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제조법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능력의 운용.
아드넬은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솥에 세라케니아 뿌리를 모두 투하하고, 다른 재료들 또한 용량에 맞게 넣었다.
사실 행동만 보면 그리 놀라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바스토르와 테시우스는 하던 걸 멈추고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꼭 무지개를 보는 듯한 기분…….’
두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으나 아드넬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신비로운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힘이 손에서 흘러나와 그녀가 잡는 모든 재료를 휘감으며 깊숙이 스며드는 것이.
그렇게 솥에 재료를 넣을 때마다 여러 가지 다채로운 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마녀가 나오는 동화책에는 언제나 거북하고 칙칙한 녹색 액체가 부글부글 끓는 솥과 악독하게 생긴 마녀가 음험하게 웃으며 휘젓는 그림뿐이었으니까.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뿌리가 충분히 우려지자 아드넬은 모든 재료를 걸러 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아드넬은 두 눈을 감고 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해 온 것처럼 익숙하고도 당연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강대한 힘이 솥 안에 쏟아져 들어가며 훙 하는 바람을 일으켰다.
“윽……!”
이 정도로 크게 힘을 쓴 적은 처음이라 그런지 손바닥이 저릿해 절로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테시우스가 당장이라도 튀어갈 듯 벌떡 일어섰으나 바스토르가 본능적으로 그를 붙잡아 제지했다.
힘의 운용이나 원리는 몰라도 함부로 방해했다간 시전자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몰랐다.
테시우스가 입술을 질끈 깨문 채로 지켜보는 중에도 아드넬은 진땀을 흘리며 연신 힘을 쏟아 넣었다.
수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별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힘을 밑바닥까지 끌어모아 조금이라도 더 치유력을 높이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아드넬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휘청였다.
시야가 흐려질만큼 극심한 어지럼증에 비틀거리는 그녀를 붙잡은 건 날렵한 몸놀림으로 튀어온 테시우스였다.
“아드넬!”
“괘…… 괜찮아요……. 그냥 조금 어지러워서…….”
잠깐 어지러워서 그렇다고 보기엔 안색이 너무 파리했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듯 위태로운 모습에 테시우스가 냉큼 아드넬을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그야말로 기진맥진,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듯한 감각에 벌어진 잇새로 연신 가쁜 숨이 새어 나왔다.
한편 바스토르는 은은하면서도 향긋한 냄새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솥으로 다가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희뿌연 김을 팔로 헤치자, 난생처음 보는 금색 액체가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이건 정말로…….’
지금까지 금색은 질리도록 봐 왔지만 이 액체는 뭐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우리만큼 아름답게 빛났다.
테시우스의 금안도 황금처럼 빛나긴 하지만 이건 정말로 태양을 녹여 만든 것같이 찬란하고 또 아름답게 반짝였다.
은가루를 섞은 것처럼 오묘하게 빛나기도 했고,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일렁이기도 했다.
바스토르는 놀라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아드넬을 돌아보았다.
‘어쩌다 마녀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자리 잡은 걸까? 척 보기에도 악한 것과는 거리가 먼데…….’
물론 세레나가 사악한 힘을 사용하긴 했지만, 아드넬처럼 세상의 모든 마녀가 다 악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마녀가 사용하는 주술은 흑마법이라 불리고 마수를 조종해 사람에게 해를 입힌다 알려져 있으니 어쩌다 그리된 건지 새삼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치료 약은 저쪽에 있는 병에……. 가득 채우고 하루 세 번, 한 스푼씩 복용하면 된다고 알려 주세요.”
“으응,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새 솥도 필요해요. 흉터 치료제도 만들어야 해서…….”
“이렇게나 힘을 썼는데 또? 안 돼, 오늘은 무리야.”
“그건 안 돼요……. 농포가 흉터로 자리 잡기 전에 복용해야 얼굴을 잃지 않을 수 있어요.”
천연두는 무엇보다도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하는 흉측한 흉터가 무서운 병이었다.
흉터 치료제를 꾸준히 쓰면 차츰 옅어지긴 하지만 흔적은 남기 때문에, 이 또한 가능한 한 빨리 만들어야 했다.
아드넬은 테시우스와의 실랑이 끝에 조금만 쉬면서 힘을 회복한 뒤 약을 만들기로 타협했다.
“아, 그리고……. 수도 공방 거리에 ‘메르세데스’라는 연금술 공방이 있어요. 그곳에 있는 연금술사들에게 최우선으로 약을 보내 주세요. 그들이 있어야 예방을 할 수 있어…….”
“알겠으니까 그만, 재차 당부하지 않아도 돼.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제때 깨워 줄 테니.”
“그럼……. 부탁드릴게요.”
온몸의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극심한 피로감은 이내 졸음으로 몰려와 아드넬은 연신 당부하곤 끝내 잠에 빠져들었다.
테시우스는 그런 아드넬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직 다 회복된 것도 아닌데…….’
등에 난 상처는 아물었으나 몸에 입은 충격은 그대로였다.
채 회복하기도 전에 이만한 힘을 썼으니 기절하듯 잠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면 저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테시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곤 아드넬이 곤히 잠든 걸 확인하고서야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제 일해야지. 뒷정리도 깔끔하게 하고.”
“그래,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다 해 놓자.”
하루가 짧으리만큼 할 일은 차고 넘쳤다.
그렇게 두 황자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아드넬이 시킨 일들을 차근차근 하기 시작했다.
* * *
아드넬이 다시 깨어난 건 늦은 밤중, 그사이 약은 다 공병에 나누어 담은 채였다.
힘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아드넬은 흉터 치료제 또한 만들었고 이후 완전히 실신했다.
그동안 그녀 대신 바스토르와 테시우스가 바삐 움직였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복용법을 적은 종이를 치료제 두 종류와 동봉한 뒤 연금술 공방에 보냈고 증상이 나아지는 대로 즉시 우두균 추출에 돌입할 것을 부탁했다.
이는 대장장이도 마찬가지였다.
우두균을 추출하면 몸에 맞아야 하는데 제국엔 아직 주사의 개념이 없었다.
따라서 아드넬은 아주 가늘고 얇으면서도 원통처럼 가운데 통로가 있는 주삿바늘을 그려 보여 주며, 조금 두껍더라도 최대한 흡사하게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
그걸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대장장이뿐, 하지만 그들도 연금술사들과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먼저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테시우스는 직접 치료제를 들고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대장간에 가서 의뢰했다.
병에 걸려 앓는 중이었지만 상대가 황자라, 모두 아연실색하면서도 치료제의 등장에 무척 기뻐하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남은 치료제들은 모두 본성과 별궁 사용인들에게로 갔다.
수도 사람들에 비해 증상이 훨씬 심하고 중태에 빠진 자들이 많은 탓이었다.
외에도 이유는 더 있었다.
평민들은 대부분 글을 몰라 복용법을 알려 주려면 약을 나누어주며 직접 말로 설명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 맡아 줄 인력으로 파견하려는 게 바로 황성 사용인들이었다.
시녀, 시종도 많긴 하지만 그 수를 압도하는 건 평민 출신 하녀와 하인들이었고, 대부분 가족이 수도에 있었다.
저들도 걸린 병이니만큼 다른 가족이 걱정되는 건 당연하기에 간호 인력으로 파견하기엔 적격이었다.
따라서 바스토르는 사용인들이 호전되는 대로 공표할 생각이었다.
마라이 병의 치료제를 개발했으며 누구든 무상으로 받아 갈 수 있고 전염병을 잠재우는 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러나 아드넬이 치료제를 만들고 나누어준 지 채 사흘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전염병을 퍼트린 마녀가 황태자 전하의 시녀였대.”
“황제파의 입지를 더 공고히 하려고 마녀와 손을 잡았다더군.”
“그 귀족파 공녀님까지 병에 걸리셨다는 게 그게 증거가 아니라면 달리 뭐겠어?”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전에 바스토르가 소집한 회의에서 나온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평민 사이에서 도는 얘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한때 별궁 마부로 일했었잖아. 그때 2황자 전하께서 매년 두 번씩 모습을 감추셨는데, 알고 보니 그게 황태자 전하와 손을 잡은 마녀가 한 짓이래!”
“무려 짐승으로 바뀌는 저주라지 뭔가.”
“아무리 이복동생이라지만 어떻게 사람을 짐승으로……!”
“얼마 전 있었던 사냥 대회에선 심지어 마수까지 나타났대. 2황자 전하께서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난 직후에 말이야!”
“황태자 전하께서 2황자 전하를 해하려는 소문이 돌았을 땐 믿지 않았는데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지지 않나.”
“분명 2황자 전하를 아끼는 누군가 그 악독한 계획을 눈치채고 일부러 소문을 낸 게 분명해.”
“진작 후계자 수업까지 포기하신 분인데 얼마나 욕망이 컸으면…….”
말이 퍼져 나갈수록, 병의 증상이 악화될수록, 소중한 사람을 잃을수록.
그들의 모든 분노는 황실, 그리고 바스토르를 향하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욕심 때문에 우리까지 이 지독한 병에 걸렸어!”
“내 불쌍한 아기, 세상 빛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리 허무하게…….”
“이 얼굴로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이야!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평생 혼자 살라는 것과 뭐가 달라!”
“자기들은 멀쩡하고 우리는 이 모양 이 꼴이 됐어! 평민은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거야?”
“사람 목숨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게 뭐냐고!”
“그런 지도자는 우리도 필요 없어!”
와중에도 바스토르는 아드넬을 도와 치료제를 만드는 데 힘쓰고 있었다.
잠깐 조용히 지내던 그사이에 어디선가 새어 나간 말이 폭풍을 몰고 온 것이다.
이에 바스토르는 나중에 공표하려던 내용을 급히 발표했으나 사람들은 되레 반발했다.
“마녀와 손잡은 인간이 만든 약을 쓰라고?”
“전염병을 퍼트려 놓고 치료제를 개발했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가?”
“또 모르지, 우리를 조종하는 약일지!”
치료제가 부족할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창고에는 약병만 계속 수북하게 쌓여갔다.
그렇게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까지 모든 비난과 원성을 받게 된 바스토르는 결국 하던 것들을 다 손 놓아 버리고 말았다.
“어떤 노력을 해도 역풍으로 돌아오니…….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못 하겠구나. 미안하다, 아드넬. 그리고 테시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