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전염병이 도래한 건 한밤중, 그때도 클리프는 한창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편히 잠든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반복된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날 밤, 갑자기 들이닥친 검은 기운을 마주하고서 모든 것이 망가졌다.
‘형체 있는 어둠…….’
본디 어둠이라 함은 빛이 있으면 사라지기 마련이건만, 눈앞에서 조우한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와도 같았다.
그것은 생명을 찾아 헤매는 악귀같이 보이기도,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욕망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어둠에 몸을 관통당한 순간 클리프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숨이…….’
누가 머리를 둔기로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뜨겁고, 목구멍이 부어오른 것처럼 제대로 숨을 쉬기도 어려웠으며, 몸 곳곳이 간지럽고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앓는 소리를 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벌컥 하며 문이 열렸다.
“상단주님……!”
원래도 덩치가 큰 사람이다.
그 육중한 몸이 비틀거리니 요란한 소리가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제 옆을 지켜온 로한은 쌕쌕대는 거친 숨을 내뱉으면서도 그를 찾아왔다.
그리곤 꼼짝도 못 하는 클리프를 안아 든 채 꼭대기 층에 있는 침실로 옮겨 놓았다.
“제가…….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오겠습니다.”
병에 걸린 건 로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갔다.
당연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로한과 마찬가지로 의원을 찾아 나온 이들은 수두룩한데 그 의원조차도 병에 걸려 있으니 이렇다 할 약도 구하지 못한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로부터 로한은 계속 클리프의 곁을 지켰다.
열로 들뜬 이마를 물수건으로 식혀 주고, 예전에 아드넬이 만들어 준 상처 연고를 수포 위에 발라 주며, 욕창이 생기지 않게끔 간간이 몸도 돌려 눕혀 주었다.
클리프가 기절하듯 잠이 들면 그 또한 선잠에 들었다가 다시 새로이 물을 떠 오고, 우유에 적신 빵 조각을 먹여 주었다.
그러다 끝내 로한마저 쓰러진 게 불과 어제의 일이었다.
“나는 됐으니……. 로한부터…….”
수도 없이 잠에 들었다 깨었지만 로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옆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정신이 어지러워도 그가 해 준 것들은 마치 꿈결처럼 기억에 남아 클리프는 테시우스를 향해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드넬이 당신을 얼마나 걱정하는데. 그랬다간 잔뜩 혼날 거다.”
테시우스는 아무렇지 않은 덤덤한 음성으로 답하며 클리프를 안아 들었다.
그리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상회의 문을 열고 나왔다.
“……클리프!”
귀에 박히듯 들려온 목소리가 익숙했다.
클리프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아드넬을 쳐다보았다.
“아……드넬…….”
“아직 위에 한 사람이 더 있어. 옮을지도 모르니 거리를 두도록 해.”
일부러 짐마차를 끌고 온 터라 공간은 넉넉했다.
아드넬이 미리 챙겨온 모포를 짐칸 바닥에 깔자 테시우스는 클리프를 그 위에 내려놓고 다시 상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아무리 힘이 좋다지만 저와 체구가 비슷한, 그것도 의식이 없는 사람을 공주님 안 듯 번쩍 들 자신은 없어 어떻게든 부축해 데리고 올 참이었다.
그사이 아드넬은 눈물을 글썽이며 며칠 새 비쩍 말라 버린 클리프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괜찮을 거예요, 안심해요. 내가 반드시 치료해 줄 테니까…….”
“아드넬은……. 괜찮아……?”
“보다시피 아주 멀쩡해요. 나만 무사해서 미안해…….”
“아냐……. 무사해서……다행…….”
그러나 클리프는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붙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지자 아드넬은 깜짝 놀라 “클리프!” 하고 외쳤지만, 그가 잠시 혼절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무사한 걸까…….’
테시우스의 말대로라면 누군가 목숨을 걸고 저를 감싸 준 덕일 텐데 딱히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가장 유력한 사람이라면 제이든뿐이었지만 그는 편지만 두고 사라진 지 오래라, 딱 그 시점에 나타나 지켜 줬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더 괴로울 테지만.
‘어딜 갔든 간에 부디 무사하기를.’
아드넬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빌며 맞잡은 손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 테시우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로한을 부축해 내려왔다.
아무리 힘이 장사라지만 제 체구와 버금가는 사람이라 그런지 무겁긴 한 모양이었다.
테시우스는 클리프의 옆에 로한을 눕힌 뒤 이마에 배어 나온 진땀을 닦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면 되지?”
“연금술사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서둘러 주문부터 넣어야 해요. 치료 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식물이 있어요.”
“제국에선 나지 않는 건가?”
“네, 라그랑에서만 나는 특수한 흙이 있듯 그 식물도 마찬가지예요. 마력석처럼 마력이 깃든 약초인데 남부에서만 날뿐더러 뿌리가 살아있어야 해서 여기선 구하기 어려워요. 아, 제가 말씀드린 건…….”
“여기. 책상 위에 있더군.”
테시우스는 품속에 챙겨온 마도구를 꺼내 내밀었다.
다름 아닌 먼 거리에서도 통신이 가능한 마도구로 남부에 있는 상단과 거래할 때 클리프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부르는 게 값인 마도구지만 클리프는 시간이 곧 금이라며 거침없이 지불했다.
덕분에 지금같이 다급한 상황에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되었다.
아드넬은 마도구를 소중히 챙긴 뒤 클리프와 일찍이 한 번 가 본 연금술 공방으로 향했다.
수도에는 공방이 모여 있는 거리가 따로 있었다.
보석 세공이나 염색을 전문으로 하는 공방은 주로 출퇴근을 하지만, 연구에 몰두하는 연금술사들은 대부분 출퇴근하지 않았다.
클리프가 상회 본점에서 먹고 자며 일하던 것처럼 그들도 공방에서 모든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다.
아드넬은 공방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메르세데스’라고 쓰인 간판이 달린 공방에 주저 없이 들어섰다.
이곳도 역시나 딸랑하는 종소리가 울렸음에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라 아드넬은 공방의 가장 안쪽, 실제로 연금술사들이 연구하는 작업실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구십니까?”
“아……. 저는 그…….”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작업실 안엔 총 세 명의 연금술사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멀쩡한 건 아니었다.
얼굴과 팔에 수포가 올라와 있었고 지쳐 보이는 기색이 다분했다.
그럼에도 연금술사들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저들이 하던 연구를 붙잡고 있던 것이다.
아드넬이 놀라 벙한 얼굴로 쳐다보기만 하자 그들 중 한 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손님 받을 때가 아니니 이만 돌아가시오.”
“저는 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카리아 상회랑 계약한 공방이 이곳이라 알고 찾아왔습니다.”
“……상단주님이랑 아는 사이십니까?”
“아주 잘 알고 있죠.”
아드넬은 손바닥에 배어 나오는 식은땀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으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제 이름은 아실라, 여러분이 예전부터 찾던 사람입니다.”
* * *
천연 화장품에 대한 지식은 많으나 화장품에 들어가는 다양한 추출물은 아드넬이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부득이하게 연금술 공방에 의뢰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작된,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걸 추출하라는 말도 안 되는 부탁.
하지만 아드넬의 설명을 바탕으로 한 수백 번의 시도 끝에 성공적으로 추출되었을 때, 연금술사들은 누군지 제발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었다.
제국에서 최초로 ‘수증기 증류법’을 알린 사람, 자몽 씨 같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재료에서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해 주는 추출물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밝힌 사람.
그야말로 전설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후로도 연금술사들은 그 ‘아실라’를 만나게 해 달라 수도 없이 부탁했다.
그러나 클리프는 자신도 모른다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고, 그녀를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은 마음속에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토록 어린 여자가 그 아실라 님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저들이 상상한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머리칼은 단정하지만 어깨 위에서 찰랑이는 짧은 길이였고, 차림새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년들이 입는 복식이었다.
몸의 굴곡도 크게 찾아볼 수 없어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그저 예쁘장한 청년이라고만 생각했을 터다.
연금술사들의 눈동자에 의심이 짙어지자 아드넬이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어찌 보이실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정체를 감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쪽이 그 ‘아실라’ 님이시란 걸 우리가 어찌 믿겠소?”
“지금은 한시가 급해 하나하나 증명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선 제 얘기부터 들어 주세요.”
아드넬은 후 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마저 말을 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금 수도에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머지않아 수도가 아닌,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갈 테고요. 하지만 여러분이 도와주신다면 그 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게 전염병이라는 건 또 어떻게…….”
“일명 ‘우두법’이라 하는 것인데, ‘우두’라 함은 소의 유방 등에 가벼운 궤양이 발생하고 콧물을 흘리는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는 병으로 인수공통전염병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걸릴 수 있는 병이지요.”
그들의 반박에 하나하나 응대할 시간도 모자랐다.
아드넬은 본론 먼저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두는 치명률이 0%에 수렴하며 대게 몇 주 후 자연 치유되고, 사람도 감염되고 일시적으로 종기가 발생하는 증상이 나타날 수 있지만 천연두에 비해 증상 자체도 심하지 않으며 역시 자연 치유가 되노라고.
또한 천연두와 유전적으로 가까워 이 우두 바이러스를 사람의 몸에 전염시켜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유발하는 방법이라는 등, 단어는 몇 가지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말하고자 하는 건 모두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 ‘우두’라는 병에 걸린 소에게서 ‘펑거스’를 추출해 사람에게 주입하면 ‘마라이 병’에 대한 면역력을 갖게 된다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아드넬이 기뻐하며 손뼉을 짝 치자 연금술사는 턱을 잠시 매만지더니 눈을 치켜떴다.
그리곤 그녀를 직시하며 물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을 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도와줄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