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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24)화 (124/141)

124화

낙담한 그의 포기 선언에도, 아드넬과 테시우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스토르의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가 갔기 때문에.

특히 그를 누구보다도 오래 지켜본 테시우스는 마치 자기가 겪은 일처럼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 왔는데. 제아무리 황태자라지만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고, 지칠 만도 해.’

바스토르는 언제나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황태자, 그리고 황제 대리라는 위치는 고귀하고 지고해 보이지만 실상은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였다.

그의 선택 한 번에 수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수 있고, 반대로 더 나아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바스토르는 가장 올바르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쉬지 않고 공부해 왔다.

그가 여태까지 해 온 모든 것들은 전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 이 나라와 그 땅 위에 살아 숨 쉬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한데 그들 모두가 등을 돌렸다.

너 나 할 것 없이 그를 비난하며 원망하고, 저주한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이라 한들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상처받지 않겠는가.

마침내 테시우스는 결단을 내린 듯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 어디 좀 다녀올게.”

“네? 갑자기 어딜…….”

“오래 걸리지 않아. 여기 있어.”

테시우스는 바스토르와 아드넬을 번갈아 보며 어딜 간다고도 말해 주지 않은 채 대뜸 밀실을 나섰다.

등 뒤로 궁금증 어린 시선이 따라왔지만 아직은 말해 줄 수 없었다.

테시우스는 좁은 복도를 지나 밀실과 연결된 서재로 나왔다.

그리곤 주저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금세 목적지에 다다랐다.

다만 아직은 백신이 없어, 그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뒤에야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나.”

그러나 이상하게도, 방 주인의 위치를 생각하면 하녀든 시녀든 나와야 할 텐데 누구 하나 문을 대신 열어 주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테시우스는 잠시간 미간을 좁혔다가 하는 수 없이 직접 열고 들어갔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테시우스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잠시 할 얘기가 있는데 괜찮은가.”

“……2황자……. 전하십니까…….”

가냘프고 메마른 음성이 미약하게 들려왔다.

어차피 보이지 않을 테지만 테시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전…… 괜찮습니다.”

“그럼 실례하지.”

그제야 테시우스는 등을 돌리고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반투명한 커튼이 달린 캐노피 너머로 가쁜 숨을 내쉬는 인영이 보였다.

테시우스가 커튼을 걷어 올린 그곳엔 다름 아닌 율리시아가 있었다.

“전하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로…….”

“…….”

테시우스는 율리시아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름답고 곱던 피부엔 보기 흉한 농포가 곳곳에 올라와 있었고, 메마른 음성만큼이나 부르튼 입술은 핏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침대 옆에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물이 담긴 컵 한 개뿐.

어디에서도 간호인이나 간호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돌봐주는 사람은 어디에 있나.”

“……하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질문인데도 율리시아는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입꼬리는 올라갔을지언정 눈동자엔 일말의 웃음기도 들어있지 않았다.

율리시아는 간신히 고개만 돌려 테시우스를 응시했다.

“보시다시피……. 저 혼자입니다.”

“……일단 목부터 축이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율리시아는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조금만 거세게 바람이 불어도 뚝 하고 꺾일 것같이.

테시우스는 그녀의 등을 받쳐 살짝 일으켜 세운 뒤 직접 물을 먹여 주었다.

팔 하나 들 힘도 없던 참이라 율리시아는 감사히, 그러나 조금은 급하게 물을 받아 마셨다.

그제야 살 것 같다는 듯 갈라진 입술 사이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감사합니다, 전하.”

“아니다.”

“한데 전하께서 이곳까진…… 어쩐 일로 오셨는지…….”

베개로 등을 받치고서 앉은 율리시아가 힘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본론을 꺼낼 때가 된 것이다.

테시우스는 사뭇 심각한 얼굴로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채 손을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네게……. 긴히 부탁할 것이 있다.”

“제게요……? 하지만…….”

율리시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제 팔 하나 들 힘이 없어 물도 마시지 못했는데 무엇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다분히 보이는 표정에 테시우스가 잠시 머뭇거린 끝에 말했다.

“공녀도 알다시피 갑작스레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리고 그건…….”

“……마녀 때문이지요.”

“그래, 맞아.”

형체 있는 어둠이 몸을 통과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 식으로 병을 퍼트릴 존재라면 단연 마녀뿐이었다.

율리시아의 눈동자에 분노가 깃들자 테시우스가 이를 눈치채고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그 마녀는 진작 죽었어. 더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해.”

“……그렇다 한들 제가 겪는 이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요.”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

이어진 말에 율리시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분노보단 희망이, 그리고 간절함이 크게 어린 시선에 테시우스가 말했다.

“아드넬이 치료 약을 만들었어. 복용하면 병의 진행이 멈추고 차츰 회복된다더군. 그리고 흉터 치료제도 있어서, 꾸준히 바르면 얼굴에 남은 것들도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곧 사라질 거야.”

“그런……!”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

“그게 뭔가요?”

“그대의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야.”

그러나 ‘아버지’란 단어에 율리시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처럼, 누가 봐도 꺼리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바스…….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전염병을 퍼트린 마녀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여기 가담한 게 그대의 아버지, 하르트 공작이다.”

“네? 황태자 전하께서 마녀와 손을 잡았다니, 그리고 제가 아는 아버지는 절대 그러지 않으실…….”

“나도 한때는 그리 생각했지. 공녀를 황태자비 후보로 보낸 사람이 황태자 전하를 되레 궁지로 몰 줄은 몰랐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녀도 그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더군.”

디아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보필한 사용인이 몸을 던져 감싸 준 덕에 병을 피해 갈 수 있었다며, 테시우스가 덧붙였다.

“……결정적인 건 그 마녀가 정체를 숨긴 채 황태자 전하의 시녀로 있었다는 점이야. 그 때문에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황제파의 입지를 위해 그대를 공격했다고 추측한 것 같아.”

“하지만 사람을 가리는 병도 아니고 타인의 희생으로 피해 갈 수 있는 건데 그건 너무 억측인 듯싶습니다.”

“같은 생각이야. 하르트 공작은 아닌 것 같지만.”

테시우스의 말에 율리시아는 잠시간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대뜸 실소를 흘렸다.

그래, 그 사람이라면 그리 생각했을 수도 있겠구나.

율리시아의 얼굴 위로 조소가 떠올랐다.

“제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니 그 점을 공략했을 수도 있다 생각하셨을 겁니다.”

“……나도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지. 간호하는 사람도 없었고…….”

“생각할수록 우습네요. 내가 어쩌다 혼자가 되었는데, 그걸 타인의 잘못으로 돌리다니.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하려나?”

늘 침착하고 조용하던 사람이 제 아버지를 두고 조롱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자 테시우스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하르트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가?

하지만 단순히 사이가 안 좋은 거라 보기엔 그보다 훨씬 강한 적의가 있는 듯한데…….

그리 생각하며 테시우스가 말했다.

“여하간 그런 사정 때문에, 지금 수도의 모든 이들이 치료 약을 쓰지 않고 있어. 마녀와 손을 잡은 황태자가 만든 약을 어떻게 믿고 사용하냐는 거지. 나는 그 소문을 내는 데 가담한 이들이 귀족파라 생각한다. 해서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

“도움이라면…….”

“공녀는 귀족파의 수족으로 있는 하르트 공작의 하나뿐인 딸이지. 하니 공녀가 처음으로 그 약을 사용해 준다면, 그리고 나아진 걸 보여 준다면 소문을 잠재우는 데 크게 일조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생각은 생각일 뿐이라 테시우스는 조금 긴장했다.

그래도 귀족파고 아버지라 허락을 받기 전까진 안 된다고 말하는 순간, 유일한 방도가 사라지는 격이었기에.

그러나 율리시아는 그 짐작이 맞다는 걸 확신시켜 주듯 덧붙였다.

“그런 거라면야 얼마든지, 수백 번도 해 드리겠어요.”

“정말…… 괜찮겠나?”

“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테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율리시아를 빤히 응시했다.

얼굴은 결단으로 굳어 있을지언정, 눈동자엔 쉬이 짐작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무엇이 아버지의 말이라면 무한정 따르던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런 의문이 든 찰나, 율리시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도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어요.”

“편히 말하도록.”

“아드넬 님을 불러 주셨으면 해요.”

“아드넬을?”

뜬금없이 등장한 이름에 테시우스가 눈을 크게 뜨자 그녀가 덧붙였다.

“아드넬 님께 꼭 드리고픈 이야기가 있어요.”

“아……. 음, 하지만 아드넬은 많이 바쁜데…….”

“두 분 전하께 도움이 되실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것만은 들어주셨으면 해요.”

“……공녀가 정 그렇다면.”

결국 테시우스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율리시아와 아드넬 사이의 접점이라곤 화장품을 만들어 준 것밖에 없어 의외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저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 가능한 건 뭐든 들어주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테시우스는 곧장 방을 나서 아드넬을 데리고 돌아왔다.

율리시아의 침실로 가는 동안 그녀와의 대화를 간략히 설명해 준 테시우스는 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도착한 아드넬이 막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였다.

“……하르트 공녀님, 절 찾으셨다고…….”

“……아드넬 님!”

그 순간, 침대 위에 있던 율리시아가 아드넬을 보자마자 펑 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갑자기 터진 눈물보에 아드넬이 깜짝 놀라 다가가자 율리시아는 더욱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혹 어디가 많이 아프신 건…….”

“그런,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너무 반갑고, 또 안심되어서…….”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듣는 사람이 가슴 아플 지경이었다.

아드넬은 율리시아가 진정할 때까지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율리시아는 눈물을 그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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