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이 무슨……!”
리비엘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강한 힘에 넘어진 잉크병에서 검은 액체가 주룩 흘러내리며 종이를 적셨으나 그의 눈동자는 서류가 아닌 바닥에 쓰러진 인영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있는 방 안엔 신음을 흘리며 앓고 있는 수하 너덧 명과 그렇지 않은 게르펜이 있었다.
‘세레나가 한 짓이 분명하다!’
세간에 알려진 마녀의 인식은 아주 사악한 존재이며 흑마법이라는 이상한 주술을 사용해 세상에 전염병을 뿌리고 저주를 거는 둥 악한 짓을 일삼아 세 번에 걸친 전쟁 끝에 모두 숙청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리비엘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맞았다.
전염병을 퍼트릴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진실이었다.
마녀가 아니고선 이렇게 한순간에 병을 퍼트릴 수도 없거니와 목걸이를 가지고 있던 세레나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모두 제 불찰입니다.”
게르펜은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제게로 돌렸다.
수하들만 믿고 세레나를 지켜보지 않은 게 문제였다.
별궁에 데려다 달라기에 데려다줬고, 제 뜻대로 되지 않아 다시 짐승으로 바꿔 버리겠다 난리를 칠 수는 있어도 그랬다간 금기를 깬 벌을 고스란히 받을 테니 허튼짓은 하지 않을 거라 짐작했노라 들었다.
그러나 만약 게르펜이 그곳에 있었다면 결코 데려다주지 않았을 것이다.
십여 년 전 후작에게 2황자의 짝이 될 거란 말 한마디에 온갖 짓을 서슴지 않으며 지금까지 온 여자다.
저를 당연히 사랑하리란 망상에 빠져도 단단히 빠진 여자에게 목걸이라는 힘까지 쥐여 줬는데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데려다준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사태는 벌어졌고 수하들은 저를 감싸다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꼴이 되었다.
“일이 아주 복잡하게 되었어.”
리비엘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막고는 게르펜과 함께 방을 나섰다.
고통스럽게 신음 흘리는 수하들은 완전히 외면한 채였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황성에 가 봐야겠다. 상황을 파악하고 그 뒤에 움직이는 게 좋겠어.”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전력이…….”
“전력은 괜찮다. 우리는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아주 평화롭게, 말의 힘으로 모든 계획을 끝마칠 것이야.”
리비엘은 답하면서도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테시우스는 사람으로 돌아왔고, 아드넬이란 마녀는 큰 부상을 입었으며, 세레나는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이 정도로 방대하게 병을 퍼뜨리는 데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다.
제 목숨을 걸지 않고선 목걸이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차피 그년은 나중에 처리할 생각이었으니 오히려 잘 되었을지도.’
저와 손을 잡았노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으니 따로 입막음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문제는 아드넬이었다.
‘테시우스는 분명 알 거야, 그것이 마녀라는 걸.’
흑표범으로 변한 저주조차 감추지 않은 상대다.
그렇다면 아드넬 또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문제는 테시우스가 마녀인 아드넬을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본래 계획은 황태자가 마녀와 손을 잡고 테시우스에게 짐승으로 변하는 저주를 걸었다는 증거로 세레나를 들이밀고 함께 처리하려던 것이었는데, 만약 그가 아드넬이 마녀라는 걸 밝히게 되면 그간 준비한 게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만다.
‘일단 세간에 알려진 인식이 있으니 사람들은 모두 마녀가 한 짓이라고 생각할 터. 그런 상황에서 테시우스가 진실을 밝히긴 어려울 테지.’
세레나가 한 짓에 대한 모든 화살이 아드넬에게 돌아갈 텐데 테시우스가 쉽게 말할 리 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리비엘은 조금 안도했다.
생각하는 와중에도 걸음을 재개 놀려 그는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조차 병으로 쓰러져 게르펜이 대신 말을 몰았다.
리비엘은 눈살을 찡그리며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를 응시했다.
‘정말이지……. 끔찍하군.’
누구 하나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
한순간에 시력을 잃어 허공에 팔을 휘적이고, 머리를 다친 것처럼 어버버하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려움증에 미친 듯이 긁다가 피를 철철 흘리고, 고열로 들뜬 숨을 내쉬며 간신히 살아 있는 사람들까지.
마치 지옥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런 능력이 있으니 황실에서 존재 자체를 없애려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군.’
리비엘은 쯧 혀를 차며 창문의 커튼을 쳤다.
이윽고 도착한 황성의 성문은 간단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근위병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어느 누가 신분을 확인할 것이며 방문한 용건을 물을 것인가.
게르펜은 새카만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누가 봐도 수상쩍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모든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머지않아 본성 근처에 다다랐을 땐 리비엘은 더 가까이 가는 대신 도중에 내려 직접 걸어갔다.
게르펜이 자신을 감싸고, 수하들이 게르펜을 감싸 병을 막아 주었듯 본성에도 멀쩡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그 짐작대로 본성에서 가장 큰 응접실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황태자 바스토르와 황후 알라니아는 물론이고 테시우스와 아드넬을 포함한, 병을 피해 간 사람들이었다.
“……전하!”
“……외숙?”
느닷없는 리비엘의 등장에 테시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리비엘은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이리 안전하시니 다행입니다. 어찌나 걱정했는지…….”
“아……. 예, 보다시피. 저는 괜찮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그리고……. 황제 폐하.”
“……그래요.”
리비엘이 뒤늦게 허리를 공손히 굽혀 보이자 알라니아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하필 저 인간이 멀쩡할 건 뭔지, 불편해하는 기색이 다분한 얼굴이었다.
한편 응접실 소파에는 총 두 명의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의식을 잃은 아드넬과 황제였다.
그리고 알라니아와 디아나, 바스토르와 테시우스는 근처에 서 있는 채였다.
“그런데……. 하르트 공녀님께선 어디 계십니까?”
알라니아는 훌쩍대는 디아나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있었는데 율리시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리비엘이 묻자 디아나가 더욱 서럽게 울며 답했다.
“하르트 공녀는……. 저와 달리 어둠의 힘을 피해 가지 못하셨어요.”
“그 무슨…….”
“툭하면 시녀들을 물리는 아이니 별수 있겠나. 방 안에 혼자 있다가 그만 당했다더군.”
사태가 벌어지고 바스토르가 제일 먼저 명한 것은 병에 걸리지 않은 이들을 찾아 모으는 것이었다.
단순한 피부병이라고 보기엔 증세가 무척 심각하기도 했거니와 전염성이 있는 경우가 더러 있어 인명피해를 줄이고자 직접 나서 모은 것인데, 몇몇 시녀와 시종들, 궁의와 관리 두 명을 제외하곤 멀쩡한 이가 없었다.
여기에 디아나는 황성에 들어올 때 자신을 오래도록 보필한 하녀를 데려왔는데 그 하녀가 자신을 감싸 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홀로 있는 시간이 많던 율리시아는 침실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 말에 일순 리비엘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으나, 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녀장은 나를 감싸다 그리되고, 시종장은 폐하를 감싸다 그리되니……. 참으로 할 말이 없구나.”
알라니아는 씁쓸한 눈으로 간신히 숨만 쉬는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현 황제 케르시우스 폰 아이테라.
죽은 리아누 황비를 사랑한 그녀의 남편이었다.
당연하지만 알라니아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그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인 바스토르를 남겨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전 날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비쩍 마른 몰골은 산 송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알라니아는 “후…….” 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더는 보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일단 병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염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곧장 통제해야 하고요.”
“친위대 기사단장은 어디 있지?”
“제가 따로 내린 명이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입니다. 그에게 빠르게 연통을 넣어 이번 일을 맡길 생각입니다.”
“좋은 판단이다. 만약 피해 지역이 수도로 한정되어 있다면 그들이 대처해 줄 수 있을 테니.”
“각 영지의 영주들에게도 속히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마탑주에겐…….”
바스토르와 알라니아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테시우스는 아드넬의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더는 남장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 털어놓은 덕에 눈치를 보긴커녕 대놓고 걱정하는 티가 났다.
리비엘은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더니 “그럼 저는 황성 밖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며 고생을 자처하곤 홀연히 응접실을 나섰다.
아주 예상치 못한 수확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거, 하르트 공작이 아주 난리를 치겠군.’
복도 곳곳에 쓰러진 사람이 수두룩한데도 그 속에서 리비엘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악마가 있다면 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미 죽은 자들과 곧 죽을 자들 사이에서 웃는 리비엘의 모습은 도저히 인간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리비엘은 본성을 나오자마자 게르펜에게 하르트 공작저로 갈 것을 명했다.
그곳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진작 숨을 달리해 바닥에 나둥그러진 상태였고, 정원을 가꾸던 정원사며 손님의 방문을 환영하는 집사며 할 것 없이 모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한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리비엘은 저택 입구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서 “공작 각하! 어디 계십니까!” 하고 크게 외치며 그를 찾았다.
원체 큰 저택이라 목소리를 조금 높이는 것만으로도 쩌렁쩌렁 울렸다.
머지않아 2층 계단의 끝에서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케르페온 반 하르트.
율리시아와 똑같은 남빛 머리칼을 가진, 서슬 퍼런 분위기를 풍기는 날카로운 눈매가 리비엘을 향했다.
“무슨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