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 생각했건만, 오늘의 패자는 명백하게도 바스토르였다.
연금술사와 얘기를 마치고 테시우스와 황성으로 돌아온 아드넬은 회의 결과에 심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세한 사정은 전혀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그리 생각했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바스토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덧붙였다.
“덕분에 상황이 아주 안 좋아.”
구겨진 체면도 체면이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바스토르가 이 모든 악행을 저지른 범인으로 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테시우스는 완벽한 피해자가 되었고, 더는 누구도 두 형제의 우애를 믿지 않을 터였다.
회의실에 테시우스만 있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진 않았을 텐데.
바스토르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결백을 주장하면 어떨까.”
“모두 저주를 건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네가 아니라 말하면 되레 협박받고 있다 추측하겠지.”
회의가 진행되던 당시에 테시우스가 반박했더라면 괜찮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해 강제로 회의를 마쳤으니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후에야 결백을 주장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바스토르의 말에 테시우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 상황으로선 진범을 잡는 게 최적의 방안이야.’
세레나가 저주를 풀어 주었을 때 그녀는 ‘검은 옷을 입은 무리’의 눈을 피해 뒤따라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별궁에 찾아왔을 때도, 제 기척 하나 숨기지 못하는 여자가 무려 2층 테라스를 통해 들어왔다.
그 말인즉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이상한 점도 한둘이 아니었지.’
일이 벌어지고 바얄란 가에 대해 알아보니 세레나는 어릴 적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딸이라 했다.
드물긴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할 수 있으나, 한미한 지방 자작가 영애가 황태자의 시녀로 들어왔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누군가의 입김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깊게 파 보기엔 너무 늦었다.
무려 8년 전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어떻게 시녀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말해 줄 사람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은 탓이다.
그러한 정황을 설명한들 짐작에 불과해 신뢰를 얻기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대체 누굴까. 이 모든 일을 계획할 사람이.’
황태자를 끔찍이 생각하는 황후가 그럴 리는 없다.
제 딸을 황태자비 후보로 보낸 두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외숙이…….’
테시우스는 알라니아가 라이칸 후작이라면 길길이 날뛰던 것을 문득 떠올렸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리비엘은 리아누 황비의 친오빠이자 독살범을 잡은 사람이었다.
테시우스에겐 외숙이 되는 사람이었고, 늘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할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인 적은 없었다.
한때 후계자 수업 포기 선언을 격렬히 반대하긴 했어도 그 사실 자체로는 황실에 반기를 든 거라 보긴 어려웠다.
‘바스토르, 혹은 황실을 통틀어 앙심을 품을 만한 사람이 유력한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질 않았다.
결국 테시우스는 바스토르와 마찬가지로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무언가 단단히 얹힌 것처럼 모든 상황이 답답하기만 하던 바로 그때였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껏 조용히 듣고만 있던 아드넬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바스토르와 테시우스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에게 시선을 옮기자 아드넬이 덧붙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고를 증명하기도 어렵거니와 믿음도 얻기 어려울 거예요.”
“그러면?”
“오늘 연금술사의 협조를 약속받았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백신’을 만들고, 최대한 빨리 치료제를 만들어 수도 전역에 공급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됩니다.”
낮에 있었던 회의를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말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전염병이 창궐한 지금은 귀족들의 반발보단 민심이 더 중요했다.
고통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평민들의 원성은 높아질 테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황실에 비난의 화살을 날릴 테니.
“카리아 상회에서 남부와 거래할 때 사용하는 마도구를 가져왔습니다. 이걸로 치료제에 필요한 약초를 대량 주문할 생각입니다, 다만…….”
“다만?”
“약초의 뿌리가 살아 있는 채로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마법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명칭 ‘세라케니아’, 남부에서만 나는 이 식물은 천연두에 효과적인 약초이기도 하지만 마력석처럼 마력이 깃들어 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졌더라면 마탑에서 독점했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아드넬만이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력은 마법사뿐만 아니라 마녀의 힘에도 크게 반응하기 때문에 치료 효과를 더욱 극대화할 수 있었다.
문제는 뿌리를 우려내는 방법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채로 받아야만 하고, 그러려면 막대한 금액이 들어가는 마법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마법사는 모두 마탑, 황실에 속해 있으니까.’
때문에 제아무리 날고 기는 공작이라도 마법사를 개인적으로 고용할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론 마도구의 보급과 마공학이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대규모 마법진 같은 경우에는 황실의 허락을 얻어야 가능했다.
클리프가 시간이 금이라며 막대한 금액의 마도구를 구매하고도 배를 띄워 거래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드넬의 말에 바스토르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즉시 마탑주에게 연통을 넣도록 하지.”
“남부 상단에는 제가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물량이 확보되는 족족 순간이동 마법진으로 받았으면 합니다.”
“그래, 지금은 시간과의 싸움이니. 그 또한 말해 두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전하.”
“나야말로.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야.”
세라케니아가 천연두에 효과적인 약초라는 것도, 그걸로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것도, 마녀의 힘으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모두 아드넬 덕분이었다.
만약 아드넬이 없었더라면 황실에선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지 못할 것이고, 민심은 들끓을 것이다.
이에 힘입어 귀족들은 더욱 강하게 반발할 터, 어쩌면 진범으로 몰린 순간 폐위까지 당할지 몰랐다.
범인은 따로 있는데 그것만큼 억울한 일이 있을까.
바스토르는 진심을 담아 아드넬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지원하도록 하지. 힘들겠지만 부탁한다, 아드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 * *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회의가 끝난 당일, 아드넬은 남부 상단에 연락을 취해 약초의 확보를 요청했고 그동안 바스토르는 마탑주 아파르치에게 마법사를 보낼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이날 늦은 저녁, 마탑에서 보낸 마법사 십여 명이 황성에 도착했고 그동안 당장 구할 수 있는 만큼 약초를 긁어모은 남부 상단에서 연락이 왔다.
열 명의 마법사가 힘을 모아 그린 마법진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마력으로 그린 글자에선 빛이 발했고, 마찬가지로 남부에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 위로 올라간 마법사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명의 마법사가 다시 돌아왔고, 잠시 후 마법진 위엔 수십 개의 나무 상자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안에 든 건 대체…….”
“혹시 마력석입니까? 꽤 강대한 마력이 느껴지는데.”
“하지만 마탑주님은 치료 약 제조에 쓰이는 것이라고…….”
다만 세라케니아에 마력이 깃들어 있단 사실을 모르는 마법사들은 저마다 호기심을 드러내며 은근히 물어 왔다.
그러나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줄 시간은 없었다.
바스토르는 답을 알려 주는 대신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그들을 돌려보내곤, 모두 황성에 새로이 마련한 아드넬의 작업실로 옮겨 주었다.
다름 아닌 바스토르가 긴밀히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던 밀실이었다.
‘다행히 아드넬이 마녀라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어.’
치료 약에 대해선 오래전 기록에서 제조 방법을 찾아 만들 수 있었다고 둘러댈 수 있고 백신은 속설을 바탕으로 실험해 보았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아드넬이 마녀라는 것만큼은 반드시 비밀로 해야 했다.
마녀가 만든 치료 약이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알려져 있기도 하거니와, 열심히 만들어 수도 곳곳에 나눠주어도 아예 쓰지 않을 가능성도 높았다.
또한 그거야말로 바스토르가 마녀와 손을 잡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사람들의 추측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바스토르는 아파르치에게도 자세한 사정은 함구한 채 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약초를 구해야 하니 마법사를 보내 달라고만 했다.
이젠 누구도 믿을 수가 없던 탓이다.
그렇게 아드넬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밀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났어.’
대량으로 약을 만들어야 하는 만큼 커다란 솥까지 마련되었다.
아드넬은 세라케니아뿐만 아니라 치료 약에 들어가는 나머지 재료들을 마저 확인하고 시작하기 전 밀실 한쪽을 응시했다.
“송구합니다, 두 분 전하. 그런 일은 제가 해야 하는 것인데…….”
“무슨 소리,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 다행인걸.”
“테시우스의 말이 맞다.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너는 네 할 일을 하도록.”
우습지만 슬프게도, 밀실 한쪽에선 바스토르와 테시우스가 열심히 약초를 다듬고 있었다.
바스토르가 윗줄기를 자르고 뿌리의 흙을 털어서 주면 테시우스가 깨끗이 물에 씻어 다른 상자에 옮겨 담는 식이었다.
‘길거리에 좌판 깔고 쪽파 다듬는 할머니를 보는 기분…….’
어쩌다 과일 깎던 과도로 약초를 다듬게 되었나.
그런 두 황자를 지켜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아드넬은 냉큼 고개를 돌렸다.
‘……정신 차리자, 전하의 말씀대로 나는 내 할 일을 해야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고 있다.
아드넬은 웃음기를 지우고 본격적인 치료 약 제조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