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방 안을 새카맣게 물들인 어둠은 사라졌으나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세레나가 있던 곳은 물론이고 기사들이 서 있던 자리엔 수북한 잿더미만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강한 힘이기에 사람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단 말인가, 일순 팔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아드넬!’
그때 테시우스가 팍하고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저앉아 있던 몸이 튕겨 나가듯 아드넬을 향했다.
그런데 침대 위엔 마찬가지로 잿더미가 놓여 있었다.
정확하게는 아드넬이 뒤집어쓴 이불 위에.
테시우스는 황급히 손을 뻗어 머리까지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냈다.
소복하게 쌓인 잿더미가 허무하리만큼 쉽게 스러져 바닥에 흩어졌다.
그리고 이불 속에 있던 아드넬은 놀랍게도,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아……. 다행, 다행이야. 정말 다행…….”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자마자 안도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테시우스는 아드넬의 손을 붙잡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러나 머리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람이 잿더미가 되었어.’
그건 세레나도,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있던 자리엔 불타고 남은 잔재처럼 회색빛의 탁한 가루만이 남아 있었다.
‘그럼 아드넬이 덮고 있던 이불 위에 그건 뭐지?’
저가 모르던 한 사람이 더 있던 걸까?
그리고 아드넬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던 걸까?
‘멀쩡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세레나는 자신의 생명을 태워 사악한 힘을 방출했다.
그녀 또한 가루가 되어 사라졌음에도 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여자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드넬을 죽이려고 했어. 그렇다면 답은…….’
세레나가 일부러 자신만 살렸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아드넬을 잃은 고통에 평생을 몸부림치란 뜻일지도 몰랐다.
제게 영혼의 단짝이라 말하던 세레나가 느꼈을 상실감과 절망처럼, 그러한 감정을 당신 또한 느끼라는 것이었을지도.
‘그럼 아드넬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아직 그것까진 알 수 없었다.
이불을 걷어내며 스러져 버린 잿더미의 정체도.
테시우스는 조심스레 아드넬을 안아 들었다.
일단 그녀를 데리고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등의 상처에 최대한 팔이 닿지 않게끔 조심하면서 안은 채 침실을 나섰다.
복도에도 똑같이 잿더미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복도를 지나 침실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쟁쟁한 비명이 들려왔다.
처음엔 작게 들리던 고통 어린 신음은 차츰 커져 갔고 더는 잿더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끔찍한 아비규환의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누……. 눈이, 눈이 안 보여……!”
“아파……. 너무 아파, 살려……줘…….”
“커억, 커허헉……!”
테시우스가 눈을 감고 있던 그 시간 동안, 형체 있는 어둠은 사람의 몸을 통과해 스쳐 지나가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복도, 후원, 별궁, 본성, 그리고 수도 전역까지.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어둠에 몸을 관통당한 이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형상이 되었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얼굴을 뒤덮을 만큼 수많은 발진과 종기가 일어나며 혐오감이 들 정도로 흉측하게 울퉁불퉁해졌다.
본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피부에선 피고름이 흘러내렸고, 어린아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대번에 숨을 거두었다.
별궁 내 사용인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제 몸 하나 제대로 지탱하고 선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에 테시우스는 작게 신음성을 흘렸다.
‘내가 걸린 것보다 훨씬 악독한 병이다.’
가까이 있던 자들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끔찍한 피부병에 걸렸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수많은 종기로 뒤덮이는 병이라니, 이것이 저주가 아니면 달리 무엇이 저주일까.
테시우스는 진심으로 그들이 안타까움과 동시에 아무렇지 않은 자신의 상태에 죄책감마저 들었지만 당장은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게다가 피부병은 자칫 옮을 수도 있어.’
하다못해 감기조차 전염성이 있는데 혹시 모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테시우스는 급히 다른 방에 들어가 손수건 두 장을 챙겨 하나는 아드넬에게, 다른 하나로는 자신의 코와 입을 가렸다.
‘우선 바스토르부터 찾아야 한다.’
본성도 이곳과 비슷할 테지만 상황의 수습이든 대비책을 마련하든 일단은 바스토르와 상의를 해야 했다.
그걸 떠나서라도 제 형제의 안위 또한 걱정되어 테시우스는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본성으로 가는 내내 마주치는 사람마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신음하고 있었다.
“도와……줘…….”
“살려 주세요……. 너무 아파요……!”
“전하, 제, 제발…….”
개중에는 테시우스를 알아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피고름이 흘러내리는 종기에 뒤덮여 간신히 눈만 뜨고 있는 모습은 실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미안하다.”
“도……. 도와…….”
“정말……. 미안하다.”
그럼에도 그는 못 본 척 외면하고 갈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제 나라의 국민이고 저를 위해 일한 사람들임을 모르지 않기에 지나치는 자신이 부끄럽기 그지없었지만, 당장은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말도 미안하다는 한마디뿐이었다.
테시우스는 차오르는 울음을 참으며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마침내 본성에 도착해 바스토르가 머무는 3층에 다다르자 다행스럽게도 뒤섞인 신음 사이로 선명한 말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집무실 앞에 다다랐을 땐 기사들은 온몸을 벅벅 긁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고, 그 안엔 저와 마찬가지로 멀쩡한 바스토르와 피부병에 걸린 파비오 후작이 있었다.
“……테시우스!”
“어, 어떻게…….”
파비오 후작은 바닥에 누운 채 색색 대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고, 그런 그의 옆에 바스토르가 주저앉은 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테시우스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바스토르가 울먹이며 답했다.
“밖에서 비명이 들려오더니……. 그가 나를 감쌌다.”
두 사람은 집무실에서 사냥터에 나타난 마수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대뜸 밖에서 웬 소란이 일며 기사들이 소리를 지르자 빠르게 문을 열고 상황을 파악했던 것인데, 시커먼 기운이 사람의 몸을 통과하며 퍼져 나가는 것을 보자마자 파비오 후작은 곧장 몸을 돌려 바스토르에게 달려가 그를 감싸 안았다.
사악한 기운을 제 몸으로 막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바스토르의 오랜 심복이자 충실한 보좌관이던 그는 잠시 후 끔찍한 모습으로 쓰러졌고, 바스토르는 테시우스처럼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파비오 후작에겐 미안한 생각이지만, 덕분에 테시우스는 한 가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생명력으로 막을 수 있는 걸까?’
세레나가 어둠의 기운을 방출했을 때 아드넬은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아드넬이 덮고 있던 이불 위엔 잿더미가 있었다.
더구나 세레나가 오기 전 아드넬은 목 위까지만 이불을 덮고 있었는데 테시우스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할 땐 머리를 완전히 덮은 채였다.
모든 정황이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 목숨을 걸고 아드넬을 지킨 거야…….’
지금으로선 그게 누구인지 몰라도, 자신의 온 생명을 바쳐 그녀를 감싸고 지킨 게 분명했다.
테시우스가 그러고 싶었듯이 그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그의 짐작은 사실이었다.
머지않아 집무실에 황후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바스토르……!”
“어머니…….”
알라니아는 쿵쾅쿵쾅 발소리가 유난하게 들릴 정도로 황급히 달려와선 바스토르의 얼굴 곳곳을 살피더니 눈물을 흘리며 안도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얼굴 어디에서도 피부병의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바스토르가 묻자 오래도록 알라니아를 보필해 온 시녀장 베르텐 부인이 자신을 감싸 안았노라 답했다.
“아무래도 다른 이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하면 피해 갈 수 있는 모양입니다.”
파비오 후작과 베르텐 부인, 그들은 모두 끔찍한 피부병에 걸렸으나 그들이 모시던 황태자와 황후는 아니었다.
알라니아는 화원 바닥에 누워 있을 그녀를 생각하며 또 한 번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그 어두운 힘이라니, 고서에 나오는 흑마법과 다를 바가 없어!”
당연하지만 별궁에서 있었던 일을 모르는 두 사람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테시우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세레나와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가 말을 이을수록 바스토르는 물론이고 알라니아 또한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세레나가 마녀였을 줄은…….”
그녀는 바스토르를 오래도록 모신 시녀이자, 아드넬을 지켜볼 의도로 별궁에 보낸 사람이었다.
그럴 정도로 믿었던 사람이었기에 바스토르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알라니아는 아직도 제국에 마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격분하며 이를 갈았다.
“이래서 진작 씨를 말린 것인데 결국 이 사달이 나다니, 내 당장 친위대를 풀어……!”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수도의 사람 대부분이 병에 걸렸을 것입니다.”
기록을 뒤져 보면 어떤 병인지, 치료법이 존재하긴 하는지 찾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도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바스토르가 고심에 빠지자 테시우스 또한 생각에 잠겼다.
‘아드넬이 마녀라는 걸 밝힌다면…….’
치료도 물론 가능하지만 역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세레나의 말처럼 아드넬이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을 경우 그녀가 가진 마녀의 힘으로 이 끔찍한 피부병을 치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마녀라는 걸 밝히면, 아드넬은 과연 무사할까?
더구나 황후가 저리 격분하는 지금?
‘……아니다, 적어도 당장은 아니야. 아드넬은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했어.’
곧 적절한 때가 올 거라고, 테시우스는 생각하며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사람은 또 있었다.
이 모든 사달의 중심에 서 있는 리비엘 라이칸 후작이었다.