의 소문을 크게 잠재울 수 있을뿐더러 약의 효능까지 증명할 수 있었다.

더구나 마르타라는 브랜드가 평민들에게 꽤 친숙해졌으니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반발심을 다소 억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율리시아는 다시 한번 아드넬을 향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도 한번 반격을 해 보자고요. 선동하는 사람과 선동된 사람, 아울러 아버지 같지도 않은 사람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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