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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17)화 (117/141)

117화

이어진 얘기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세레나가 제 죽음을 위장했을뿐더러 저와 마찬가지로 마녀의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생명을 태워서까지 병을 퍼트렸다는 것도, 그 때문에 벌어진 지금의 상황도.

무엇보다도 아드넬은 테시우스가 설명해 준 사람들의 병증에 크게 충격받았다.

‘설마……. 내가 예상하는 게 아니기를, 그것만은…….’

“단순히 피부에 발진과 종기가 올라오는 것에서 그치지 않아. 머리를 다친 것처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이도 있고, 눈을 잃은 사람들도 많다.”

“아아…….”

그러나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끝내 희망은 사라졌다.

모든 증상이 아드넬이 짐작한 그 병을 가리키고 있었다.

‘천연두라니,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전생에서 천연 화장품 공방을 운영하고, 한차례 아토피도 겪어 본 탓에 자연히 피부 질환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알아보게 된 피부병, 천연두.

그건 단순한 피부 질환이 아니었다.

빨간 발진이 심하게 일어나는 수준이 아니라 피부가 걸레짝이 될 정도로 울퉁불퉁한 종기가 올라오며 피고름이 흘러내린다.

고열에 목숨을 잃기도, 시력을 잃기도 하지만 병이 낫고 나서도 혐오감이 들 정도로 심한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 평생을 괴롭히는 악독한 병.

사진 한 장 보는 것만으로도 평생 뇌리에서 잊히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병이 바로 천연두였다.

‘전생에서는 완전히 박멸한 질병이지만.’

이곳에선 아니었다.

테시우스의 말에 따르면 관련 기록을 찾아보긴 했으나 아득하리만큼 먼 옛날에 최초로 발병했으며 자연스럽게 사라졌다는 내용만 남아있다고 했다.

지금 사람들은 이 병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할 터였다.

‘심지어 천연두는 공기 감염이 가능해 전염성이 어마무시하게 높아. 단순히 수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제국 전역을 휩쓸지도 몰라.’

아드넬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테시우스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병에 대한 설명도 설명이지만 그녀가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을 만한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테시우스는 연신 머뭇거리다 머지않아 “저, 그리고…….” 하며 운을 떼었다.

“당시에 병을 피해 간 사람은 모두……. 그러니까,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감싸 준 사람들 덕분에 살아남았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두운 기운이 사람의 몸을 통과하면 백이면 백 그 병에 걸렸지만 다른 사람이 제 몸으로 막아 줄 수가 있었어.”

황태자 바스토르도, 알라니아와 디아나도 그렇게 병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네 조수로 있던 필립, 그 사람 덕에 모나는 무사했지만 그는…….”

그러니까 아드넬이 다쳤을 당시, 테시우스에게 간호를 맡긴 모나는 후원에 나가 홀로 눈물을 훔쳤다.

갑작스러운 부상 소식에 크게 충격받은 건 필립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방 안에 들어가 상태를 확인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녀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이 모나였다.

이에 필립은 뒤따라가 쪼그려 앉은 채 훌쩍이던 모나에게 다가갔다.

“모나 양.”

“피, 필립 님.”

그를 발견한 모나는 황급히 눈물을 닦아 냈지만 눈시울은 이미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필립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는가 싶더니 문득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뜬금없이 말했다.

“……제겐 여동생이 있습니다.”

“네……?”

“정확히는 있었다고 말해야겠네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담담한 듯하지만 그리움이 물씬 배어나는 음성이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모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필립은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여동생에게 해를 입힌……. 그놈들에게 똑같이 되갚아주고 나니 저 또한 벌을 받게 되더군요.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돌아올 수 있었지만 동생은 야산에 아무렇게나 묻힌 채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허무하리만큼 쉽게 꺾인 앳된 소녀를 안쓰러이 여긴 동네 사람들이 묻어 주긴 했으나, 이름을 새긴 석판 하나 없이 대충 묻히고 말았다.

여동생의 죽음에 눈이 뒤집혀 날뛴 저 또한 옆에 있어 주질 못한 건 마찬가지라 그 사실에 분노하긴커녕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였다는 낙인이 찍혀 있으니 번듯한 일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용병 길드만이 그러한 과거를 반겨 주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이 모이지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오가는데 드는 숙식비만 해도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인데 고용주는 툭 하면 봉급을 떼어먹고,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치료하는데 몽땅 들어가니 동생을 공립 묘지로 옮겨 주는 것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아…….”

“그때 만난 게 아드넬이었습니다.”

얼굴은 어리숙하게 생겨선, 제 여동생보다 한참이나 어린아이가 자신 있게 선술집에 들어왔던 그날을 필립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선술집에서 가장 저렴한 수프와 맥주 한 잔으로 하루의 모든 끼니를 해결하던 그에게 호위 기사 행세를 해 달라며 금화를 내밀던 아이.

주변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하지만 당시에 필립은 무척 절박했고, 그 금화 한 닢이 세상에서 가장 간절했으며, 이대로 보냈다가는 사내들이 호탕하게 웃어 보인 것과 달리 아이를 뒤쫓아가 해를 입힐 것이 뻔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제가 만난 고용주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죠. 숙식하는 비용도 자기가 부담할뿐더러 봉급도 빼먹지 않고 줬으니까요. 도저히 제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필요한 돈을 다 모았을 즈음이던가요.”

나처럼 피 냄새가 나는 사람은 누군가를 지킬 수 없다고.

필요한 돈은 다 모았으니 이제 그만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지만 그때 아드넬은 되레 물었다.

“그 돈을 어디에 쓰려고?”

너무 당당하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해서인지 몰라도.

제 눈치를 보며 사정을 묻는 사람에겐 입을 꾹 다물었는데 아드넬에겐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게 되었다.

그 어린아이가 뭐라고, 진지하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게 뭐라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드넬은 “그러면 거기까지만이라도 함께 하자.” 답하곤,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땅을 통째로 샀습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을 제 명의로 사서, 공립 묘지가 아닌 햇살이 가장 따스하게 내리쬐는 그곳에 새로이 묻어 주었어요. 생의 시작과 끝을 적는 묘비 대신 평생 시들지 않는 꽃을 조각해 머리맡에 꽂아 주었지요.”

이제 겨우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할 수 있다기엔 지나치게 성숙하고, 지나치게 고마운 처사였다.

이 은혜를 뭐로 갚아야 하냐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에게 해 준 말도 그러했다.

“여동생은 이제 편히 잠들었으니 이젠 당신을 위해 살라더군요. 손에 피 묻히는 일 없이, 자기 옆에서 꼬박꼬박 봉급 받아 가며 착실히 모아 미래를 꿈꾸라고. 평생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날 때, 꼭 하고픈 일이 생겼을 때, 그때가 오면 미련 없이 보내 주겠다고.”

필립은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모나는 놀라움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뜬 채였다.

원래도 대단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으나 막상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릴 때부터 확실히 남달랐구나 싶었다.

“그날 이후로 아드넬은 제게 있어 두 번째로 소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왜 모나 양께 이 이야기를 해 드렸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네?”

필립은 모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마주한 채 덧붙였다.

“부끄러운 과거와 슬펐던 기억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드리고 싶을 만큼 모나 양 또한 제게 있어 소중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리고 이젠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아드넬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어떻게 술 취한 남자로 가득한 선술집에 들어와 용병 일을 의뢰하겠느냐며 필립이 작게 웃어 보였다.

“언제나 미래를 꿈꾸고 저가 바라는 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아드넬이 쉽게 삶을 포기할 리가요.”

“역시…… 그렇겠죠?”

“제가 봐 온 아드넬은 그렇습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장담하듯 가슴께를 주먹으로 쿵쿵 두드리는 모습에 비로소 모나도 눈물을 그치고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다.

“맞아요. 아드넬 님은 분명 괜찮으실 거예요.”

“예, 맞습니다.”

어느덧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별궁 쪽에서 다급한 비명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폭풍처럼 거세게, 바람처럼 고요하게.

별궁에서 시작된 어둠의 기운은 순식간에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에 모나가 고개를 돌린 순간 필립은 그것의 형체를 채 확인하지도 않고 그녀부터 감싸 안았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모나는 멀쩡했지만, 필립은 아니었다.

“……모나는 지금 자처해서 별궁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있어. 네 조수도……그들 중 한 명이고.”

“아…… 안 돼…….”

아드넬은 어느새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고 있어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광경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 병은, 천연두는 제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을 느리지만 빠르게 앗아갈 것이었다.

‘필립도, 사라진 제이든도, 그리고 클리프도…….’

하룻밤에 수도 전역을 휩쓴 병이니만큼 클리프도 무사하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로한이 늘 곁에 붙어 있다지만 그땐 밤중이었으니까.

제이든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필립은 사경을 헤매고, 별궁 사용인 대부분이 당했다.

저가 만든 음식이라면 언제나 눈을 빛내던 주방장 리들리도 마찬가지였다.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치료도 물론 가능하지만 역으로 사용할 수 있다며 세레나는 이 끔찍한 전염병을 퍼트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드넬 또한 역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리 생각할 걸 이미 짐작했다는 듯, 테시우스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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