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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21)화 (121/141)

121화

그들로서는 당연히 품을 수 있는 의심이었다.

아드넬은 미리 생각해 둔 대답을 늘어놓았다.

바스토르가 영주 한 명을 매수해 말하라 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수도에만 퍼진 병이었으나 현재 수도와 인접한 다른 영지에도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전염성이 있다는 증거지요. 하지만 개중에서 우두라는 병이 사람 사이에 돌았던 지역만이 유일하게 마라이 병 감염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두가 마라이 병에 대한 면역력이 있는 건 아닐까 추측했고,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따로 실험해 보았습니다.”

다른 위인의 업적을 가로채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으로선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대충 우두에 걸린 여자의 손에서 채취한 고름을 멀쩡한 사람의 상처 부위에 문지르는 방법으로 주입했고, 그가 우두 증세를 보이며 앓아누웠다가 머지않아 회복된 후 천연두를 주입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추가로 스무 명에 달하는 사람에게도 우두접종 실험을 재현했는데 이를 토대로 예방 효과가 있음을 확신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연금술사들은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소의 고름을 사람한테 넣다니…….”

“눈에 보이지 않는 펑거스를 추출하는 데는 일가견이 없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여러분이 필요한 겁니다.”

아드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더욱 강하게 설득했다.

“현재 황실에서도 치료 약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쏟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라이 병에 효과가 좋은 약초 또한 찾아냈지요. 이번 일을 도와주신다면 1순위로 치료를 받으실 수 있게끔 저 또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천연두에 대한 두려움은 굳이 아드넬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저들이 걸려 있기도 하거니와, 병의 진행이 빨라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사람들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목숨을 구제해도 흉터는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데 그것만큼은 결코 사양이었다.

병에 걸리고서도 연구를 손 놓지 않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몰골을 한 채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그만큼 흉측하고 징그러운 흉터였다.

‘어차피 사람들을 돕는 일이기도 하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흉터만큼은 절대 갖고 싶지 않아.’

‘또 모르지,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다소 배척받는 연금술사의 명성이 마공학자만큼 올라갈지.’

연금술사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곤 머지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아드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당신을 돕지요.”

“하지만 최우선으로 치료를 받는 것만큼은 보장해 주셔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의 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셋으로는 부족합니다.”

“아아……! 물론이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침내 받아들인다는 소리가 나왔다.

아드넬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고마운 마음을 담아 허리를 정중하게 숙여 보였다.

거의 절반으로 꺾인 각도에 연금술사들은 당황했지만 곧 멋쩍은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당분간 외출은 삼가시고 위생에도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그럼 저는 치료 약이 만들어지는 대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실라는 일찍이 황실에까지 화장품을 납품해 오던 사람이다.

단순히 화장품만 만드는 사람이었다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세모꼴로 눈을 떴을 테지만, 연금술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저들이 가장 잘 알기에 연금술사들은 그녀의 해결책과 ‘황실’이라는 단어에도 별다른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어련히 연이 있지 않겠냐 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연금술사들의 허락을 얻어 낸 아드넬은 곧장 테시우스와 함께 황성으로 돌아갔다.

저들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고 있음은 꿈에도 모른 채.

* * *

“자네 덕을 아주 톡톡히 봤어.”

특유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케르페온은 진한 황금빛 술이 찰랑이는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황태자의 허를 찔렀으니 오죽할까.”

“과찬이십니다.”

“허언이 아니라 진심이야.”

일찍이 리비엘을 통해 귀족파의 가주들을 불러 모았다.

덕분에 오늘 회의에 소집된 귀족파 모두가 사건의 전말을 알고서 참석할 수 있었다.

짐짓 모른 척, 처음 듣는 척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성과는 아주 크게 돌아왔다.

‘황태자가 그리 당황하는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바스토르가 질문한 것들은 리비엘이 하르트 공작저로 찾아왔을 당시 케르페온이 추가로 물어본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그 시녀가 2황자를 찾아가는 걸 알게 되었는지, 2황자가 걸린 저주가 무엇인지는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등.

그때 리비엘은 테시우스가 일찍이 외숙인 자신에게 고민을 토로해서 알고 있었으며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 하녀 한 명을 붙여 두었노라 답했다.

하지만 세레나가 찾아온 걸 목격한 하녀가 자신의 심복에게 말을 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려 죽었노라 덧붙였다.

‘대놓고 지켜보았다 말하는 꼴이니 당장 감금형을 당해도 할 말은 없지만.’

황족에게 사람을 붙여 지켜본다는 것 자체가 중죄에 달하는 일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었다.

리비엘은 2황자의 외숙이기도 하거니와 걱정되는 마음에서 한 것뿐이고, 덕분에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으니 가벼운 처벌에서 끝나도록 손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각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라.”

“황태자 전하께서 그토록 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셨을 줄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만큼 상심이 크실 것입니다. 하나 그런 분이 한 나라를, 무려 제국을 이끌게 그냥 둘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건 케르페온도 같은 생각이었다.

딸아이에게 딱히 애정은 없지만 황태자가 작정하고 병에 걸리게 한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녀와 손까지 잡은 사람이 뭔들 못하겠는가.

설령 율리시아가 황후가 된들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는 일말의 사랑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고, 약간의 바람만 불어도 홀씨처럼 훙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런 자리라면 애초부터 올라가지 않는 게 나았다.

“2황자 전하께서도 황태자 전하 못지않게 능력이 출중하신 분입니다. 그저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유일하게 손을 내어 준 사람이 황태자 전하시다 보니 스스로 그림자가 되길 자처하신 것뿐이지요.”

“……당시 말이 많긴 했지.”

리아누 황비가 살아 있었다면, 여전히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면 케르페온 또한 바스토르와 테시우스를 저울질했을 것이다.

제 딸아이는 반드시 황후가 돼야만 하니까.

줄을 잡더라도 확실한 것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테시우스는 후계자 수업을 포기했다.

바스토르는 적통일 뿐만 아니라 장남이다.

어느 쪽을 잡아야 하는지는 당연하리만큼 쉬웠다.

황제파, 귀족파 모두가 바스토르를 지지했다.

이 사달이 나기 전까지는.

“진실은 언제고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쉬쉬한들 머지않아 이야기가 새어 나가겠지요.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진짜 모습이 밝혀지는 순간 사람들은 황실에 반기를 들고 일어설 것입니다.”

“계속 말하라.”

“목숨을 중히 여기지 않는 지도자를 과연 누가 반길 것이며 진정으로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2황자 전하께서는 다르십니다. 조금만 갈고 닦으면 원석처럼 빛을 발할 것입니다. 더불어 2황자 전하께선 황태자 전하의 계획으로 아주 오랜 시간을 고통받으셨지요. 이 사실을 알면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은 백성들도 2황자 전하께까지 반기를 들진 않을 겁니다.”

에둘러 말하긴 하지만 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조금 걸린다면 그리 말하는 리비엘이 2황자의 외숙이라는 것.

하지만 한때 테시우스의 후계자 수업 포기 선언에 격히 반대한 사람이긴 해도 그때 이후론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있었으면 있었지, 크게 권력에 욕심을 보이진 않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명목하에 2황자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아니다.

둘 사이에 각별한 가족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황후의 견제로 서신 한 번 편히 주고받지 못했으니.

‘율리시아를 황후로 만들려면 그쪽이 더 편할 수 있어.’

황제파의 힘은 황실에서 비롯되는 만큼 황태자가 흔들리는 지금이 적기였다.

게다가 바스토르의 죄목이 낱낱이 밝혀지면 제아무리 황태자라 한들 최악의 경우 사형까지 당할 수 있었다.

든든한 뒷배를 잃은 황제파를 압도하는 건 당연히 귀족파, 그리고 그들의 수장인 자신이었다.

‘황태자가 사라지면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긴 하지.’

리비엘의 말마따나 2황자는 오래도록 짐승으로 변하는 저주로 고통받았다.

마녀가 퍼트린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이 테시우스까지 싸잡아 끌어내리려 하진 않을 것이다.

그 또한 저들과 같은 피해자니까, 오히려 비슷한 고통을 겪은 2황자야말로 백성을 생각하는 지도자가 되리라 생각할 수 있었다.

“마땅한 방법이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리비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일부러 나서지 않아도 조만간 새어 나갈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여기에 조금 더 박차를 가하기만 하면 됩니다.”

“……황태자가 대안을 마련하기 전 일부러 사람들이 들고일어나게 만들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간단하지만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아직 사람들은 전염병을 퍼트린 게 마녀라고 생각만 할 뿐, 정확한 정황은 모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만큼 기능이 마비되어 황실에서도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추측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원성은 하늘을 찌를 터다.

어떤 해결책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게 아니냐, 이대로 두고 보기만 할 것이냐며 뭐라도 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민심이 흔들리면 황실 또한 흔들리기 마련.

케르페온은 무감정한 얼굴 위로 아주 미약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또한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잘 마무리만 된다면 내 이번 일은 결코 잊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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