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아드넬은 주저앉은 채 멍하니 뿌옇기만 한 허공을 응시했다.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언제부터였는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무언가 중요한 걸 잊은 듯한데 그게 무엇인지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만 빙빙 도는 기분만 들 뿐이라, 힘을 내어 걷다가도 금세 지쳐 주저앉기 일쑤였다.
약에 취한 듯 정신은 몽롱하기만 해서 사실상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각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무언가에 쫓기듯 조급한 기분이 들면서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아드넬은 다시금 무릎을 짚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시야를 방해하는 안개를 헤치며 걷고,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일순 허탈해지며 절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드넬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아까처럼 다시,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굴레에 갇힌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이만 벗어나고 싶어…….’
다급하고 초조한 불안감만이 유일하게 계속 지속되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걸어도 달라지는 게 없다 보니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다.
이대로 포기하면 저를 지치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깊은 단잠에 빠지듯 한순간이나마 다 잊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누군가 귀에 대고 속살거리는 듯한 달콤한 유혹은 그녀에게 그만 다 내려놓으라 말하고 있었다.
다시 일어나 걸을 생각 말고 이 자리에 그대로 누워 눈만 감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리 얘기하는 듯했다.
아드넬은 진심으로 그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고 싶었다.
끝나지 않는 길을 하염없이 걷다가 지쳐 주저앉는 것도,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원인 모를 감정도 다 힘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떨군 채 제 발만 바라보던 아드넬은 머지않아 또다시,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내가 잊고 있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지만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잊은 듯한 기분은 그녀로 하여금 도저히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혹에 넘어가 두 눈을 감게 되면 모든 것이 영영 끝날 것만 같아서.
적어도 저가 잊어버린 게 무엇인지는 알아야지만 비로소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드넬은 짙은 안개 속을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제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공간은 공허함 그 자체였음에도.
한참을 걷고 또 걸으며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다리는 아프지 않은데 마음이 지쳐 낙심하고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찾아왔을 때였다.
‘……서는 안돼. 반드시 막아야만…….’
오랜 시간이 흐르며 이제는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목소리가, 처음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곳에서 들려왔다.
아드넬은 놀라 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엄마……?”
‘……숨을 바쳐서라도……. 아가, 내 소중한 딸.’
“엄마……! 엄마, 어디 있어! 내가 어디로 가면 돼? 엄마!”
‘네가 모든 것을……. 믿고 있단다, 비록 그 길이 순탄치는 않겠지만. 언제까지고 널 지켜…….’
“엄마! 엄마……!”
사무치도록 그리운 음성은 자꾸만 끊겨서 들려왔다.
어느새 아드넬은 퐁퐁 눈물을 쏟아내며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간절히 외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제발, 딱 한 번만이라도 엄마를 볼 수 있다면.
오로지 그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이 순간 아드넬은 엄마를 잃어버린 일곱 살 어린아이로 돌아갔다.
두려움에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찾아 헤매던 아이는 이내 훌쩍이며 눈물을 훔쳤다.
“엄마……. 보고 싶어…….”
아드넬은 결국 쪼그려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엄마와의 추억이 스며든 초라한 나무집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던 그날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따스한 온기를 기대하며 울다 지쳐 잠들곤 하던 그때처럼.
아드넬은 정말 서럽게도 울었다.
그러나 그 순간, 들썩이는 어깨 위로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손길이 느껴졌다.
저가 바라왔던 것만큼 따듯하고 부드러운, 엄마의 손길이 분명했다.
“엄마……!”
마침내, 엄마를 만났어.
그 온기 어린 손길 한 번에 슬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크게 차올랐다.
아드넬은 번쩍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선을 뒤로 돌리자마자 쨍하리만큼 강한 빛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윽 하며 저도 모르게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 일어나, 아드넬……!’
“누……구…….”
‘아드넬!’
간절함이 짙게 느껴지는 음성은 남자의 것이 분명한데, 왜 이 또한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 생각을 하자마자 일순 그녀가 있던 공간이 회오리처럼 일그러지며 몸과 정신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멀게 만들던 쨍한 빛도 사라졌다.
그러나 차츰 아득해지는 정신 너머로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어쩐지 손을 흔들어 주는 것 같은, 그 움직임에 맞춰 붉은 머리칼이 흔들리는 것 같은.
‘엄……마…….’
그건 내 착각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그 순간 아드넬은 번쩍 두 눈을 떴다.
* * *
아파르치가 보내 준 마법사는 빠르게 황성에 당도했다.
아드넬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상태가 심각해 보이기로는 황제 케르시우스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마음의 병은 마법으로도 약물로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이라 그는 아드넬의 등에 난 찢어진 상처만 치료하고서 돌아갔다.
은은한 빛이 어린 마력은 봉합된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외상만 낫게 하는 것이라서 몸에 가해진 충격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궁의 한 명이 살아남은 덕에 그는 염증을 막아 주는 약과 더불어 원기 회복에 좋은 약을 지어 주었다.
그리곤 오늘 저녁쯤에는 눈을 뜰 것이라 덧붙였다.
치료를 받은 뒤 아드넬은 황성 내 비어 있던 손님용 방으로 옮겨졌다.
테시우스는 그런 그녀의 옆에 꼭 붙어 간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드넬은 깨어나지 않았다.
저녁을 지나서 밤이 되고, 밤이 지나 어스름한 새벽녘이 되도록.
다친 이를 무리하게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테시우스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기다렸다.
그러다 그 또한 지쳐 깜박 잠이 들었을 때였다.
“엄……마…….”
핏기 없이 마른 입술 사이로 위태롭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던 방 안에서 잠깐 잠이 들었던 테시우스는 귀신같이 번쩍 눈을 떴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들자 아드넬은 눈을 감은 채 입만 작게 벙긋거리며 울고 있었다.
“아드넬……!”
“안……. 가지 마, 엄마…….”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인지 발음도 몇 번 묻혔으나 입 모양으로 그녀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라는 단어에 테시우스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궁의는 곧 눈을 뜰 거라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약이 잘 들었을 때의 얘기고, 고비는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아드넬은 정신을 차리긴커녕 돌아가신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테시우스는 다급하게 아드넬의 어깨를 감싸 쥐고 외쳤다.
“어서 일어나, 아드넬……!”
힘을 주어 흔들어 보았지만 뜨거운 눈물만 투둑 흘러내릴 뿐,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테시우스는 다시 한번 강하게 외쳤다.
“아드넬!”
제발 눈을 떠.
제발 날 떠나지 마.
제발 내 곁에 머물러줘.
그 모든 간절한 바람이 담긴 한 마디.
어느새 그의 황금 같은 눈동자에도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푸석해진 볼을 타고 툭, 한 방울이 흘러내린 순간에.
아드넬은 기적처럼 눈을 떴다.
“아드넬……!”
“…….”
아드넬은 멍한 시선으로 천장만을 바라보다 곧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슬픔과 기쁨으로 뒤섞인 얼굴을 한 테시우스가 있었다.
‘아……. 이거였구나…….’
도저히 포기할 수 없게 만들던, 그녀가 잊은 중요한 한 가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
“전하…….”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던 불안감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넬은 테시우스를 향해 가까스로 미소 지어 보였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상하기는, 내가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야.”
테시우스는 빠르게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며 언제 울었냐는 듯 싱긋 웃었다.
그리곤 아드넬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이리 다시 내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 힘들었을 텐데 끝내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
피부로 전해지는 온기가 어쩐지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위로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의 말마따나 정말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수도 없이 많이 찾아왔지만.
‘난 포기하지 않았어.’
그 대가는 생명으로, 삶으로, 사랑으로 돌아왔다.
아드넬 또한 화답하듯 테시우스를 향해 입꼬리를 살짝 휘었다.
그러다 이내 그녀의 눈에 다소 낯선, 처음 보는 풍경이 들어왔다.
“그런데 여기는…….”
물기 없이 마른 음성에 컵에 물을 따르던 테시우스가 “아.” 하며 낮게 소리 내더니 조금 침중한 얼굴로 물컵을 내밀었다.
아드넬이 받아 들고 한 모금을 마시고서야 그가 운을 떼었다.
“본성에 있는……. 손님용 침실이다.”
“한데 왜 제가 여기에…….”
“네가 다친 그날, 많은 일이 있었어.”
눈으로 보고도 끔찍한 참상을 입 밖으로 내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이제 막 깨어난 아드넬이 듣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싶어 더욱 염려되었다.
그럼에도 말해야만 했다.
언제고 알게 될 상황이기도 하거니와, 이 지옥을 끝내려면 아드넬의 힘이 꼭 필요하기에.
“수도에……. 심각한 전염병이 돌고 있다. 정확히는 죽은 줄로 알았던, 세레나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