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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15)화 (115/141)

115화

“큰일, 큰일입니다……!”

리비엘은 냉큼 계단을 뛰어 올라가 보란 듯이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곤 지체하지 않고 본론부터 꺼내었다.

“유, 율리시아 공녀님께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병에 걸리셨다 합니다……!”

“…….”

리비엘의 말에도 케르페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름진 미간은 잔뜩 찌푸려진 채였고 언제 움켜쥐었는지 주먹은 빠득 소리라도 날 것처럼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게……. 정녕 사실이냐.”

“예, 방금 본성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황후 폐하와 체스터 공녀님께선 무사하셨으나 율리시아 공녀님은…….”

“……빌어먹을!”

하지만 이어진 말에 늘 평정을 유지하던 케르페온도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난간을 세게 내려치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이미 병에 걸린 자들이 어떤지 본 뒤다.

그는 때마침 요깃거리를 들고 온 집사장이 감싼 덕에 멀쩡할 수 있었지만, 병약한 아내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녀를 돌보던 시녀들이 아연실색 놀라 도망가는 바람에 병상에 누운 채로 당해 버린 것이다.

그 끔찍한 몰골을 확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리비엘이 들고 온 소식은 최악 그 자체였다.

‘볼 것이라곤 얼굴밖에 없는 아이가 저 괴이한 병에 걸렸으니……!’

디아나는 멀쩡하고, 율리시아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잖아도 공고한 황제파의 입지를 깎아내리고자 들인 공이 얼만데, 가진 거라곤 공작가의 위세와 반반한 얼굴뿐인 딸아이가 외모마저 잃고 말았으니 황태자는 당연히 디아나를 선택할 것이다.

케르페온 후작이 분기로 씩씩대며 거칠게 숨을 쉬자 리비엘은 딱 적당한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살짝 눈치를 보듯 조심스레 손을 모아쥐며 말했다.

“저……. 그런데 각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편히 말하라. 어차피 이곳엔 달리 들을 귀도 없으니.”

“각하께서도 물론 들으셨겠지만, 근래 수도에 돌던 소문이 있었잖습니까.”

“……아아,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2황자 전하께……. 한데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은 왜 말하는 거지?”

“저 또한 각하께서 생각하신 것처럼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였습니다만, 마음에 조금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걸리는 것이라니?”

“황태자 전하를 오래도록 보필하던 시녀가 있습니다. 거의 십여 년 전부터 전하를 모시던 아이인데, 알고 보니 그 시녀가……. 사라진 줄 알았던 마녀라 합니다.”

“뭐?”

굳이 마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세간에 알려진 인식이 있다 보니 케르페온도 대번에 그의 저의를 눈치챘다.

“그 마녀가……. 끝내 전염병을 퍼트린 게로군.”

“그렇습니다. 왜 그런 방법까지 사용했는지는 모르나 모든 정황이 들어맞지 않습니까?”

사냥 대회엔 그 또한 참석했으니 알고 있다, 마녀와 함께 사라진 마수가 나타났다는걸.

마수라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보니 사실 거기에서 그쳤더라면 웬 괴물인가 하고 생각했을 테지만 마녀가 아직까지 존재했다면 그것은 괴물이 아니라 마수임이 확실했다.

마녀는 마수를 부릴 줄 안다고 전해져오며, 실제로 그 괴물들은 사냥터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명령을 한 것처럼.

여기에 마녀들은 전염병을 뿌리고 사악한 주술, 흑마법이라 불리는 능력을 사용할 줄 안다 전해져 왔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실현되었다.

“제 짐작이긴 합니다만……. 혹 황태자 전하께서 그 시녀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황태자가 황후와 함께 2황자를 해하려 한다는 소문, 정체를 숨기고 있던 마녀, 그녀가 퍼트린 전염병.

하지만 디아나는 멀쩡하고 율리시아는 당했다.

‘원래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그랬을지 몰라도 그 사실을 알고서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까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먹혔구나!

리비엘은 속으로 웃으며 겉으론 무척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덧붙였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냥 대회에서 보셨듯 웬 흑표범 한 마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실은 그 흑표범이……. 2황자 전하십니다.”

리비엘은 이젠 말할 수밖에 없다는 듯, 그간 얼마나 속앓이했는지 보여 주는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매년 두 번씩 일정한 시기가 되면 2황자 전하께서 사라지곤 하셨지요. 사실은 그게……. 짐승으로 변하는 저주에 걸리신 탓입니다. 하나 누가 그런 해괴한 저주를 걸었는지 알 수 없어 홀로 방법만 찾아볼 뿐, 지금까지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하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서야 저 또한 진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하……. 어떻게, 지금까지 이런 짓을…….”

2황자가 주기적으로 사라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차기 황제로 내정된 황태자가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짐승으로 변하는 저주라니, 마녀가 아니면 달리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황태자가 마녀와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리비엘의 짐작은 어느새 케르페온에게 있어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형제의 우애는 겉으로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어. 하물며 우리조차 가면을 쓰는 법을 제일 먼저 배우는데 황족이라고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다.’

케르페온은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맞다 보니 이젠 의심을 안 하기도 어려웠다.

전염병이야 언젠가 사그라들어 사라진다지만, 그럼 제 딸아이는?

율리시아가 잃어버린 외모는 어찌할 것이며 흔들리는 귀족파의 입지는 어찌할 것인가?

‘황후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대놓고 디아나를 편애하는 여자니, 이번 전염병도 어쩌면 그 대책 없는 여자가 명령했을지도 몰라.’

황후라는 지고한 자리에 앉아서인진 몰라도 알라니아는 죽어 가는 백성보단 황실의 위신을 더 중히 여기는 여자였다.

황제파의 굳건한 지지와 황태자의 즉위만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이니 몇천 명쯤 죽어 나가도 괜찮다 생각했을지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케르페온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라이칸 후작, 자네가 책임지고 가주들을 불러 모으게. 내 이번 일은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예, 각하!”

그가 말하는 가주들이라 함은 귀족파에 속한 가문들의 수장이었다.

그리고 케르페온은 그 귀족파 모두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정말이지 완벽해! 세레나, 너는 이미 죽어 듣지 못하겠지만 진심으로 고맙구나!’

오히려 세레나가 퍼트린 전염병 덕에 제 말에 더욱 신뢰가 실렸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까.

리비엘은 진중한 얼굴로 답하면서도 속으론 활짝 웃으며 하르트 공작저를 나섰다.

* * *

한편 수도의 가장 외곽 동쪽, 마탑.

급히 말을 몰아 달려온 황성의 시종이 건네준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노안에 수심이 어렸다.

올해로 여든을 넘긴 마탑주이자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마공학자, 아파르치였다.

‘모두 끝난 지 오래라, 그리 생각했건만…….’

그 또한 제 생각에 불과했다.

아파르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름진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었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마녀는 아직까지 존재했고, 그 마녀 때문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것도 역사상 가장 끔찍한 피부병이라 일컬어지는 ‘마라이 병’이었다.

아파르치는 아주 오래전 그 병에 대한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선대 마탑주가 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줘선 안 되는 기록을 준 것인데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 전염병이 다시 도래한 것이다.

‘심지어 이건 공기 중으로도 감염이 되는 병이다.’

전염성도 굉장히 강해서 아무리 전염병이 처음 창궐한 지역을 통제해도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마라이 병이었고, 그 뜻은 ‘지옥의 형벌’이었다.

마라이 병에 걸린 자들의 참상은 실로 지옥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녀와 함께 사라진 줄로 알았던 그 병은 다시 찾아왔다.

‘다행히 우리는 안전하다지만 황성은…….’

황성은 마탑과 마찬가지로 수십 개의 결계가 처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막처럼 생긴 결계는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펑거스’ 또한 막아 주었다.

연금술사와 함께 진행한 연구 덕에 발견하게 된 것인데, 녹이 슨 못이나 칼에 다쳤을 때 상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열이나 어지럼증의 다른 증상도 동반한다는 것이 이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따라서 이전에는 마법 공격을 막아주는 결계에서 그쳤지만, ‘펑거스’라는 것을 발견하고선 이 또한 막아 주는 결계를 연구해 황성 전체에 걸었다.

문제는 마녀가 퍼뜨린 전염병이 황성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었다.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막아 주지만 안에서 시작된 걸 막을 방도는 없었다.

더구나 그 힘이 얼마나 강했으면, 마탑 결계의 가장자리 안쪽에 있던 이들조차 병에 걸렸다.

그러하니 본성에 또 하나 걸어 둔 결계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겠지.

아파르치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가린 손을 내렸다.

“우선……. 황태자 전하의 요청대로 치료 마법에 능한 제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또한 사안이 심각하니 순간이동이 가능한 스크롤도 몇 장 내어드리지요.”

“아아……! 감사합니다, 아파르치 님!”

치료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마법사들은 특히 이런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가장 귀한 존재였다.

병 자체를 없애진 못해도 찢어진 상처를 단번에 아물게 해 주고 통증을 덜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파르치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순간이동 스크롤과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바로바로 통신할 수 있는 마도구를 내어 주었다.

마력석 자체가 꽤 귀한 광물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채굴량이 떨어져 공학과 마법을 결합한 게 불과 사십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보통은 사람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아파르치가 내어 준 것들을 두둑이 챙긴 시종은 다시금 황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파르치의 얼굴 위에 떠오른 수심은 여전했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마녀에 관한 것만큼은 결코 밝힐 수 없다.’

어쨌든 전염병을 퍼뜨린 마녀는 이미 죽었다 하니 진실은 다시금 묻힐 것이다.

아파르치는 황성이 있는 방향을 응시하며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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