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19)화 (119/141)

119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원래 계획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젯밤, 테시우스는 바스토르를 찾아와 해결 방안을 알려 주고 돌아갔다.

‘아드넬의 말대로라면 이미 퍼진 전염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어도 더 퍼지지 않게끔 조치할 수 있다고 해.’

소의 젖을 짜는 여자는 마라이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며, 실상은 ‘우두’라는 병을 앓은 사람은 마라이 병에 면역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 묻기 전에 바스토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아드넬 또한 세레나와 같은 마녀라는 점, 그리고 그녀만이 지금으로선 유일한 희망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바스토르야 알고 있지만 아드넬이 마녀라는 걸 밝히지 않는 이상, 그것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엔 조금 부족했다.

이에 테시우스는 그 속설을 통해 실험을 해 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서 사람까지 미리 매수해 두었어.’

각 영지의 영주들에게 전염병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전한 뒤다.

그리고 지금도 전염병은 꾸준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해서 바스토르는 그들 중 한 명을 매수해 수도로 불러왔다.

자기 영지에서 우두라는 병이 사람 사이에 돌았는데 그들은 모두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라 명했다.

그러니 승산은 충분히 있다고, 그리 생각했건만.

“황태자 전하께서 왜 그런 흉악한 일을 계획하신단 말입니까?”

“그야 황제파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함이지요!”

“체스터 공녀님께선 병에 걸리지 않으셨으나 하르트 공녀님께선 지금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계십니다!”

“그건 곁에 막아 줄 사람이 없어…….”

“하르트 공녀님께서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으셨다는 점을 노렸을 가능성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억측입니다!”

“그럼 제대로 된 반박을 해 보십시오!”

바스토르가 불러 온 영주는 중앙 귀족들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한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해서 바스토르는 서늘한 낯빛으로 케르페온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받은 케르페온이 손을 들어 귀족파의 높아진 목소리를 제지했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바스토르가 입을 열었다.

“그리 말하니 나 또한 묻지. 하르트 공작은 어떻게 그 사실들을 알게 된 건가?”

실제로 가담한 사람이 아니고선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테시우스나 아드넬, 마탑주 아파르치와 황후가 퍼트릴 리도 없었다.

그런데 완벽한 외부인이 무려 8년여를 숨겨 온 비밀을 알아냈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화살 같은 시선들이 일제히 케르페온을 향했으나 그는 일말의 동요도 없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세레나 바얄란, 그녀는 황태자 전하를 모시던 시녀였으나 얼마 전 별궁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요. 한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시녀는 멀쩡히 살아있었습니다. 정확히는, 그녀가 별궁에 계신 2황자 전하를 찾아가는 모습을 목격한 자가 있습니다.”

“맙소사……!”

“이건 명백히 2황자 전하를 노리고 찾아간 것입니다!”

“……좋다, 그럼 테시……. 아니, 2황자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은? 무려 짐승으로 변하는 저주라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당시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사냥터에 2황자 전하께서 흑표범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정녕 짐승이라면 사람들 앞에 그리 모습을 드러내진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피해서 도망을 쳤겠지요. 한데 도망을 치긴커녕 대놓고 나타났습니다, 일부러 약을 쓰지 않고서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입니다. 그리고!”

케르페온은 한 치의 변화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강하게 외쳤다.

“2황자 전하의 흑발과 황금 같은 금안, 그건 흑표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에 2황자 전하께선 늘 이 시기가 되면 모습을 감추셨지요. 여기 있는 누구도 그 이유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연하지요, 짐승으로 바뀌는 저주를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대의 짐작일 뿐이라는 얘기군.”

“그러나 단순한 짐작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완벽하게 들어맞기도 합니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케르페온의 답에 바스토르는 끝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박을 하려면 테시우스가 있어야 했다.

그가 제 입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줘야 했다.

하지만 테시우스는 이 자리에 없었다.

회의를 소집한 이유가 우두법의 실행을 위한 발판을 닦기 위한 것인 만큼,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아드넬과 함께 연금술 공방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누구도 성공을 의심치 못했다.

그러나 케르페온이 저들의 비밀을 안다는 것 또한 예상치 못했다.

만약 알았더라면 테시우스는 이곳에 있었을 텐데.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지.”

그야말로 궁지에 몰려 도망치는 꼴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저들의 수군거림이 이전보다 훨씬 불거질 것을 알지만 그를 막을 도리도 없었다.

오늘의 패자는 분하지만 명백하게도, 바스토르였다.

해명을 외치는 뒤섞인 음성을 뒤로하고 회의실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케르페온이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 * *

한편 그 시각, 아드넬은 테시우스와 함께 카리아 상회로 향하고 있었다.

‘클리프와 계약한 연금술 공방이 제일 뛰어나.’

전생에선 천연 화장품 재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없는 걸 추출하라는 게 아니고 있는 줄도 몰랐던 걸 추출해 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해낸 것이 바로 클리프와 계약한 연금술 공방이었다.

우두균을 추출하려면 그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도 사람에 따라 증상이 달라서 다행이야.’

아드넬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보통 천연두는 갑작스러운 고열과 허약감, 오한과 두통을 시작으로 붉은 반점 모양의 피부 발진이 구강, 인두, 얼굴과 팔 등에 나타난 뒤 몸통과 다리로 퍼져나간다.

그러다 1, 2일 이내에 수포로 바뀌고 고름이 찬 물집, 즉 농포로 바뀌는데 피부에 깊게 박혀 있다가 8, 9일경에 딱지가 생긴다.

이후 회복되면서 딱지가 떨어진 자리에 서서히 깊은 흉터가 남아 흔히 곰보, 얽었다고 말하는 피부 모양이 형성된다.

하지만 지금 수도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의 증상은 수포에서 농포로 바뀌어 가는 중간 과정이었다.

황성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시작부터 농포로 뒤덮여 있던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별궁에서 시작되어 황성으로, 그리고 수도로까지 퍼져 나가며 힘이 조금씩 약화된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많은 약을 만들어야 해.’

아드넬이 마녀의 능력을 사용해 만들 수 있는 약은 총 두 가지, 하나는 끔찍하게 남는 흉터를 치료하는 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천연두의 진행을 느리게 하고 또 치료하는 약이었다.

모두 능력을 개방하며 알게 된 제조법이나 안타깝게도 완벽하진 않았다.

과학이 발전한 전생에서도 흉터를 완전히 지우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꾸준히 쓰면 느리지만 차츰 옅어져 혐오감을 덜 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이는 천연두 치료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마다 체질과 건강 상태가 다른 만큼 모두가 효과를 보긴 어렵고, 치료 약을 써도 결국엔 본인의 면역력으로 이겨내야만 했다.

‘문제는 연금술사들의 상태인데…….’

당장 클리프도 걱정이지만 우두균을 추출해 줄 연금술사가 없으면 예방접종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만큼 단 한 사람이라도 멀쩡해야 했다.

아드넬은 초조한 심정으로 카리아 상회에 도착하길 손꼽아 기다렸다.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서며 시종이 “도착했습니다!” 하고 외치자 아드넬은 주저 없이 문을 열고 내렸다.

“아아…….”

그러나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탄식이 먼저 새어 나왔다.

지금 수도는 모든 기능이 마비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상회 입구에 서 있던 도어맨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사람은 거리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제 몸을 가누기 힘들어 길거리에 나자빠진 사람, 몸이 약해 발병하자마자 목숨을 달리한 사람, 그리고 돌아갈 집조차 없는 부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이었다.

그 잔혹한 참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울컥 눈물이 새어 나왔다.

아드넬은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린 손수건 위로 손바닥을 올려 꾹 눌렀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는 것이었다.

테시우스는 그런 아드넬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먼저 상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여는 순간 코를 찌르는 시체 썩는 악취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이런 공간에 계속 있다가는 없던 병도 생길 터다.

아무래도 아드넬이 찾는 사람을 저가 먼저 찾아 데리고 나와야 할 듯싶었다.

테시우스는 내부 오른쪽에 나 있는 계단을 올라 2층, 3층을 두루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한 시간대가 밤, 그리고 아침이다 보니 출근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나 카리아 상회의 주인은 할 일이 많아 제집에 잘 가지도 않는다고 아드넬에게 들었다.

아마도 이곳에 있을 듯싶어 테시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꼭대기 층에 있는 두 개의 방 중 하나에서 사람을 발견했다.

상단주 클리프와 그의 심복 로한이었다.

“누……구…….”

테시우스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클리프는 침대에 누운 채였다.

그런 그의 옆엔 진작 말라 버린 물수건을 쥔 채로 혼절한 로한이 있었고, 클리프는 가까스로 한 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발진이 얼굴을 다 뒤덮진 않았지만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테시우스는 성큼 다가가 물었다.

“네가 카리아 상회의 주인인 클리프인가?”

“……누구…….”

“대충 2황자라고 해 두지.”

같은 말을 반복할 만큼 아픈 이에게 뭘 구구절절 설명을 하나 싶어 테시우스가 대충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의식을 잃고 바닥에 누워 있는 로한과 클리프를 연신 살피고 있었다.

‘자기도 병에 걸렸으면서 계속 돌보고 있었나 보군.’

말라버린 물수건이 이를 증명했다.

더구나 로한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클리프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테시우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드넬이 널 찾는다. 그녀가 이 병의 치료법을 알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